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5장. 하나님의 본
2013. 7. 9. 18:00이 설교를 80년대에 하신 건데, 지금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
아,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한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는데, 눈을 감고 기도하면 평안과 회복이 느껴진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엡 5:1-2
이 시대의 한 의인으로 요구받게 될 우리
하나님을 본받으라. 하나님을 본뜬다는 말. 틀에 부어서 똑같은 모양을 만든다. 이것은 하나님을 쫓아간다는 말보다 더한 말이다. 신자의 신앙 생활 속에서 감사와 고통 중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성령의 은사와 연결될 때 이 오해가 있다. 신앙생활은 늘 기쁨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기쁘게 하시며 감격케 하시는 간섭과 기적을 허락하시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좌절과 고통 속에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본받는 과정 중에 우리 속에서 뜯어내고 고쳐야할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뭐 하나를 받으려고 하면 그 자리를 고쳐야 하듯이 우리가 그냥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늘 느끼기 때문이다.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우리에게 새 부대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죄인이라는 고백의 연속일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하는 것이 너무 거룩하고 풍성하며 대단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자람과 좌절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본 뜨는 자가 되라는 말은 짐인 동시에 그런 부족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가신다는 대목이 얼마나 희망적인가. 우리는 그 경지에 못 갈 것 같은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약속을, 요구를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본 뜨라고 하신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약속을 한다는 부분에서 놀라게 된다. 우리는 이것이 가능할까에 대해서 자신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셨듯이 그의 입에서 나간 말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공허하게 돌아온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무서움이다. 우리의 반응과 상관없이 우리를 이렇게 요구하고 있고 이렇게 이루시고야 말겠다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무서움과 동시에 감사한 일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신앙 형태는 하나님을 본 뜨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늘 초점을 흐리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한다. 하나님은 없고 선함과 의로움으로, 도덕과 윤리로써 기독교의 윤리와 힘이 되는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기독교의 가장 큰 요구는 도덕적 차원에서의 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만든다는 것이다. 착한 사람이라는 것과 걔가 누구집 자녀라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우리를 보면, 우리가 도덕군자가 아니라 세상적 차원에서의 착한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은 분명 인간 아닌 인간이라고 보는, 그런 냄새와 모습으로 충격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핵심의 경지인 것이다. 이것을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요한복음 13장
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 한 가정을 잘 나타내는 말은 부모일 수도 있지만 자녀를 보고 알 수도 있다. 우리를 보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 분이 그대로 비쳐져 나오지 않는다면 아직까지 우리는 틀리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내 제자인줄 알도록 부름받고 있다. 그 뜻에 가장 정확한 표현이 마태복음에 나온다.
마태복음 5장
43“‘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44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우리가 요구받고 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는가?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기준이다. 우리는 옳다는 기준에서 많이 걸려 넘어진다. 우리는 옳기 때문에 화를 내도 된다. 옳기 때문에 심판해도 된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실, 옳다는 기준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옳아서 구원을 받지 않았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구원을 받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불신자에게까지 해당된다. 죄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해야 한다. 그 사람을 열등하게 생각하거나 경멸하거나 자기 마음에 우월감을 갖는 것 만큼 큰 죄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가.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말을 늘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해 왔는가. 우리의 기도는 다른 교회보다 나은 교회라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아는가. 우리가 죄 앞에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인식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눈을 치켜뜨고 살펴봐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봉사를 했는가 안했는가 착한가 아닌가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신앙이라 하지 않고 도덕이라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라 하지 않고 본능이라 한다. 책임이라 한다. 그것은 우리한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우리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는 것만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온 인내와 신경을 써야 할 만큼 사실 우리는 무력하다. 거기서 우리는 아직도 얼마나 더 죽여야 할 세포가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만족한 길로 인도하지 않은가? 우리의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온 몸이 십자가 아래에 장사되어야 한다. 우리의 감정, 이성, 성품,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이라도 이런 사랑으로 자기를 점검해 보아 합격점에 이르지 못하면 십자가에 묶기 위하여 복종하는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이 성경의 요구다. 성경은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이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인이 애를 낳으면 그 자식을 학교 보내주는 주인은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식은 학교 안 보내는 법이 없다. 학교 가는 쪽과 안 가는 쪽, 어느 쪽이 고달픈가? 그러나 그 교육을 받는 자는 복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부르사 그의 자녀답게 요구하기 위하여 그 훈련을 위하여 우리를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다.
욥을 생각해보라. 욥이 처음에 시련을 맞이한다. 몸은 손대지 않고 주변 환경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자녀가 없어지고 재산이 없어진다. 그러나 욥을 욥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은 그것으로써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까 결국 어디까지 가는가? 몸에 손을 대는 것 까지 간다. 우리에게 있는 일들은 그 일이 잘못해서 생겼다. 잘해서 생겼다라는 시점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무엇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그 고통이 계속 생기는 것이다. 밥이 익을 때까지 계속 불을 때는 것이다. 시간의 개념은 없는 것이다. 익을 때까지 삶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요구하기 때문인가? 자녀로 삼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하나님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다. 지난 한 달 동안 겪었던 어려움 중에 하나는 궁극적으로 이 결론을 간과한 데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일을 허술히 하시는 분이 아니다. 욥기에 나온 표현을 빌자면, 침 삼킬 동안도 놓아두시지 않는 하나님이다. 욥의 친구들이 말한 것과 같이,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벌을 받는게 아니냐는 말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봐야 한다. 잘못된 것으로 인한 결과로 그치는 법은 없다. 그것이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그러한 일로 우리는 무엇이 훈련되어지는가를 봐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고치기로 하셨는가. 무엇이 더 든든해졌는가. 우리가 분명히 하는 건 이것이다. 우리가 예전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데 내(목사)가 방해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과감히 이러한 우상을 짓밟고 우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찾아갈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신자들이 하나님께 달려가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우리의 신앙 아닌가. 우리에게 아무리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받은 자녀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삶의 근거고 원리이고 판단 기준이다. 우리는 자신을 소중하게 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책임을 가지고, 쉽게 살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책임을 가져야 한다. 깨어 기도해야 하며 다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된 약속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할 수 있다. 우리는 고통의 자리에서도 좌절을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우리를 유익케 하며 키우며 완성시키는 자리로 데려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까지,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가 온전한 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