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4장 실천 부분

2013. 7. 8. 18:21

성화의 길은 구원 이후의 행동의 길.

내 믿음을 행동으로 보이리라 했던, 누구지? 베드로였나. 아무튼, 나도 오늘 그러하리라.





교리, 체험, 성화


1-3장 교리

4-6장 실천


교리가 교리로서의 자기 값을 다하려면 한 사람을 움직이는 것으로 행사될 때 그 값을 다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행동을 하거나 실천을 하거나 판단, 결정하는 것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할 목표, 기준, 목표로써 수긍될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신자들은 뜻밖에 맹목성에 즐겨 빠진다. 성도가 하는 말 중에 어처구니 없는 표현 중에 그가 행복해보인다는 표현이다. 보기에 행복하면 다다. 그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 하지 않는다.


모태 신앙으로 대강 믿던 어떤 신자가 중병에 걸려서 기도원에 가서 나았다. 주님의 사실성을 경험한 후 뜨거워졌다. 그 이후 자신의 모든 삶을 내려놓고 열심있는 간증자가 되었다. 우리 어머님이 그 사람을 매우 부러워했다. 나는 안 부러워했다. 어머니는 그 사람이 매우 행복해 한다며 부러워하셨다. 우리가 믿는 도리가 무엇이며 그 내용이 우리를 어떻게 항복시킬 것인가를 추적한 적 없이 행복, 감격이라는 것이 뚝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싸워봐서 졌다던가 그렇구나 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지지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믿음을 주십시오라는 기도, 맞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하늘로부터 포장되어서 소포로 배달되지는 않는다.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 만이 영적인 문제의 근원이시요, 그 분이 모든 것을 주시며 그 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앙 고백이기 때문이지 믿음이 갑자기 뚝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1-3장의 모든 교리는 4-6장에 있을 실천을 위한 목표, 길, 타고가야할 차이다. 1-3장은 알고 있고 확인하고 있고 인정하고 있고 거기 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설악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가고 싶게 할 지언정 그것을 이야기하고 잘 설명하고 갈구한다고 해서 설악산에 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디도서 2장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그럼 우리는 깨끗해진건가? 그럼요 우린 깨끗해졌다. 성경은 우리를 깨끗한 물건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사람을 요구하신다. 깨끗한 물건과 깨끗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깨끗한 사람이란 말은 그가 이제부터 행동하며 만들어내는 일이 깨끗한 것을 결실하는 생산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것들을 창조한 자가 되라는 말이다. 깨끗한 사람을 만드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는 깨끗한 것을 만들어 내는 자이다. 정직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성결하며 신적인 수준과 아름다움이 있는자를 말한다. 그것을 깨끗한 자라고 한다. 물건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 아직 서툴다. 깨끗한 것을 만들 수 있으며 깨끗한 것을 생산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일에 서툴다. 


집안의 쓰레기에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있다. 신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더러운 쓰레기를 만들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마네킹 처럼 서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선한 일에 열심이 있는 자가 되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성화란 무엇인가? 예수의 피값을 주고 산 자가 깨끗한 사람으로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아서, 좋은 것 들고 딴 짓하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우리는 깨끗한 사람으로써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도 한다. 


우리는 거듭난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가래떡을 촛불도 쓰는 오류를 범하는 등의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성화는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은사나 선물이 아니다. 3장까지의 모든 교리들을 왜 이렇게 구구절절히 자세하게 해야 하는가? 그 다음에 해야 할 것들이 대강 가르쳐서는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세히 적혀 있는 약도와 같다. 아닌 길과 맞는 길이 적혀있다. 그러나 약도에는 가는 길의 과정에 얼마나 힘든지, 가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는 적혀 있지 않다. 이것은 약도와 다른 이야기다. 약도가 머릿속에 있을 때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어디를 가야하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면 그에 따른 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성화는 약도를 추적했기 때문에 거기에 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교리는 약도처럼 그곳까지 가게 하는 방법만 적혀 있을 뿐이지 교리를 안다고 해서 그곳에 도착한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 교리는 지성주의적 경향을 띠게 하는 함정이다. 이와 달리, 교리를 알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는 생각은 신비주의에 빠지는 함정이다.


와치맨은 성화를 은사로 여기는 오류에 빠졌다. 성화를 하는데 가만히 있어라고 하고 있다. 성화는 실제적인 싸움이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하는 싸움이 아니라 내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싸움이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내세우는 싸움이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대신 싸우게 하는 것이 성화다. 나는 물러나 앉아있고 그리스도가 대신 나가는 것으로 이것을 오해한다면 큰 일이다. 나는 가만히 있어야 할 것처럼 여길 수 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다. 


우리는 아무리 손을 저어도 날아가지 못하고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중력의 법칙 아래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비행기를 타면 중력의 법칙을 극복하고 목적지까지 날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행기에 타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기도해야 하는가? 믿어야 하는가? 사실 기도나 믿음이 비행기를 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행기 안에서 뭘 하나 소용없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있다. 성화 문제에 있어서 비행기의 대목은 믿음이 등장해야 하는 부분이 딱 한 군데 있다. 믿음은 어디에 등장하는가. 탈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펼쳐놓은 계획과 의도와 약속에 대해서 에베소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다. 너를 통하여 영광을 선포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속에 너를 참여할 것이다. 이 길을 내 인생 속에서 펼치실 그리스도 앞에서 순종하여 내 인생을 주도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성화의 싸움이다. 주님 내 인생에 와서 대신 사십시오. 나는 카바레에 있을 테니 하나님이 하십시오 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 자신을 나에게 확인시킬 방법은 나의 존재 밖에 없다. 내가 인생에서 하나님께 무릎꿇으며 항복했다는 것을 스스로와 타인에게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약도의 끝, 목적지는 눈에 실제로 보이지 않는다. 하나씩 찾아갈 때마다 내가 맞게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향기와 의미와 보람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교리와 체험을 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 성령의 은사는 사실 그것 자체로는 성화가 아니다. 성경 말씀으로 어떤 깨달음이 있는 것 자체는 성화가 아니다. 성화에 대한 자극이지 내 걸음을 대신 걸어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당하게 걸어가야 할 길을 걷게 하지, 대신 걸어주시지 않는다. 내가 가야할 길은 울던지 손톱으로 기어가든 내가 가야만 인정을 한다. 내가 가지 않는 걸 와서 꾸중하고 매를 때릴 지언정 대신 가시지 않는다. 기뻐서 가든, 울면서 가든, 내가 가야 가는 길이다. 체험이 아니다. 체험은 우리를 자극할 뿐이다. 이론이 아니다. 이론은 우리가 방향을 잡게 하고 가야할 목표를 상상케 할 뿐이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내 손에 든 검을 꽂지 말아라. 저 마귀 너를 다시 유혹하려고 수많은 괴계를 쓰고 있느니라. 성화라고 하는 무대, 이 세상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죄의 권세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고 잠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때마다 보호하고 계시며 깨우쳐 주시며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교리적인 이해와 깨달음은 중요하다. 성화를 진전케 하는 자극, 도전, 기대와 갈증이 될 지언정 그것이 성화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신자를 꾸짖어야 하는 지점은 이 부분이다. 은혜를 받고 깨달음을 얻는 것 다 좋다. 그런데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성품에서부터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 신자는 의로우며 사랑하며 절제하며 양보하며 자비가 있으며 충성하는 자여야 되는 것이다. 그런 갈등이 있고 요소가 있고 시도가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 꺼내놓을 건 많다. 알고 있는 건 엄청 많다. 사진은 엄청 많다. 수련회 사진, 목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 참고도서 엄청 많다. 그러나 한 걸음도 실제로 걸어나가지 않는다. 이부분, 한국 교회의 나쁜 부분이다. 나가야 한다.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 어찌보면 유치하다. 거룩하기 보다, 고상하기 보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한국교회에는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 없다. 애를 써서 예쁘게 하는 말을 배워야 한다. 가만히 있어서 되는 싸움이 아니다. 그리스도께 힘을 다하여 항복을 하는 싸움이다. 성화는 생각보다 어렵다. 참 어렵다. 자기 말을 제어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완성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 일에 부름받고 있다. 하나님은 벧전16장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 안에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사는 것이 기쁠 뿐 아니라, 그 분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요, 만족, 그 분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어하게 된다. 우리가 결국은 그렇게 부름받고 있고 그 자리에 갈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명령이 아니라 그것을 즐겨하게 되고 애를 써서 좇아가게 되는 것이다.


스데반이 죽어가면서까지 천사의 얼굴을 하는 이유를 발견하고 우리도 그와 같이 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 성화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가.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에 그러한 신앙의 선배를 잘 못봤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얼마나 풍성하며 영광스러운지를 내가 되어야 한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