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첫 기적은 물로 포도주를 바꾸신 기적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퉁명스러운 대답. 에수님의 기적은 그닥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쓰인 적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향해 있다. 자신의 헌신과 수고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 쓰였다는 말이다. 내가 요즘 한창 하고 있는 어른 되기 놀이에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다. 수연이에게 참 많은 말을 했는데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첫 기적,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 생각 같이 쉽진 않다.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첫번째 기적으로 택했다는 것을 명심. 첫번째 표적을 왜 하필 술 만들기로 하셨을까? 아직도 술 담배를 정리 못하신 분들 있을거다. 아직까지도 나갈 때 악수하면 포켓에 담배가 보인다. ㅋㅋ


기독교는 술담배를 갖고 시비거는 종교가 아니다. 그걸로 천국을 못 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은 절제를 요구받고 있고 덕을 요구받고 있는 것과 근본적인 사상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대니스 레인 목사님이 했던 말, 새벽기도를 안 할 수 있다고 하자 어떤 목사님이 이단이라고 공격했다. 주일날도 꼭 11시에 모일 필요는 없다. 주일은 늦잠 좀 자자는 거다. 우리가 오후 예배를 3시에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일찍 하고 권투 중계 보자는 거다. 그걸 꼭 7시에 해얀다는 법칙이 있진 않다.


술은 성경에서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술 취해서 좋지 않게 구는 건 경고를 하고 있다. 술은 늘 기쁨과 환희의 상징으로 쓰인다. 잔치에 술이 떨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술 담배 문제가 영적인 기준에 걸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한국 사람에게는 술담배를 안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비견될만큼 하나의 상표가 됐기 때문에 절제하라는 것이다.


기쁨에 관한 얘기가 포함된 오늘의 내용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설명을 하시는거다. 미래를 기대할 것이 없고 축복을 기대할 것이 없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잔치와 기쁨을 회복시키시고 기다리고 소망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시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살펴볼 것은 그것이 중심이 아니다.


포도주가 모자랐고, 예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일렀고, 예수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을 행해야 옳다는 건가 안해야 옳다는 건가? 말은 안할 것처럼 하시고 행동은 결국 하셨다는 거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문을 보면,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되어 있다. 당신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


더 헷갈린다. 게다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셔놓고 또 그 일을 직접 행하신다.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은, 요한복음에는 내 때에 관한 기록이 7번 나온다. 


이 때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이 고난받으며 십자가에 지시는 시간을 말하는 거다. 때가 이르리니. 주께서 잡혀 가시고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가고 예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본문을 돌아가서, 포도주 만드는게 왜 때와 연결이 되는가? 이런 생각을 해보자.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으로 인해서 기적을 일으킨 것과 일으키지 않은 것 가운데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무슨 이익이 있었을건가? 예수님 때에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행적을 추적할 때마다 기억해얄 것은 그 어떤 사건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일차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쓰일 때는 있다. 어떻게 섬기러 왔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쓰인다.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지적들이 나온다. 죄값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데 메시아로 왔노라를 증명할 지언정.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그에게 있어선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예수님이 누군가를 증명해내는 가를 시작하는 지점이다. 십자가를 지시는 길의 첫 발걸음이다. 축복과 영광과 갈채의 시작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과 어려운 일로 들어서는 시작이다.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의 모친 입장에서 보면,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어떻게 좀 해라. 필요한 것을 채워라. 내가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을 하러 온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온 자다. 귀신자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온 자가 아니라 죽어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을 화해시키러 오기 위함이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떼우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틀렸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내 영광을 드러내며 그냥 포도주나 만들어주러 온 게 아니다. 물론 그가 포도주를 만드실 것이다. 이런 말 다 필요없이 예수의 어머니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면 네 만들어줄게요라는 항복과 결과의 말이 되면 끝 아닌가. 


같은 사건이지만 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진다는 말이다. 악을 써도 마땅한 말이다. 예수님의 모친께서 요구한 것과, 예수님의 시각을 통해서 새로운 각도로 보는 것은 신자의 생활에서 천지 차이가 난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를 이루시사, 포도주를 만드시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기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다. 우리의 영혼을 축복하러 오셨다. 십자가의 가시관을 만들어 출발하시는 길로 첫 출발의 표시로 포도주를 만들어 내셨고 그의 수난의 시작은 우리에게 잔치의 시간을 이루어내는 쌍곡선을 이루어내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신자란 누구나 예수를 알게 된 이후로, 어떤 축복과 기적도 남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것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선 한 신자를 두 번 다루신다. 신자를 하나님께 항복시키는 것으로 다루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일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 때 필요한 것은 말하자면, 행복한 것도 아니고 평안한 것도 아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들어가는 일을 시작하는 거다.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남 앞에 화려하게 치장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연출하신다.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셨다. 바다 위를 걸으셨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얼마나 남았다는 사건을 볼 때 반대되는 개념을 봐야 한다. 


공생애 최초 세례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거든 증명해보아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살아가는 것. 나중에 무슨 기적을 만드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신다. 대치되는 사건 아닌가. 마귀가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뛰어내리라.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는 일절 대꾸를 안하시다가 그의 생애에서는 그것보다 더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가. 자신을 증명하는 시험을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들이 아니다. 뒤에 있는 모든 사건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 분이야말로 산 떡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라는 부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광과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신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에 그런 일들로 말미암아 갈채를 받고 추앙 받는게 아니라 훨씬 오해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사건. 눅 12장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것을 보이신 것은 단 하나의 목적. 우리가 누구며 그래서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을 확인시킬 수 밖에 없었음.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초대하는가?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나의 게으름과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예수님을 늘 등장시키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에 그를 좇았던 사람은 너무나 많았으나 십자가에 달릴 때 사도 요한 하나만 거기까지 따라왔다. 


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시는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는 족속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아놓고도 그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베드로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증명되는 것을 요청받는다.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로 보일 것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찾는 가장 큰 이유를 보라. 자신을 증명하는데 얼마나 많은 기도 제목이 나오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치장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이야 말로 가장 기뻐하신 길인데, 지고 망하고 죽은 길이다. 그걸 가장 기뻐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신자란, 신자 이후로 어떤 사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어야 한다. 어떤 기적이 연출되기를 원하나? 무엇을 원하나? 그 모든 요구들이 기도제목으로 등장할 수 있다. 우리의 안타까움과 연약함을 돌아보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알까봐 하는 이야기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하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무엇을 골자로 기다리고 안타까워 하는가. 예수가 걸어가신 길은 영광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다. 모든 신자가 그 앞에 부름받는 순간부터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기억해야 한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좇을 지니라.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가지 부족한 것 중에 기적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돌아오는 기적은 있다. 돌아온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생기는 기적이 없다. 저 사람이 저렇게 짓밟히고도 하나님의 사람일 수가 있나 하는 기적이 없다. 예수 믿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펼쳐보이는가 말고, 자기를 보호하는 것을 즐겨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의 자존심을 묻어버리는 기적이 없다는 것이다. 몽땅 바깥 세상에 들어오는 기적에만 관심이 있다. 들어온 자가 하는 기적은 없다는 거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우리의 썩어빠진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매일 매일 잔치를 하는 것 같은 감격과 기쁨과 보람이 되는 생애에 관심을 가져라. 우리의 순종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안타까운 사역에 동지되는 가장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원래 뛰어난 병사들에게 하는 사령관이 훈시 중에서 가장 멋있는 말이 있다. 


훈장과 약탈물을 많이 주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장병 제군들은 고향에 돌아가거든 다른 말은 하나도 할 것이 없다. 이 말만으로 족하네 나는 패튼과 함께 했었노라고. 나는 나폴레옹과 함께 전장터에 있었노라고.. 이것이 그들의 무한한 보람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패튼을 좇았던 사람들에게도 그 보람이 있었다면 십자군의 한 전사된 우리 모두에게 매일 벌어지는 전투와 매일 싸워야 하는 일거리들이 회피해서 싸워야 하는 수가 없다. 군복은 번쩍거릴때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있을 때에만 군복다운 것이다. 신자의 삶이 너무 예쁘다.. 싸움도 없고 갈등도 없고 숨어서 숨어서 목숨을 연명하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만큼 내일을 내다보는 비극이 없다. 아직까진 잘 해왔으나 정체되지 말라는 법 없다.


우리의 첫번째 경험들을 십자가로까지 연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 받았떤 감격들이 있었나.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걸어갔던 가나 혼인 잔치였던 시작이어야 한다. 거기서부터이다. 여러분의 생애는 기적으로 연결될 수 없고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과 친척, 친구들이 하나님을 보는 일들이 일어나야 마땅하다. 없으면 안된다. 그 일에 부름 받고 있는 거다. 우리 모두가 두 갈림길에 선다. 마리아, 혹은 예수님. 성경의 기록은 그런 이유로 이렇게 무섭게 하고 있다.


사람의 미련한 것 같이 한심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씀을 듣고 분명히 두드리고 깨우라. 힘을 다하여 결심하여야 하는 싸움이다. 쉽지 않기 때문에 사족을 붙인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 뭐라고 생각하나. 역사를 배우고 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배우면서 결론으로 무엇을 얻나. 사람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받지 않는다는 거다 사람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받지 않는다. 그토록 미련하다. 불을 보듯이 뻔한데 그렇게 한다. 지혜있고 축복 받은 사람이란 그런거다. 자기의 경험 외의 남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미련하려면 무식해야 한다. 고집이 세야 한다. 아는 문제에 대하여 게으르다.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살기로 결심하고 갑자기 미련해지지 않기로 한다. 오늘 가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여러분을 참으로 환영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 모든 운명과 축복들이 너무나 비참해진다. 아직도 남은 생애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 첫걸음을 걸으신 가나 혼인 잔치의 심정을 헤아리며 단단한 결심으로 헌신과 순종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야 한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