말씀을 구불구불 따라가다보면 목사님이 하시려는 말씀이 뭔가 하는 멘붕이 올 것 같다가도 확연히 풀리는 지점이 온다. 복음의 값에 내가 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그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좌절의 순간이 올 때,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구원의 때가 마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믿은 것으로 착각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값을 우리가 지불했다고 오해했던 부분이 드러난다.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내 복음으로 인하여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 고백이 되자.




요한복음 9 / 니고데모(2) / 요 3:8-15 / 1984.06.17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나게 한다. 지난 시간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과 그가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 틀렸다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독교를 가장 쉽게 표현하면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자'다. 그 뜻은 참으로 깊고 오묘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다 깨닫는 것보다도 그 내용이 곁길로 흐를 수 있다는게 더 무서운 일이다.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가장 무서운 건 자책감이다. 내가 이런 꼴을 하고도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자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자폭, 도망, 슬슬 다 그런거야 하고 넘어가게 된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나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겠다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표현이 가진 깊은 뜻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 성경만큼 깊고 오묘한 말씀이 없다. 들을 수록 새로운게 나온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가, 그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난처하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자를 믿는가, 십자가 사건을 믿는가, 아니면 그 둘을 다 믿는가? 본인이 대답을 해보라.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어려운 말이지만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성경에서는 이 맥락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어렵지? 여기까지만 듣고 나가면 이단되는거다. 다 듣고 나가야 된다.


지금 예수님은,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15절 말씀,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라는 것은 독립된 약속이 아니라 14절 말씀을 이해하는 자에게만 얻어지는 부수적인 거다. 14절이 더 중요한 형국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영생을 얻게 하는데 있어서, 영생을 주는 핵심적인 사건은 15절이 아니라 14절의 사건이다. 15절의 약속은 14절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 인자가 들리는 사건이 있어야 약속이 성취된다. 15절의 약속들,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게 하겠다. 나를 믿는자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신 영생이 일어나는 사건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하는 것이 15절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14절이 딴 게 되고, 14절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15절이 딴 게 된다. 


여러분의 영생은 예수를 믿어서인가, 십자가 사건을 믿어서인가? 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예수가 최소한 영광의 모습이어야 되나 처참한 모습이어야 되나? 영광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십자가는 처참한 모습이 아니라 감격의 모습이 되어야 맞다.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좋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생겨나온 사건 자체는 영광스럽고 감격스럽고 멋있어야 하는게 일반적인 사고 방식이다. 


이자가 5천만원이면 원금은 얼마겠는가? 아무리 비싼 이자라 할지라도 5억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그 때 얘기하는 십자가 사건이나 예수는 구원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한 원금으로서 늘 많이 치장된다. 아직 본론을 꺼내놓지 않았다. 이제 살살 들어가보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이 표현으로 이 문제가 풀린다. 신약은 구약을 그 사건으로 제시하지 않고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행이다. 민수기 21장으로 가보자. 


4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5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6그러자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7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8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9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믿어라. 누가 십일조 내라고 했냐. 믿지도 못하냐. 그러나 조심하라. 요15절을 놓고 보면 14절이뒤집힌다. 믿지도 못하냐, 쳐다도 못 봐? 식으로 말하자면, 민수기는 쳐다본 목표물이 근사한 것이어야 한다. 믿는 자마다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자면, 민수기도 쳐다보라에 강조점이 떨어진다. 그러면 쳐다보는 목표물이 근사해야 한다. 그런데 모세로 하여금 들라고 한 물건이 쳐다보고 싶은 물건이 아니다. 뱀이다. 뱀은 성경에서 딱 한 번, 뱀 같이 지혜로우라는 맥락 말고는 죄의 원형으로 상징된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들리워져야 한다. 뱀은 곧 예수님을 상징, 근데 이 뱀이 사탄, 죄, 그리고 예수로 상징이 이어진다. 큰일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오해하는 지점이 명백히 드러나는 거다.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은 쳐다보는 목표물로도 아니고 쳐다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효력을 얻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쳐다보는 대상인 뱀 자체가 효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다.


쳐다봐야할 것이 쳐다봐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쳐다보는 것 자체도 가치있는 방법이 아니다. 쳐다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민수기는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란 말이더냐, 민수기에서 찾아봐야 하는 사건의 핵심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렸다. 그들에게는 불뱀에 물린 것이 자업자득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셈이다. 불뱀에 물린 걸 해결하는게 문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늘 당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늘 불뱀에 물린 거 치료받았다고 해서 내일 물리지 말라는 법 없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상 그들은 불뱀에게 또 물릴 것이 자명하다. 그들의 죄인된 것을 고치는 것을 하나님이 제시하신다. 우리의 죄를 없이 하는 것, 죄를 처치하는 방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세지로 제시하신다. 


나무에 뱀을 달아매라. 뱀은 죄의 원흉, 저주의 상징이다. 왜 나무에 달라고 하는가? 성경은 이 사건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나무에 달아매기 위해서 특별한 요구를 이스라엘에게 규칙을 제시한다. 사람을 나무에 달지 마라.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나무에 달아매는 것은 저주를 받는 것이다. 거기다 뱀을 달아맨다. 죄의 원흉, 놋뱀은 심판을 의미. 신명기 28:2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땐, 적군의 포로가 되고 하늘은 놋이 되고 이런 단어는 늘 심판. 그 발은 심판하러 오신다는 뜻. 밟아서 죽이겠다는 뜻이다.


심판받고 저주받은 뱀을 쳐다보는 것이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사명이 되는 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믿어라고 할 때, 나는 힘이 있다고 사랑받을 만하다고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고 주실만한 능력의 하나님이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르다. 요3장 보면, 이 사건이 사실상 14절을 근거로 해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내가 저주를 받음으로 너희가 고쳐지리라. 이 얘기를 이렇게 하면 명백해진다. 니고데모와 이야기를 하시는데, 예수님께 요구하시는 건 이거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대단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는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고 깨닫지 못한다. 진실로 이르노니 네게 필요한 것은 중생이다. 왜 그 말을 하셨나. 니고데모야 중생해서 다시 돌아와라고 하지 않았다. 니고데모의 현상이 어디에 있는가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생을 촉구하고 있지 않다. 중생을 위해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 모든 조건과 방법이 인간 자체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해결하겠다고 하신다. 너의 죄값을 위해 내가 죽겠다고 한다. 내가 너의 죄값을 치르는 수 밖에 너희를 중생시키는 방법이 없다.


15절에서 나를 믿으라는 말은 방법이 그 방법 밖에는 없다는 표현일 뿐인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서 왜 이렇게 열을 올리냐하면, 여기까지는 이렇게 이해했든,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별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다음 신앙으로 도약하는데 중요한 갈림길이 보인다. 예수가 오신 걸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를 제시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문을 열게 하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영접하고 믿어서 구원을 얻을 것인가 안 얻을 것인가하고 최후의 방법으로 제시됐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예수는 그렇게 오지 않았다. 내가 죄인이라서 날 구원하기 위해서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보석금으로 내놓은 거다. 내가 구원을 택하는 방법이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빼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놓은 거다.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난다. 둘은 혼동되고 있다. 그걸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해 실제로 이해하는데는 오해가 따를 수도 있다. 


이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의 신앙에서 문제가 생기는거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방법론으로 택하게 되면 그의 신앙은 자기의 기준과 기대한 것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때마다 무슨 지점으로 돌아가게 되냐면, 이러고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효력이 될까로 가게 된다. 구원을 얻은 이후에, 그거 확인하느라고 평생 머리가 세는 신자들이 많다. 다른거 할 틈이 없다. 다른 어떤 걸 하는 모든 것이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거다. 그 모든 것이 단지 자기 자신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맴돌고 있다는 거다. 이걸 딛고 뛰어야 하는데 밟을 때마다 가라앉는다.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구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예수를 선택하여 믿은자가 아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방법을 일방적으로 동원하신거다. 우리가 예수를 찬양하고 십자가 사건을 감격으로 본 것은 내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신 거고 예수님이 즐겨 자청하여 오셨다는데 감격과 감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했다고 오해하며 기뻐하지 말라. 우리는 죄인임을 고백할 것 밖에 없다. 나의 논리로 보면 내가 믿은 것 같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 마냥 보인다. 그러나 살펴보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붙잡으셨고, 그.가. 나를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로 속량해내셨다.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하나님을 본 다음부터 경험과 인식이 있는 거다. 


태어난 아이가 자기의 출생을 모르듯이 영적인 출생도 본인이 깨닫지 못한다. 아는 날이 오긴 한다. 아는 때는 이미, 태어나서 한참 된 다음일 수가 많다는 거다. 새삼스럽게 그 때 궐기해서 혼자 떠들고 잘난척 하지 말라. 감사의 신앙고백이어야 하지, 종특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끊임없는 교만, 그리고 이어지는 좌절. 우리는 아무도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없고, 동시에 좌절할 것도 없다. 우리는 옛 조건이나 가진 것으로 부름 받을 자가 아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만큼이나,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이요, 소유요, 그분이 놓지 않으면 놓아질 수 없는 사람임을 기억하라.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