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4장 - 강해 20

2013. 9. 20. 21:50

욥기 24장 - 강해 20

이해하기 힘든 절이다.
23장 전체를 먼저 보면, 욥의 호소와 억울함이 있다.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이 내 말을 듣기만 하면 그냥은 못갑니다. 라고 호소를 한다.

24장에 들어오면,
하나님은 제 때에 안 만나주신다. 악한 자가 잘되고 가난한 자는 여전히 고통 당한다. 말도 안 되는 악행과 불의가 있는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힘듦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현실.

고래 등에 새우가 치인다.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않으신다. 제 때에 답하지 않으신다. 왜 안 만나주시는가? 지금 안 만나주시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가? 라는 욥의 탄원. 그런데 그런 일이 세상에 많더라는 거다. 악한자가 잘못한 일에 대해 벌 받지 않고 아무 잘못 없는 약한 자들의 억울함이 보상 받지 못하는 현실.

13절 이하, 밤에 일어나는 나쁜 일들이 대낮에도 일어난다. 원래 악당은 숨어서 해야 되는데 밝은 때에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는 험한 세상.

세상에 무슨 원칙이 있더냐. 지는게 이기는 거다. 지는게 이기는 거라는 말은 진 사람들끼리 만든 표어다. 권선징악 그것도 약한 사람끼리 만든 거다. 그 수 밖에 없어서.

욥기 23, 24장의 호소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고, 24장 1절에 있는 전능자는 때를 정해놓지 않는, 호소가 전달되지 않고 상달되지 않는, 하나님은 쳐다보지 않으신다. 출애굽기를 생각나게 하신다.

출3장 -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
6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7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8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신명기와 나란히 놓아야 한다. 신명기는 인과응보였다. 자기 한대로 복을 받거나 벌을 받는 것이다.

1“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세상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2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당신들에게 찾아와서 당신들을 따를 것입니다.
3당신들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4당신들의 태가 복을 받아 자식을 많이 낳고, 땅이 복을 받아 열매를 풍성하게 내고, 집짐승이 복을 받아 번식할 것이니, 소도 많아지고 양도 새끼를 많이 낳을 것입니다.

인과응보를 벗어나는 분으로 모세에게 당신을 나타내셨다고 시편 103편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행한 대로 갚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기억지 않으신다. 부모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 같이 우리를 대하신다. 이것은 인과응보를 벗어나는 하나님의 통치, 심판이 그려져 있다. 그것을 한 번 더 하는 셈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현실을 보고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 그래서 개입하시고 마땅한 대로 보응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출애굽에서 드러난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이라면 욥기에서 그것이 뒤집히고 있다.

다시 돌아와 욥기 23장.
8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9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10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10절에서 14절까지의 이야기는 문맥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예수 안에서 신앙을 갖고 있으니 억지로 갖다 붙인다. 하나님은 결국은 잘해주실거다. 그것을 알고 있고 지켰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라고 묶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다가 실제로, 상대적으로 신실하고 정직하게 애썼는데 보상받는 것 보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께서 오시면 결국은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실거라는 말로 위안을 받으나 지금은 불편하다. 욥기에서 이 지점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요구와 기도에 타협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일이 늘 있다. 이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내가 이해하고 내가 소원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조건을 갖고 있으면 내 소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목적을 타협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다는 것을 안다. 그것 말고는 묶을 수가 없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이 한 발 양보하고 인간이 애절하게 매달려서 얻는 합의한 답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뜻에 미흡한, 도덕적 종교적으로만 미흡하다고 생각하는데, 이해에 있어서도 소원에 있어서도 미흡한 이 불만, 하나님의 뜻에 멀리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이해의 부족, 우리가 요구하는 원만한 해결의 차이, 고통을 겪게 하신다. 이게 욥기의 증언이다. 왜 그렇게 할까?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의 실존
하나님과 합의하고 만날 수 없는 곳.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대등한 자리를 유지할 때 달릴 수 있는 간격.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격, 고통이 만들어내는 곳.

엡3장 8절
(모자람, 부족함, 죄책감, 한숨과 눈물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8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9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10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11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영원한 뜻을 따른 것입니다. 12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13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을 보고서, 여러분이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십자가, 죄인과 병신들을 위해서 오신 주님이다. 그런데 왜 자꾸 병신이 되지 않을려고 하는가? 우리의 모자람이 예수 안에서 무엇을 만들어내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조건과 자격으로 끊임없이 들어간다. 철길에 앉아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우리 붙어앉자, 우리 묶자라고 하며 하나님의 신비를 제대로 못 보는 신앙이 되어선 안 된다.

나의 무죄, 결백을 증명받는 것 외에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양보와 믿음, 인내도 없는 나 자신이 아닌가.

억울한가? 억울해하라. 23-4장이 그 이야기다 내 억울함을 해결하시는 분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보다 큰 답을 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누가 그를 막으리요.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누군지 알면, 이 자리에까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얍복 나루터의 야곱 씨름. 야곱은 무엇을 얻었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 무얼 이겼나. 무얼. 하나님과의 평행선, 끝까지 자신의 욕심을 놓지 않았던 야곱을 빌게 만들어서 평행선을 만들었다. 야곱의 인생이 하나님이 유일하게 복을 주시는 주권자 하나님에게 묶임으로써 그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걸어간 길을 하나님이 묶어 야곱을 이스라엘로 축복하시는 거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그들의 불평과 비명, 기적과 축복과 능력과 약속과 배신과 포로로 쫓겨간 것까지 다 묶고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증언이며 인간이 누군가에 관한 증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뜻과 형상으로 약속한 하나님의 약속의 영원함에 대한 이해이다.

못나서 울부짖는 밤이 있는가. 고치려고 하는 것보다 먼저 죄책감을 없애고 탓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기독교의 최우선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한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욥이 되라. 신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더 생각해보라. 우리의 억울함과 어려움은 모두 다 보편적 인생에 대한 어떤 증언과 위로, 경고요 잘못한 사람, 미련한 사람에 대하여 받는 우리의 어떤 유익, 순종과 지성과 헌신에 대해서 갖는 도전, 그런 유익.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인간의 유한하심을 알도록 하는 기차.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하여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신앙으로 묶으라.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