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3장 후반

2013. 7. 6. 18:27

남포교회 / 박영선 목사 / 제목 없음


에베소서 3장 후반 기도 부분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사랑을 아는가? 그럼 언제부터 사랑을 하는가? 맹렬한 것만이 사랑은 아니다. 사랑을 제일 맹렬하게 생각하는 것은 십대이다. 나중에 보면 그때 사랑을 풋과일이라고 회상한다. 언제쯤 되야 사랑이라는 걸 알까?


여러분들은 얼마나 쉽게, 사랑이니, 믿음이니, 승리니 하는 말을 겁없이 쓰는 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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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이방인과 유대인이 둘로 갈라져있었는데 하나로 헐렸으며...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었느니라.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사도 바울이 지금 애를 쓰고 있는 대목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과 손과 발을 맞추고 협력하고 훈련받아서 할 일들이 아닌, 그렇게 되어야 할 기초의 부분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능하게 된 기초 설명을 하고 있다. 담은 헐어졌고 외인도 아니고 그의 지어져 가는 집이니라. 이 부분은 우리가 참여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후에는?


결국은 14절 이하의 말씀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신자가 이루어 가야 할 부분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자의 생활이란 현실적으로 어느 영역에 있어야 하는가? 1, 2, 3장 중에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3장에 있어야 한다. 그 앞에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협력하고 순종하고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쳐 복종시켜 뒤따라 가야만 만들 수 있는 현실이고 미래적인 일들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 기초로써 설명을 했던 것이다.


에베소서가 6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기초 설명은 3장 13절까지고, 그 이후부터 우리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을 그 후반부터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어디에 있는가? 1, 2장 밖에 없다. 


에베소서하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구절이 무엇인가? 2:8 성령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이 부분이 가장 먼저 생각나네. 그러나 에베소서에는 훨씬 실천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기초를 가지지 않고 보면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다. 기초는 3분의 1 밖에 해당되지 않는다. 4장에 가면 이렇게 나온다.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예수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5장을 보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술 취하지 말라, 아내들아 어떻게 해라. 남편들아 어떻게 해라, 자녀들아 어떻게 해라. 6장은, 전신갑주를 입으라, 싸우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부분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있다하더라도 아직은 급수가 다르다는 것이다. 십대의 풋사랑 같은 모습이란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이 필요하다. 이건 겸양지덕을 발휘하란 말이 아니다. 실제로 모른다는 이야기다. 인생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를 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한 사람도 있다. 인생이 무엇인가? 그 때마다 다르다. 십대 때 생각했던, 이십대 삼십대 생각했던 인생이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영적인 나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느 영역, 무슨 욕심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다르게 정의를 내리게 마련이다. 


16절,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옵고.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위로를 받는 사람 있다. 예수 믿으시죠? 천국 갈 수 있죠? 그런데 왜 떨어요? 이러면 망이다. 이 말이 인생의 모든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건 가난한 거다. 먹물로 밖에 세상을 그릴 수 없는 것이다. 크레파스 12색으로도 세상을 다 그릴 수 없다. 능력이라는 것, 지금 죽어도 천국 간다는 말을 모든 삶에 갖다 붙이는 것은 이것과 같다. 어떤 이가 책임을 맡았는데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사람이, 그럼 내가 죽으면 되는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시며 능력의 사람이며 영원한 소망이 있으며 사랑을 맛본 자인데도 불구하고, 능력이 넘치고, 사랑에 뿌리고 박히고,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라는 이야기를 바울은 왜 다시 하는가? 앞에 있었던, 14절 이전의 이야기들 속에도 사랑, 믿음, 능력이 있다.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의 권속이요 사랑하는 자녀이다. 우리를 손톱도 갖다 대지 못한다. 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향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취소될 수 없고 타락할 수 없고 실패될 수 없는 운명의 자리에 와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미 능력이 있고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뻔히 아는 이야기를 왜 반복하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가장 쉽게 오해되는 것이 없다. 축구 경기를 보라. 옆에서 내가 차면 쉽게 할 것 같지만 직접 가서 해보라. 할 것 같은 것과 직접 하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눈으로 보고 그걸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뜻 밖에도 많이 일어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 주님 당신을 다 버린다고 해도 저는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베드로를 예수님이 믿었는가? 우리 편에서는 진심이라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가늠할 수 없다. 나는 산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산에 올라간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산에 올라가 있을 뿐인 것이다.


신앙 가운데 그 산이 높아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더 높은 데 올라갈 데가 있다는게 아니라 자기가 올라간 산 봉우리가 높아지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같은 인내, 같은 사랑, 같은 충성인데, 각자의 수준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이 한 사람에게 2억 빚을 졌다. 근데 그 남에게 2억 빚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2만원 빌려줬다. 2억 빚진 사람이 빚을 탕감 받았는데도 2만원 빚진 사람에게 탕감해주지 않아서 2억 빚진 사람이 잡혀갔다. 2억 탕감 받은 사람이 2만원 탕감 받은 사람보다 은혜가 많았다. 2억 탕감 받아놓고도 2만원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2억 탕감 받은게 얼마나 큰 일인지 본인이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 사람이 느끼는 정도가 그의 경험과 신앙의 수준에 따라 감사와 탕감과 은혜의 긍휼에 대해서 2만원 짜리가 있고 2억 짜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풍성, 긍휼은 결국 누구에게나 무한한 것이다. 우리는 어느날 2만원 짜리 탕감 받은 것을 가지고, 믿음을 안다고 여기고 쉽게 끝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만 중단하지 말고, 즉 너희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으로 인생을 그치지 말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더 큰 충만함을 끝까지 아는 인생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몰라도 할 수 없다. 


14절부터 계속되는 이야기를 19절로 가보라. 그 넓이와 너비와 깊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너무 쉽다. 내가 경험한 대목, 여기까지. 그것을 묶어서 너희에게 세일즈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감격이 가짜라는 말도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놀랄 것이 없다는 꿈에라도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지 말아라는 것이다. Ever going on. 내가 보이는 데까지 간다고 해서 끝까지 갔더니 코너였다. 끝이 보여서 갔는데 또 새로운 길이 있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가? 끝없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우리가 기뻐하고 혼자 갖고 있을 수 없는 것, 좋다. 우리에게 그런 것 무수히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끝이 되지 않게 하라. 믿음, 사랑, 인내 라는 부분에 있어서 어떤 벽이 되지 말아라.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주머니에 쌀 때, 포장을 할 때 큰 일 나는거다. 싸면 그 때부터 들고 다니면서 재기 시작한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깨우친 지식과 경험을 싸갖고 돌아다니면서 펼치는 일이 절대 아니다. 신앙은 우리가 맛본 것이다. 지금까지 맛본 것을 되짚어 경험할 필요가 없을만큼 풍성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세가 애굽에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한다.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네게 주겠다. 그것이 신자의 생활이다. 광야 40년의 생활과 비교해 보라. 광야 40년 동안 밟은 땅은 자기의 땅이 아니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 만나, 반석 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다닌 곳이 자기의 땅이 아니었다. 감격스러운 땅이 되지 않았다. 방황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땅이 이런 땅이다. 굶어죽지는 않지만, 홍해를 가르면서 건너왔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정작 필요한 것은 가나안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내가 밟는 것마다 내 것이었고 찬송할 내 땅 내 것이었다. 이 시대의 신앙에는 뜻밖에도 현재와 미래가 없는 것으로 정립이 되고 있다. 아주 두려운 것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영원한 죄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 되는 신분을 획득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이 내용만 공책에 써서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구약 백성이 경험한 홍해 사건, 만나 사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가 걸어서 궁극적으로 가야할 곳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획득하기 위해 억지로 피흘려 싸우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라는 말이다. 이 시대의 비극은 아무도 가나안 땅에서 아무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나 가난한 상태이다.


우리 자녀가 서울대를 들어가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그 자녀가 4학년이라면 지금도 입학한 걸 자랑할텐가? 4학년이라면 사법고시 패스했어라고 해야 할 말이 있는것 아닌가? 지금도 노트를 펼치면 비닐로 싼 합격 통지서가 있는가? 얼마나 가난한가? 합격한 날 한일관에 가서 먹은 음식 영수증이 전부인가? 이런게 어디있나 세상에. 하나의 합격은그 다음에 더 풍성한 것을 위한 한 문이었을 뿐이다. 거기로 들어가서 그 다음에 싸운 것이 있어서 이제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졸업한 이후에 와서 서울대학교 톱으로 졸업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우수운 이야기가 없다. 아무와도 친하지 못하고 혼자서 자기 집 벽에다가 졸업증명서 하고 상장하고 대통령하고 사진찍은거 놓고 매일 그거만 쳐다볼텐가?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서 이걸 보여줄 것인가? 그것만큼 가난한게 없다. 지금 삶에 대해서 지금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결론은 기도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거기서 기도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아는 것이 우리의 지혜로 아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됨을 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감동시키지 않는 한 그 말을 읽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을 인정한다. 우리는 풍성한 미래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기대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떨어진 재난에 대해서만 기도하지 말라.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기도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해야 한다. 오죽하면,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맨 끝에 모두 이렇게 적혀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의 들음을 위하여 기도한다.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된 축복들에 대해서 전혀 욕심과 관심이 없고 이제는 발을 빼야할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는 욕심을 갖고 있는 모습은 엉망이다. 이렇게 해 놓고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실 축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도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난하게 만들지 말라. 우리의 영적인 무지에 대하여 통탄해야 한다. 이건 회개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이 회개할 까봐 걱정이다. 울고 끝낼까봐 걱정이다. 이건 눈을 부릅뜨고 구해야할 문제이다.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그가 그의 자녀들에게 베푼 그 충만한 것들을 마땅히 누려야 하는 이 일들을 놓치고 사는 것에 대해 제발 억울해 하라. 부끄러워 하라. 억울해 하고 안타까워하고 이를 갈라. 놓친 것만큼 손해다. 이것이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다. 누가 신자의 삶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가. 이것은 아무도 뺏을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 신자들이 얼마든지 누구든지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약속들이다.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게 할 것이 있게 하겠다는 것이고 기도할 때 무슨 소리든지 항상 들으시겠다는 말이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간섭하시겠다는 약속 아닌가? 기독교가 우리끼리 모여서 기쁘자 기쁘자 하는 것이라면 흑인들이 불 피워 놓고 으쌰으쌰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항상, 쉬지 말고, 범사라는 말이 들어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별할 때, 비상시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우리에게 만족할 만한 아버지이신 거다. 제발 우리의 이익만을 위하여 신앙 생활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익과 만족과 자랑과 축복과 감사를 위하여 하는 권면의 말이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