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인 싸움에로의 초대
2013. 7. 12. 01:29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필연적인 싸움에로의 초대
에베소서 6:10 - 13
엡 6:10부터 끝까지의 내용이 엡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다. 에베소서를 세 단락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3장 교리, 4-6:9 신자된 자로써의 신앙 원리를 어떻게 일상에 녹여내야 하는가, 6:10-끝 일상적인 삶의 모습과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초월적인 곳에서 일어나는 신자의 가장 높은 차원의 싸움과 무장에 관한 이야기.
결국 이 결론으로 올 것을, 앞부분의 교리적인 부분,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신앙 생활에 대한 것에 이어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 싸움, 우리가 누구며 무엇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떻게 의도되어 있는 사람인가가 확인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이 초월적인 싸움을 시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군복무 기간 중에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물리적인 힘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훈화 과정을 필히 거치게 된다. 그가 왜 싸워야 하고 왜 총을 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해야 하는가를 확실히 심어주지 못하면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가 무엇으로 의도되어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를 필히 알아야 했기 때문에 에베소서도 그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엡 1장으로 돌아가보면, 바울은 처음부터 우리 신자된 모습의 궁극적인 자리를 내다보는 관점에서 언급되어 있다.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다만, 고통에서 헤어나고 우리가 봉착한 난관에서 헤어나오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에서 꺼내셔야 했다는 것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기 원하시는가. 3: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의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비노니 ...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구원의 이야기를 반복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꺼내시는데 투입했던 그 집념과 치루신 대가와 함께 하신 간섭의 크심, 지혜로우심, 무한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진 목표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게 하는 것으로 유도하고 있는것이다. 강건해 지길 원하시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 시킨다. 새 포도주를 담아주고 싶어도 포대가 헌 것이면 어떻게 되는가? 가만히 놔둬도 괜찮았을 포대가, 새 포도주를 담는 바람에 포대도 터지고 새 포도주도 버리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강건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서 구원의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처음 기도문에서 나왔던 이야기라는 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1:7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며 ....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를 구하노라.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꺼내시며 간섭하시며 사랑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해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적지로 떠밀려 가고 있기에 소극적인 싸움, 부정적인 싸움으로는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이 해야 한다. 4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부르심에 합당한 일을 하라. 너희가 판사가 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법학을 공부해라. 군인을 부름 받았으면 군인에게 필요한 훈련을 해라.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평안의 매는 줄, 성령 안에서 하나됨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기름부으시는 성령을 받기 위한 기초 체력과 같은 것이다. 마치 무엇과 같냐면, 야구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기술은 무엇인줄 아는가? 야구 선수를 뽑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보는지 아는가? 야구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실력. 달리기다.
육상은 모든 운동의 기초다. 탁구도 마찬가지. 탁구는 다리로 친다고 한다. 권투 마찬가지, 펀치력 싸움 아니다.
신앙의 기초 체력, 신앙을 강건하게 하는 것, 그것을 어디서 하라는가? 교회에서, 어디서 실천하라는가? 가정에서 부부끼리 자식과 부모 사이에서, 사회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시작해 점점 늘어나라는 것이다.
스프링 캠프. 누구나 하는 기초 운동이 무엇인가? 토끼뜀, 계단 뛰어오르내리기, 역기 들기, 배드민턴 선수들도 역기 들기를 한다. 기초 체력이 없으면 게임을 당하지 못한다. 달리기를 하면 순발력이 키워지고 지구력이 키워지고 심폐 기능이 강화된다. 모든 운동은 결국 나중에 누가 더 견디며 오래 참으며 끈질긴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강해지라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목표로 밀려가는 이유는 강해지고 넓어지고 커지는 것만큼 우리가 위대해질 것이고 영광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 다 모른다. 성경이 이야기하는대로라면 마치,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송충이 비슷하게 생긴 애벌레가 우리가 그토록 황홀하게 쳐다보는 제비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 되는 것 아닌가. 누가 더 영광스럽고 충만할 것인가는 이것이 바로 기초 체력이 되는 것이다.
4:17 보라. 이런 시각에서 모아 보아야 한다. 이방인의 허망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이런식으로 요구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누구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 같이 행하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치 말라. 그 속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고 용서하심 같이 하라.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
우리를 자꾸 한 초점을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욱 강하게 더욱 강하게.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부부 간에 살 것과, 자녀와 부모 간과 사회 생활, 이웃과의 관계 등이 요구된다. 그리고 끝으로 6:10에 이르러 종말로. 이 모든 훈련 과정을 거쳐서 무슨 싸움을 와야 하는가. 그 힘으로 강건하여 지고 마귀의 궤계에 강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 영적인 싸움에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가 강건해 지고 더 강건해 지고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는 최후의 훈련장으로 부름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과 싸울 힘이 없어 우리를 부른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천국에 가기 위한 마지막 남은 관문이라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더 크신 충만함, 더 높으신 자리를 맛보게 하기 위해 요구하시는 과정인 것이다. 이 과정을 지나가지 않고도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요구하기도 한다. 어떤 신자는 분명히 예수 믿는 것도 심드렁하게 믿고 별 큰 일도 생기지 않고 덤덤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신자도 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 보석처럼 빛나길 원한다. 지옥에 가지 않는 정도로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의 관쓰기를 부름받고 있다.
마지막에 나오는 이 싸움들을 보면, 이 싸움이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앙의 훈련이 우리 자신에 관한 문제였다.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고 죄가 우리의 습관이고 본능이었던 것으로부터 우리 안에 일어나는 죄를 몰아내는 싸움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외부와의 싸움이다. 악한 영과 마귀와 사탄의 궤계와 맡서는 싸움이다. 이것은 그렇게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경계선이 아니다. 악한 생각을 하고 악한 일을 하게 하고 더러운 일을 하게 하는 사탄에게 달린 일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간접적인 영향에 의한 것과의 싸움이었다면 이제 외부와의 싸움이라는 그 원흉, 그가 일으킨 그 일을 처치하는 싸움이 아니라 그 자체와의 싸움으로 진일보한 것이다. 이것이 싸움의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이 싸움으로 가는 가장 큰 난관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권세자들에 의한 후유증으로 부수적인 결곽로 있었던 싸움을 할 때에는 자칫자체로는 관념론으로 흐를 수 있다. 선악의 대결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6:10 이하의 싸움으로 오면, 싸움의 격이 어떻게 변화되냐면, 이것이 착하다, 의롭다, 더럽다의 개념의 싸움이 아니라 확실한 존재와의 싸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이나 기쁨을 구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주제가 되어야 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한 것을 좋아하니까. 이 싸움을 왜 해야 하는가, 천국이 도래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곧 날 것이라는 믿음 하에 시작되는 싸움이다.
그러나 내부적인 싸움에는 조금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도덕성이나 관념적으로 들어가버려서 하나님의 실재, 실제적인 싸움에서 깜박 외면되기 십상이다. 남들 버젓이 잘 사는데 왜 나는 이러한 싸움을 해야 하는가 하는 오해를 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전의 경지를 벗어나는 싸움이 되는 것이다. 행복하고 기쁜 것을 구하는 데서 그치면 지금 말하는 이 싸움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 싸움에 들어서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신앙이 진일보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마치 한 운동경기가 발전하려면 프로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넘어가야 한다. 아마추어 야구의 실력이 올라간다는 말이 요즘 많다. 프로로 가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로 가면 아무도 훈련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성적이 나쁘면 당장 쫓겨나기 때문이다.
이 싸움의 진전이 사실은 교회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교회가 행복론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내가 착하게 살고 있는 한 하나님이 손대지 않으실 거라는 것만 믿고 말이다. 하나님, 도와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방해만 하지 말아주세요. 딱 이런 심보다. 우리는 더 이상 천국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먹고 살만해졌으니까, 사는게 재미있으니까 그렇게 됐다. 교회가 이 싸움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다. 구역예배에서 어느 주식을 사면 이익인가를 말하는 것은 참 난처한 모임이 되버린다. 구역에서 모이면 영적인 교제, 어느 싸움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 신앙 생활을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어떤 보답을 받거나 행복과 기쁨을 누리도록 의도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악한 것은 입에라도 올리지 말라, 용서, 온유, 겸손, 사랑, 복종하라, 주께 하듯이 상전에게 해라. 주님 아래 놓여있는 자로써 네 주를 다스리라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것을 거치면 드디어, 총들고 나오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리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축복은 조그만한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건 고달픈 사실이 아니다.
우리 인생에 10년만 투자하면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전 인생을 투자해도 모자라는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와서 누워, 편하게 쉬는 안방으로도, 병실로도 우리를 부르지 않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를 군부대로 부르고 있다. 우리는 무장을 하고 여기 모여야 한다. 거기가 끝이다. 혹 여러분 마음 속에 이런 마음이 있었을까봐 겁이 난다.
어느 만큼했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이만하면 하나님이 이제 됐다고 하시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아직도 안 받았다면 아직도 그릇이 작다는 이야기다. 오늘부터 우리가 기억날 때마다 숫자를 세는 것만큼 돈으로 주신다고 생각해보라. 언제까지? 언제까지 하는 걸 다 준다고 할 때 여러분은 좋겠는가? 30분 동안 우리가 몇까지 셀 수 있을까? 2000까지 셀 수 있을까? 2000원 받아서 뭘 하겠는가? 평생 세어야 하지 않을까? 난 어느 정도 세다가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만 받아야겠다고 하는 사람 없지 않은가?
이건 돈보다 더 좋은 이야기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우리보고 도대체 얼마나 준비하라는 것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을 주시려는 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영광된 소망이고 기쁨의 소망이며 바라보는 우리의 희망이자 자랑이며 기쁨이어야 한다. 여태껏 투자한 것 지금 주십시요라는 건 안된다. 이건 너무나 가난한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이 우리를 붙들어야 한다.
10절부터 시작된 구절부터 마지막까지 우리가 어떻게 강건해지고 깊어지고 높아져야 할 지에 대해 기대를 가지고, 우리가 아직 들어가보지 못한 것에 대해 기도하고 은혜를 기대하고, 우리가 평생동안 이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기도하자.
에그 무서워라, 하나님 저를 빨리 데려가주세요라는 기도는 못난 기도다. 하나님 이것을 다 마치기 전까지 나를 데려가주지 마세요라는 기도가 평생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기도의 제목이 되지 말고, 기쁘신 부름에 호응할 줄 아는 깊은 신앙인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