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3장
2013. 8. 3. 22:29욥기 3장에서 드디어 뭔가 일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비춰보니 한 없이 작고 초라하구나. 나 중심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내 삶이 한 없이 중요하고 진지해지지만 말씀 앞에 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냥 은혜로 서는 것이다.
욥 3장
욥의 한탄이 시작된다. 안그래도 현실에서 속상한 일 많은데 성경에서 욥조차 이런 일을 당하는 일을 우리가 봐야 하나.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창조물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대접하시는 고급한 존재라는 걸 확인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깊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고 그 창조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 결과, 우리가 소망하는 어떤 목적보다도 하나님의 목적은 크다. 그 차이가 고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욥이 자신을 저주하는 그의 비명, 절규 속에 자신의 죽음을 논하고 날들을 저주하는 날들이, 창조 사역에서 했던 첫째날, 둘째날을 상시시킨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자가 자기의 존재와 현실에 대해서 자책하는 것은 하나님한테 차마 말 못하는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 날이 왜 달력에 있었나, 내가 왜 태어났나 라는 말은, 하나님 나더러 어떡하란 말입니까 에 대한 다른 표현인 것이다.
3장은 굉장히 중요하다. 1장에서 사탄이 이렇게 말한 게 있다. 욥을 봐라 넌 왜 그 모양이냐 라고 하나님이 말하자,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욥의 울타리를 주께서 두르심 때문이 아닙니까. 이래서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 속에 욥의 자식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갔다. 그러나 1장 끝에 보면 욥이 일어나 머리털을 밀고 재를 뒤집어 쓰고 하는 말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찬양, 범죄하지 않음이다. 이 구절 때문에 욥기에 대한 오해가 많지 않았나 한다.
2장은, 욥이 충성된거 봤지?라고 하나님이 말하자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욥의 뼈와 살을 치소서. 울타리가 깨지는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몸체를 공격하는 일을 허락받는다. 이러하여 욥이 건강의 고통을 받는다. 이에 그 부인이 들고 일어난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나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는다.
그러고 세 친구가 위로하러 오고.
그런데 3장에 이르러서 욥이 막 화를 내기 시작한다. 내가 잘 하면 복주신다는 보응의 원리를 욥이 지키고 있다. 욥은 그 보응의 원리대로 살고 있었고 지금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보응의 원리가 주는 울타리를 허물었다. 그러나 욥은 그대로 붙잡고 있었다. 왜냐면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1-2장을 거치면서도 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면 아내는 뭔가. 보응의 원리를 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현실이, 자기가 믿는대로 결론이 나타나지 않으니, 못 참는 것이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심정은 아내의 입장 뿐만 아니라 욥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나타났냐면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께 불경한 소리는 못하겠고 그러자고 보응의 원리를 붙잡고 있자니 하나님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하나님을 원망할 순 없으니까 내가 안 태어났으면 됐을 껄 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으나 그게 그거인 거다. 욥을 미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안다고 생각한다. 거룩한 신자, 정직한 삶, 기도, 성경 등등. 이 정도하면 이제 뭔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들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고보니 하나님을 안 믿을 수도 없고 믿자니 그 틀을 잡고 있기는 어렵다.
현실에서 변화가 없으니 마지막 남은 줄은 천국을 붙잡는 것 밖에 없게 된다.
히12:1
믿음장을 전제하고 12장이 나온다.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는 길, 고난과 수치의 길을 걸어 하늘보좌 우편에 앉은 것을 기억하라.
그 길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어떤 목적과 내용의 길이라고 한다. 그 길을 간 선조들이 이렇게 많고 예수도 이 길을 갔으니 너희도 어려움을 당하여 승리자가 되라고 한다. 이는 욥이 당한 고난을 감수하되 혹은 이보다 더한 고난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고, 채찍질하니, 너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들을 징계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으리요.
이쯤되고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로 삼아 채찍질하며 재미보려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들 법도 하다. 여기서 징계라는 말은 자식만들기라는 원어의 뜻이 있다. 5절부터 보면,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한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자식으로 만들기 위하여 받아들이는 자들마다 자식을 채찍질한다. 훈련한다. 는 뜻이다. 자식이 영원히 아이로 있을 수 없다. 인격과 정신이 크기 위하여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꾸준히. 인격의 성숙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왜? 그가 무지한 채로, 아무런 준비와 훈련 없이 훌륭해 질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만들어야 하는 인격적, 정신적 훈련 속에 가장 필요한 것은 자라남. 우리가 어른들로부터 교육받고 요구받고 훈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살면서 밖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뒤에 이렇게 이어진다.
8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아버지가 없는 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고 있고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라 한다. 하나님이 자식을 기르기 위하여 징계하지 않는 법은 없다고 말한다.
사춘기라는 게 있다. 사춘기는 인생이 동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가는 시기이다. 한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하며 분별을 가져야 하는 것이 사춘기이다. 다만 웃고 요구하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배우는게 사춘기다. 사춘기에서 가장 오해되는 것은 사심없는 마음과 열정이 전부라고 믿는 것과 그것이 깨지는 시기이다. 순진함과 열심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것과 그것이 깨지는 시기를 사춘기라고 한다.
자녀로 부름받는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사춘기는 언제인가. 바로 요때이다. 순진하고, 정성을 들이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시기. 중고등 대학교 때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 오는 아이들을 최고로 치는 것은 못할 짓이다. 아무런 사심이 없고 세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신앙이 나오는 법은 없다. 왜 자녀가 부모의 교회를 떠나 나갔다 와야 하나. 세상에 들어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 외에는 나를 바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재이해하지 않고는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없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교회 잘 나오는 아이들 이쁘지만, 그러면 안 된다. 부모님들 속지 말라.
욥기 3장에서 그 시점에 온 것이다. 하나님 어떡하란 말입니까 내가 뭘 잘못 했단 말입니까. 그의 순진함이 깨지고 있다. 이 틀이 깨지면 살 수가 없다. 아예 이 틀을 갖고 있지 않아서 세상에서 살 듯이 생존경쟁 속에서 살면 이기든 지든 번뇌는 없을거 아니야.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법칙이 깨지자 당황하는 거다. 그러나 그 당황하는 마음은 본인이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고전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자신이 지혜있는 자라 생각하지 말라.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 것으로 알아야 한다.
고린도교회는 분파가 있었다. 바울, 아볼로, 게바, 예수파 등등, 이에 대해 바울이 말한다. 파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 파는 너를 소모품으로 생각한다. 파는 모두 너를 위해서 세운 것이다. 세상도 생명도 너를 위해서 다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의 것이다. 사람이나 세계, 자그마한 가치 밑에 들어가지 말라. 창조된 것과 창조 세계의 그 어떤 것이라도 너희보다 크지 않다. 너희는 다만 예수에게 속한 것이다.
사춘기에 가지는 생각 중 하나가 세상을 단순하고 간단하게 살기 원하는 것이다. 욥 같이 생각없게, 태어나지 말게 죽여주시옵소서라는 말을 하며 살지 말라.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뭔지 알아야 한다. 어렸을 때처럼, 조그만 장난감 주면 다 얻은 것처럼 교회에 목매지 말라는 것이다.
본인이 교회를 작게 만들어 놓고 그것에 목매지말라. 사춘기 때 아이들이 별 거 아닌 걸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거기에 목숨을 걸고 죽는 것이다.
사실 욥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별 거 아닌 걸로 생각하는건데 욥은 거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인하여.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없어질 자의 통치자가 아니요, 감추어졌던 것, 만세 전에 이미 정하신 것, 이 지혜를 만일 통치자들이 알았더라면 예수를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것이란 말이다.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십자가의 비밀을 자기가 다 아는 것 처럼 말하는 자들이 있다. 십자가의 비밀을 엄청 간단하고 값싼 것에다가 걸어놓고 막 갖다 짜놓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갖다 걸어놓은거 뭔가. 우리 자식? 건강?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아무도 이해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 꿈도 꾸지 못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다. 나는 이걸 전할 때마다 떤다. 이것은 내가 그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다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
롬4:17
아브라함의 증언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며 없는자 가운데서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창조의 하나님이다.
욥기에서 이미 시작하면서 확인했던 대목이다. 보응의 원리를 훨씬 넘어서는 분이다. 하나님의 창조, 성실, 은혜와 지혜와 하나님의 기쁘심으로 허락된 것이다. 없는 것에서 만들어진, 죽은 것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된 것이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이끌어 내셨고 아들이 없었을 때 이미 있을 거라고 예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이해와 논리 속에 하나님을 제한하여 그 법칙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집어 넣으려는 것이 우리다. 그렇게 안 하면 힘드니까.
평안히 살다 후딱 지나가게 해 주십시요 하는 기도를 시작하게 되자 신앙의 위대함은 교회 안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의 도전과 현실의 짐 앞에서 신앙이 자라야 한다. 장엄한 신앙의 영광들은 현실에서 사라졌다. 간절함은 있는데 비는내용이 너무 얇고 작다.
기도하라고 하면 너무 허황된다. 큰 걸 비라고 하면 아랍민족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런건 기도가 아니다. 한 인격이 성장할 수 있는 신앙의 깊이로 가야 한다.
욥은 첫 시작에서 탁 걸려 넘어졌다. 사춘기적 신앙이 드러났다. 이 과정을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 이 산을 넘어야 한다. 하나님의 싶고 넓은 자리로 끌고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