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설교
배경
빌립보서: 대부분의 신약 서신들은 교회가 가진 문제를 다루는데, 빌립보서는 문제를 다루어내기 보다 교회를 향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서신이다.

빌립보 지명: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도성을 점령하면서 시작. 빌립 2세가 도성을 점령한 다음에 자기의 성전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가 된다.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예수 오시기 40년 전에 아우구스투스가 이 지역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왕권을 다투던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게 되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점령지를 영토로 인정하면서 많은 특권을 주게 된다.
투표권, 자체원로원, 로마 법 체계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공용어였던 라틴어. 면세 혜택. 로마 군대 주둔해 도시를 보호했던 지역
그래서 이 지역 시민들은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특심한 동시에 자부심도 대단했다.

바울이 유럽의 마게도냐로 가서 방문한 첫 번째 지역이 이 빌립보 도시이다. 이 장면은 사도행전에 잘 나와있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보니 회당도 하나 없었다. 유대교를 믿는 여자들 중 복음을 영접한 성공한 사업가 루디아가 복음을 듣는다.
점을 잘 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을 보고 계속 말을 건다. "지극히 높은 자의 종이 하나님의 말을 전한다."

귀신 들린 여자의 종이 소리를 쳐서 하나님의 종이니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계속 소리치니 바울이 귀신을 물리친다. 귀신을 물리치니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주인이 바울을 감옥에 가둔다.

감옥에서 만난 간수 이야기는 아름다운 회심 이야기 중 하나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 일어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빌립보서는 그 곳의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 남짓 된 시점에서 쓰여진 서신이다. 그 때까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역을 잘 도왔다.

바울은 감옥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쓴 네 개의 옥중 서신 중 하나다. 남서울 교회는 교육 특구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다. 자녀의 교육 떄문에 이 곳으로 이사온 분들도 있을 텐데, 성도들은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바울은 감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신 중 하나를 썼다. 빌립보서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시편의 다윗이 쓴 글을 보라. 기쁨을 노래하는 시들은 거의 다윗이 쫓길 때 썼던 것들이다. 시련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성도들은 놀랍게도 그 시련과 고통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글들을 쓰고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고백을 쏟아놓게 하는 것이 성도들의 경험이다. 성도들은 중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내면의 진실한 변화가 일어난다. 성경은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인격과 됨됨이의 중심이 마음이다. 성도는 내면이 변화된 사람. 환경이 열악하고 어려울 때에도 다른 것들을 읽어 낸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말씀을 누릴 수 있다. 변화된 마음과 말씀과 성령이 계신다.

우리 속에 성령이 없으면 누구도 성령이 아니다.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최선, 최고의 아름다운 글들을 쓰고 만들어내는 차이가 성도들 속에 있다. 우리가 환경의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다. 내면에 생명을 가지고 성령과 말씀이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최상의 조건이 제일 좋은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선 절대로 안된다. 고통스럽고 실패하는 자리에서도 최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그 속에 고백과 노래를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 세상을 거슬러 가고 세상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남들이 울 때 다 울고 남들이 불평할 때 다 불평하면서 사는게 아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면서 살기 떄문에 성도인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 감옥, 실패, 아픔, 눈물이 있던지 그런것들이 더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내는 것이 꼭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둘로스)
이 귀한 서신을 누가 쓰고 있나. 바울과 디모데가 보내는 사람으로 이름이 나온다. 디모데가 이 교회를 개척할 때 같이 있었다. 이 디모데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리고 달아났을 때 끝까지 바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바울과 디모데가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고 말하고 있다. 종 가운데에도 계급이 있는데 바울은 그 중에 가장 하찮은 종 둘로스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과 자식에 대한 소유권도 없는 것이 둘로스이다. 바울은 예수의 종이라서 생명에 대한 권리도 없다고 소개한다.

이러한 종됨은 성도들의 삶의 핵심이다. 이것은 억울림과 억지로 하는 종살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됨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하는 종됨을 말한다. 한 인격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종됨으로 사랑하는 백성이다. 베풀어 주는 것 가지고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사랑은 희생이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부류의 사람을 만난다. 예수 믿은 지 오래되도 예수 믿는 맛이 뭔지 모른다. 신앙 고백은 하지만 예수 믿는 재미를 모른다. 예수 믿는 맛을 알아야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행복한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예수 믿는 맛의 결정체는 주님의 종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담임목사가 한 마디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교회에 대한 단상. 목회자도 종일 뿐이다.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여 가르치는 것. 말씀이 만홀히 여겨지지 않기 위해서 그 직분이 귀하게 여겨질 뿐이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다. 각 성도들이 주님께 순종하면서 주님을 중심으로 함께 움직여져야 한다.

교회 안에는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종이 되는 교회를 하고 싶다. 교회 와서 사람들을 부리려고 하고 큰 소리를 치려고 하고 영향력을 미치려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힘을 다해 영혼들을 섬길 처소를 찾아내고,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찾아 하는 것이 교회이다.

자식을 잘 기르는 것이 무엇인가.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잘 기르는 것이다. 후배들이 가까이 와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목사, 더 훌륭한 목사가 되어주길 바란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사도 바울은 지체 없이 말한다. 예수 때문에 너희들의 종이라고 말하기를 말한다.

모든 성도와 감독, 집사들
바울이 누구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가. 감독들은 오늘날 장로를 말한다. overseer, 사람들을 돌보고 필요를 공급한다. 집사들과 함꼐 몸을 사용해서 한다. 성도들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한 단어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saint. 성경은 예수를 특심하게 잘 믿는 무리를 세인트라 하지 않고, 평범한 우리를 세인트라고 한다. 모든 성도가 세인트이다. 모든 진실한 성도들을 세인트로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구원의 목적이다.

모든 성도가 귀하고 하나 같이 평범하고 보탬이 없는 성도는 아무데도 없다. 모든 성도가 하나 같이 보석 같고 귀하고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될 귀한 분들이다. 특출한 일부만 성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님 앞에 모두가 절대적인 가치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귀한 생을, 마귀가 “너는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님 앞에 특별하고 하나 밖에 없는 세인트가 우리들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
이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복을 주시는 일이다. …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 세상은 모두, 운이 좋기를 원한다. 성도들에게는 은혜가 있다. 자격과 공로, 내세울 것이 없는데도 당신의 풍성한 사랑에만 근거해서, 우리의 자질, 가능성, 일한 것, 조건, 자격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근거해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요한 선물을 그냥 주시는 것, 그것이 은혜이다. 나이가 들수록 은혜라는 말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더 낮아지고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면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만 근거해서 내려지는 은혜가 있다. 믿어야 하고, 의지하고 붙들어야 한다. 세상은 자꾸만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의 공로에 의지해서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고 그 귀한 은혜를 선물과 복으로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평강이 있다. 평강은 은혜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평강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없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도 자유와 평화, 노래가 있다. 주님이 아버지시고 예수가 나의 주님이고 왕인 줄 아는 성도의 삶에 은혜가 있다. 그때 비로소 근심과 경쟁으로부터 놓이게 되면서 평강을 누리게 된다. 참된 자유가 있어야 기쁨과 희락이 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평강과 희락이 있다. 자격 없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평강과 희락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주위 사람들이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눔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일상에서 얼마나 누리는지를 생각해본다. 나의 일상은 아르바이트 하는 일터와 가정이다.

일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은혜는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일터에서 누리기는 참으로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에 따른 보상 체계가 일터의 근간이라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터에서 정직한 근로와 합당한 보상은 성경적으로 볼 때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어디까지 하는 것이 적절한 노동인지 그 경계를 알기 힘들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인정을 받을지, 그렇게 해서 좀 더 내 일자리가 안정이 될 지, 그래서 나의 수입이 더 좋아질지, 이 방향으로 생각하다보면 끝이 없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내 스스로 원하지 않는 다는 걸 알게 된다. 그냥 적당히 일하자. 나의 부족함이나 불완전함이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말자. 차라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일터에도 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나의 바톤을 넘기자.

이레가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상황이 나에게도 참 여전히 어색하고 모든 것이 더 처음스럽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더라면 내가 고민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괜시리 더 고민하게 된다. 여기라고 자식 교육에 욕심내는 사람이 없을까. 이웃집 아저씨도 2살 된 아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의료와 보육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의 모든 시도들이 모이면 아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가 엄마 아빠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면 참 거창해서 남사시러운데, 아무튼 걍 집 근처에서 상황에 맞는 의료와 교육을 받으면 될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