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27장 -강해21

2013. 9. 21. 19:25

욥27장 -강해21

세 친구의 지적은 동일하다. 인과응보에 기준한, 성경 속에도 나타나는 중요한, 하나님의 공의
모세를 통하여 선언하신 복과 저주의 말씀.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와 원칙
그러나 욥기는 하나님의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면을 나타내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하나님의 공의를 말함.

하나님의 이 무한하신, 지극하신, 측량할 수 없는 것. 거룩하신 하나님이라 하는 것이다. 구별되는 이란 뜻이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한 개념으로 말할 수 없는 것.

빌닷의 질문에 대하여 26-7장에서 답을 한다.
26장에서 한 군데 짚고 넘어가자. 빌닷의 권면에 대해 욥은 아니라고 한다. 여러분은 누가 더 좋으냐고 물었다. 신명기의 심판의 하나님, 시편의 인자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이 강조된 것이 예수이고 그것으로 인해 율법을 완성했다. 은혜의 길이 어떻게 의의 자리로 가는 지를 옵기에서 보고 있다.

그분께서 꾸짖으시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흔들린다. 능력으로 ‘바다’를 정복하시며, 지혜로 라합 을 쳐부순다. (욥기 26:11, 12 RNKSV)

이 라합은 기생 라합이 아니다. 3장에 나왔던 리워야단을 말한다. 큰 괴물이란 뜻. 악한 세력의 상징.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 그를 대적할 세력이 없다. 그것이 말하자면, 아무리 큰 세력일지라도 하나님이 넉넉히 무찌르실 수 있다. 하나님이 높으신 것 아는데,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보다 더 크게, 천둥같이 일하고 계신다. 나는 벼락을 맞고 있다. 지금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그분께서 나를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게 하시며,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 괴롭게 하신다. (욥기 27:2 RNKSV)

나도 이해 못하지만 너도 이해 못한다. 하나님이나 그 누가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나를 뚫고 들어와서 나를 붙자고 얘기하신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헛되거나 거짓되거나 엄살을 부리거나 지어낸 것이거나 반대해서 거스르는 것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친히 겪고 있다. 그의 맹세이다. 욥이 하고 있는 답과 세 친구의 간격. 그 다른 차원. 이것이 욥기가 하고 싶은 얘기인 거다. 친구들에게도 자기들의 논리와 주장을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주고 있고 그 고소와 주장에 대해 욥이 차근차근 대답하고 있는데 욥도 모르는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처음에서 욥은 맹세한다. 나의 정당하심을 물리치신 하나님. 무시무시한 맹세다.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줄 아느냐. 너 뭐하냐. 내 의를 물리치시고 나를 괴롭게 하신 전능자시다.

나는 공의로운 자다. 성실한 하나님이다. 스스로 있는자를,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할 수 없는 분, 단순하고 간단한 신이기를 거부하시는 분.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하나님을 가장 궁극적인 권위와 근거를 두고 맹세하는 거다. 욥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이다. 2절은 내가 제정신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가 맹세의 근거를 제시한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바라보건대 여러분의 신앙에 방해하는 것은, 간단한 신앙이다. 형통과 불형통을 믿음으로 연결하는 거다. 이것 때문에 치열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한다. 현실적으로 고칠 수 없는 신앙, 내가 나를 뜯어 고쳐서 하나님도 만족하고 나도 만족하는 단계로 우리는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이 있다. 하나님이 잘못될리는 없고 그러면 내가 잘못한 건데, 이런 식으로 자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거다.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아는 답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만족을 해야 한다는 답을 가지고 있으면 이상한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러다보면 표현이 공식화 된다. 실제로 자신이 참여하지 않는 명분과 고함이 된다. 피와 눈물이 없는 기도가 된다. 기도를 멋있게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기도는 그의 눈물과 한숨, 땀과 피가 나와야지. 공시기도를 그렇게 할 순 없다 물론. 우리는 사실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할 틈이 없다. 기도는 얼마나 자신을 씻어 내서 흠이 없게 만드느냐에 달린 게 아니다.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어 우리를 자책하시게 하는 것 까지도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할 수없다.

우리를 욥의 고난에 까지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타협없는 무서움이다. 우리는 어디로 도망간다고? 쉬운 하나님으로 도망간다. 욥은 이제 배운다. 하나님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욥기의 시작이 어땟나. 사단의 도전 앞에 하나님이 응하시고, 그래 좋다. 욥이 고난을 받기 때문에 나를 신으로 인정하지 못할까? 그래해보자. 근데 여기서 욥을 죽이지 않는게 하나님의 뜻이다.

답이 없는 욥의 고난에 대해 가장 먼저 부르짖는 말이 죽여달라였다. 하나님 저 같은 걸 하나가 잘못했던들 무슨, 누구에게 누가 된다고 괴롭힙니까? 죽으면 끝이다. 고난, 슬픔, 분노도 없다. 하나님 입장에서도 잘못한 자는 지우면 평화롭지 않은가.

욥이 과정 중에 깨닫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깨닫는다. 고통보다 죽음이 더 어렵다.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를 보는 것이다.

제일 나쁜 신앙은, 자신이 얼마나 나쁜 지를 모르는 신앙이다. 간단하고 쉽다. 대화를 해보면 안다. 상대방의 말을 받아주지 못할 지언정, 자신의 더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며 이야기를 빼앗아 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대로 만든다. 잘못하면 갚으면 되는 줄로 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었다는 말을 못 알아 듣는다. 욥은 마지막에 그렇게 고백한다. 내 고통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이건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이다.

우리의 변덕, 실패까지도 이용하여 합력하여 만드는 선이다. 모든 선한 것과 진리를 가지고 꼰다. 은혜를 이야기하면 무책임해지고 죄를 이야기하면 테두리가 생긴다. 하나님의 창조를 가지고 일하시는 창조다. 우리는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사이가 아니다. 창조의 완성으로 끌고 가신다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이 하고싶은 이야기다. 절망할 수 없다. 절망까지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다.

이게 비극이나 공갈로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기독교 신앙의 무한한 자유와 감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무한한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무시무시하게 살아야 한다. 너무 털어버려서도 안 되고 너무 깔끔을 떨어서도 안 된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