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 니고데모,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

요3:1-7
14절까지 연결되는 이야기의 전반부.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 유대인의 관원이자 스승격인 사람.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상당히 괜찮은 얘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정적이고 날카로운 답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의 고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특별하다고 했으나 예수님은 영적인 차원을 보지 못함을 꾸짖고 있음.

니고데모가 찾아온 동기는 예수님의 표적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6:26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다. 마12:38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세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들이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게 없다. 인자도 사흘 밤낮을 어둠에 있을 것이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사람들이 구하는 증거에 대해 예수님은 표적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다. 이미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포도주, 나사로, 문둥병자, 소경, .. 이것보다 더 큰 기적들은 없다. 여기 나와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저들의 올무에 걸리고 저들이 이미 결론을 내린 것 같이 사형에 합당하다는 죄목을 얻기까지만 할 뿐이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전도를 했다. 성 사람들이 회개를 했다. 요나가 가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을 때 전도한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이었다. 그의 공의, 심판, 요구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가 전한 내용의 주체는 하나님이었다.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와서 이야기를 해도 안 듣는 상황이다. 요나의 말을 듣고도 회개한 사람이 있는데, 너희는 요나가 말하는 주체인 하나님 자신이 와서 말을 해도 안 들으니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요3장에 우리의 약점이 나온다. 니고데모의 고백: 표적을 보니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예수님의 답변: 거듭나지 않으면 끝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온 근거나 원인은 예수님 보시기에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적이라고 하고 있다. 거듭나지 않는 한,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넌 왜 나를 못 알아보느냐 죽어라고 하는가? 아니면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가?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다. 마12장에서도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예수님이 하신다. 어떤 표적을 보여도 항복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거듭나지 않는 한, 어떤 표적을 봐도 항복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의 영적 회복을 하는 대속 제물로 바쳐지지 않는 한에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더라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결단코 꾸짖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이르노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마12장 사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 근데, 요나보다 더 큰 하나님 자신이 와서 말하는데도 듣지 않았으니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요3장을 근거로 해서 보면, 너희들이 못 알아보니 죽어라가 아니라 못 알아보는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왔노라고 말한다.

전도서의 결론인,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요나의 얘기를 듣고도 항복을 했는데 내 얘기를 듣고도 못 알아들으니 저주를 받고도 마땅하다라고 말해야 정상적인 맥락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후미에, 속죄를 받게 하려고 왔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어떤 원리를 가지고 인용하는가를 다시 봐야 한다. 원래 있었던 사건을 훨씬 더 풍성하고 깊게 하나님이 채우신다.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자를 니느웨 사람이라고 한정짓지 말고 인간이라고 해야 한다. 인간이 정말 회개 했다면, 전도 내용의 핵심인 하나님을 말하기도 전에, 벌써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해서 땅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겠는가? 니고데모야 너는 아직도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않는게 당연하다. 예수님은 그들을 속죄하기 위해서 오신 거다. 당연한거다.

그러면 요나가 전한 니느웨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가? 잘 생각해보라. 그러면 요나 선지자나 니느웨 사람들이 가짜라는 말인가? 아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인용함으로써, 고정된 역사적 사건을 뒤집자는 것이 아니라 그걸 원리로 해서 다시 어떤 가설로 끌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겁나는 것은 앞의 이야기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이 새로운 각도로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을 다시 보여주려고 할 때 너희가 나를 좇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나온다. 예수님을 좇아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하면 중요한 오해와 착각이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이 아니라 먹고 살려고 찾는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해 보면  교회의 인간들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서로 상대방을 못 살게 하고 손해 주고 자기는 이익 보겠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전쟁이다. 이념의 싸움은 허울이지 사실은 인간의 싸움이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단 하나의 기준, 예수 믿으면 좋고 예수 불신하면 다 악당이라는 기준 밖에 없다.

나는 이북에서 피난 왔다. 피난 왔다는 것은 잘 살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에서 피해온 사람들은 주로 지주다. 평안북도 구성군의 교회 재물을 관리한게 할아버지였다. 우리 아버지가 자라면서 그 모습을 봤다. 목사들이 얼마나 치사하게 먹고 사는 문제에 매였는지를 봤기에 아버지는 그 반발로 죽던 해에 교회에 나가셨다. 외할아버지는 목사였는데 평균 3년 이상 교회에 있지 못하셔서 개척교회를 13개 세우시고 돌아가셨다. 교회가 기성화되는 싸움 때문에 먼저 사표를 내고 나가시는 스타일이었다. 나에게 그런 아픔이 있다. 성경 말씀을 하다보면 불현듯 지난 날의 상처 받은 기억 때문에 목청이 높아지는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고,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여러분이 통촉해 주시기를 바란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을 상처주고 싶지 않다는 진심이 있다. 그런데 가끔 어떤 대목에서 광견병이 발작하는 부분이 있다. 나의 가장 큰 아픔은 목사다. 목사로서 받는 대접만큼 지극한 것이 없다. 목사가 됐기 때문에 받는 대접은 정말 극진하다. 얼마나 극진하고 진심어린 대접을 받는지 모르겠다.

근데 왜 목사는 대접을 받는데 하나님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가? 왜 요나의 얘기를 듣고 회개를 한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나? 우리가 하는 일, 직장에서 하나님이 대접을 받고 계신가를 보라. 예수님의 뼈저린 질책, 니고데모야 내가 네게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한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