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 / 하나님의 사랑(1) / 요 3:16-21 / 1984.06.2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잘 추적해서 그 깊이를 더듬어 보면, 얼마나 우리가 큰 감격 속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갈 지 모르겠다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요3:16을 하나로 기억하는 것과 요3장이라는 전체적인 문맥을 갖고 있는 것은 다르다. 16절 말씀 하나만을 볼 때 일어나는 부작용이 있다. 은혜의 진리로부터 차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6절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보내셨고 그것을 믿으면 복을 받고 믿지 않으면 형벌을 받는다. 사랑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 오해되는 말이다. 관념론적으로 생각하면 둘이서 완성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에 나는 많은 불만을 갖고 있다. 사랑은 만들어내는 작품이나 미화, 아름다움을 예술, 문학적 작품으로 다듬고 깍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오해를 종종 한다. 우리도 잘 아는 재벌 명문 가문이 있다. 편의상 A가문과 B가문이라 하자. 두 가문의 딸과 아들이 사랑을 했으나 적대 가문으로 인해 비극을 맞는다. 집에서 반대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로미오가 견디다 못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나갔다. 상당히 열심히 벌어서 성공했다. 줄리엣이 그 돈으로 투자했으나 쫄딱 망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길, 줄리엣이 어찌 저러나 하는 거다. 요3:16도 하나님이 제시한 사랑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서 좋은 것으로 만드는가하는데 잘못된 초점이다. 성경이 사랑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쓴게 아니다. 누가 그 일을 하며, 누가 그 일을 설명하는가가 성경의 초점이다. 성경에서 사랑을 말하면 누가 사랑하느냐에 초점을 말해야 한다. 누가 사랑을 했는가? 하나님이 사랑하신거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사랑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해얄 일은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사랑이라는 말에만 집중하지 말고, 누가에 초점을 맞추란 말이다. 사랑이란 단어는 이런거다. 계획했다. 어떤 만큼? 천하가 두쪽나도 하고야 말겠다.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의지와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의지를 발동하는 일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을 하는 주체자가 분리되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는 거다. 우린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이란 것을 바로 꺼내놓고 이야기를 한다. 원래는 그럴 수 없다. 사랑엔 국경이 없다. 인간이 갖는 사랑의 기교함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고 하면 와닿는가? 사랑이라는 집념은 누가 계획하시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하나님의 집념이 있으니 그 일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나는 무얼 했나? 이걸 성숙하는 신자가 자기에게 던지는 질문으로는 가능하지만 이걸로 구원의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야 말겠다는 선언이다. 될 때까지 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표현이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16절을 다시 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보다 중요한 이야기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합쳐야 완전해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불안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이 시민권 있는 자다.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면목 없습니다만 그의 기업을 이을자가 된다. 무색하고 무안합니다만 하여튼 천국의 영원한 소망이 그에게서 취소될 수 없음이 사실이다. 그것이 어떻게 사실인 것을 알 수 있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단다. 그 사랑이 다시 빛이 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는 것이야말로 신앙적인 사람이 가져야 할 근거요 그리스도의 원천이요, 오늘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흔들리고 무너질 수 밖에 없을 때마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축복이요 운명인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어찌하리요. 누가 하나님을 거스려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난미이 내 편이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어찌 그 아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는가? 그의 아들을 우리의 죄값으로 줄 지언정,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할 지언정 우리는 저주하지 않겠다. 그 분을 죽음에 내어줄 지언정 우리는 죽음에 내어주지 않겠다는 거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이 나를 찾는 것을 누가 방해하겠는가?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