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3장 - 강해 19
2013. 9. 17. 17:12욥기 23장 - 강해 19
앞 장에서 말했던 엘리바스의 주장에 대한 대답이 아닌,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욥
욥은 자기의 진심과 순결함을 하나님이 아실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일어나는 것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욥이 가진 문제가 아니라, 그가 무언가를 해결해야 답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두시고 아직 다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려움을 말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의 비밀이란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분이 한번 뜻을 정하시면, 누가 그것을 돌이킬 수 있으랴? 한번 하려고 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고 마시는데, (욥기 23:13 RNKSV)
하나님은 타협하지 않으신다. 그가 정하신 일에 대한 의지와 지극함. 예수 외에 다른 구원자의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로만 되어지는 죽음과 부활의 그 능력으로 들어오지 않는 구원은 하나님 허락하지 않겠다. 선택적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외의 것으로 타협하지 않겠다. 내가 지키고 내가 아는 일 보다 더 높은 뜻을 아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욥이 자각하기 시작한다.
내가 혹독히 원망하니, 라는 표현이다. 대단히 불편하게 여기고 거부감이 느껴진다고 이해하기 쉽지만 성경의 이런 표현이 또 쓰인 곳이 있다.
예수 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5:7 RNKSV)
순종하는 마음에서 통곡을 한 것이겠는가. 견딜 수 없는 마음이 통곡이다. 성자 예수님이신데도 감당할 수 없는, 신성으로서 감당을 못한게 아니라 인성으로서 감당을 못한거다라고 비껴나가지 말고 그가 겪은 고난은 욥이 당한 것과 같다.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이었다는 것이다.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는데 그러나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다. 개혁성경은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 경외함이 무엇인가. 상대방을 두려움과 복종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신뢰하듯이 말이다. 그가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으나 넘겼다는 것이다. 결정권을 넘겼다는 것이다.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는 것. 그 고통으로 예수님이 배운 것은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동일한 문제라 욥에게도 일어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 문제를 다 풀 수 없다. 우리는 자꾸만 순환, 환원주의로 풀게 되는 것이, "그러면, 인간은 신에게 굽신굽신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 아닌가" 라는 공식을 대뜸 들이댄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하는, 그의 기도에 영생은 아버지와 나를 아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저들도 우리와 하나되어 아버지와 내가 누리는 사랑 안에 있게 하옵소서라는 것이 중요한 기도다. 하나되는 것이 순종이다. 순종이라는 것이 다만 내 뜻을 접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채울 수 있는 것에서 하나님이 채우는 것으로 넘기는 것이다. 인간의 경지를 포기하고 신의 경지로 넘기는 작업이다. 그리로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죽음이다. 자기를 확인하는 방식과 자기를 목적하는 한계를 지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죽음. 죽어 넘어가야 비로소 예수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나 소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로서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그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욥의 위치다. 이것을 넘어서지 않고는, 자리를 부인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쉽게 넘어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인간의 극치일 것이다. 욥기의 필연은 그것을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과 보상의 경우를 넘지 않고는 그것을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욥이 등장했다.
욥이 죽음의 문턱으로 넘어가면서 겪는 경험을 낱낱이 고백한다. 욥은 처음에 생일을 저주한다. 그러나 진전될수록 그는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죽음은 다만 고통, 불안의 중단에 불과한다. 그게 아니라 생각하고 고민한다. 그것은 죽음보다 큰 것이다.
한정된 시간에 마음껏 욕심을 부려보는게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죽여버리면 되는게 그게 쉽지 않다. 그는 일정하시니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욥기에서 더 분명해졌다. 하나님의 길은 타협할 수 없음. 우리를 비명과 절망과 고난으로 인도하시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소멸시키거나 완화시키는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소원을 낳는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기도와 간구를 인해 그가 아들이시라도 순종함으로 완전하게 되었다.
쉽게 알라딘의 램프 같이 문지르면 안 된다. 어렵다. 어려워서 더 깊다. 더 놀랍다. 인간이 인생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더 놀랍게 된다. 기독교 신앙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