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함에 대하여
2013. 8. 5. 20:55인생을 설명하고 선택하는 여러 가지 관점 중 하나가 훌륭함이다. 훌륭함. 어떤 분야에 최고가 되는 것, 그 최고가 되기 위해 집중하는 것, 1등이 되는 것. 잘 되는 나, 고지론, 빈익빈부익부, 등등이 이 단어와 잇닿아 있다.
어제 모처럼 그런 분을 한 분 만났다. 자신의 분야가 그저 좋아서 10년간 한 우물을 팠다. 물론 한 우물만 판 건 아니겠지만, 어쨋든 10년이 지나고 보니 자신이 한 분야의 통이 되어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1인자라고 자부하는 분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훌륭함은 절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 사람이라는 것을 그 한 가지 단어로 밖에 해석할 줄 모른다면, 훌륭한 것과 훌륭하지 않은 것으로 밖에 설명하지 못하고, 설사 자신은 그렇게 편협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도전해볼만한 가치라고 여긴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갑자기 딴 얘기-
욥은 세상에서 가장 믿음의 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어떤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인과응보, 보응의 원리, 이건 뭐 세상에서 가장 인간을 의지하게 만드는, 건전하고 건강한 삶의 원리이자 또한 하나님의 신실함, 변하지 않음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님다움'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우리는 삶에서 그 원리가 흔들릴 때 배신감을 느끼고 절망감을 느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그 원리를 또 다시 붙들 수 밖에 없다.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러지 않았다. 이 도덕적인 원리를 만든 분이 하나님이 아닌가. 나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봐야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세상의 일부가 되어 충실히 자기 역할을 할 때, 욥은 그 세상을 만든 하나님을 찾고 있다.
이건 뭐 완전 트루먼쇼의 한 장면 같다.
아무튼 논지가 조금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욥기 말씀을 오리지날로 들어보다면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잘 알터이다. 그럼 블로그에 이딴 이해 안되는 글은 왜 쓰냐고?
그건 내 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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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4
욥기를 읽으면서 어려운 점은 뭐가 맞는 말인지 모르는 것.
마지막에 하나님이 욥이 옳다고 하고 세 친구는 틀렸다고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읽어보면 친구들의 말도 다 맞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 근거로 세친구들이 주장을 하는가가 이슈다.
4:6~11
하나님 통치 아래에서의 도덕적 질서의 견고성
악한 자는 벌을 받고 착한 자는 복을 받는다. 이것은 마치, 8 절에 내가 보건데 악을 밭갈고 재난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라는 말과 일맥상통.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린다. 세상의 자연질서를 봐라 심는대로 거둔다. 그러니 착한 일을 하라. 악한 일을 하지 말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세 친구의 주장은 인과응보이다. 보응의 원리라고 줄일 수 있다. 심는대로 거두듯이, 열심히 한 만큼 거두듯이 도덕질서가 그렇게 견고한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로 세상에 서 있다. 그러니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듯이 선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이다.
10절보면,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면 사자는 사냥한 것없이 죽어지고 새끼들이 흩어진다. 약탈자는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늙어 죽어버리고 만다는 내용이다.
남의 것 뺏고 힘으로 약탈해 가는 것들은 당장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그것은 보상받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4:12~ 두 번째 단락. 다른 얘기가 나온다. 사람이 깊이 잠든 즉, 생각이 번거로울 때 두려움과 떨림이 나를 엄습하여 뼈들이 흔들렸다. 내몸에 털이 쭈뼛했다.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 못해도 알아보았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하나님보다 깨끗하겠냐,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니. ... 지혜가 없이 죽는다.
5:7까지 두 번째 단락이 이어진다. 앞에 있었던 견고한 하나님의 통치의 도덕질서라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경험과 관찰 속에 활용하는 것이다. 주변을 보니, 살아보니, 도덕질서라는 것이 가장 견고하더라, 라고 관찰하고 경험한데서 나오는 것이다.
4:12~5:7에서는 갑자기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 인간의 이해가 경험과 관찰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니까 계시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직접 알게 하시는 것이 있다. 어떤 이해와 믿음의 근거는 경험과 관찰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다. 이 얘기를 여기서 하는 것이다.
앞에 있었던 첫번째 이야기가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을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기준이라면, (선하게 살아야 한다. 악으로 살면 안된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지혜로운 자와 우매한 자로 나누고 있다.
욥기의 중요성을 확인해 보겠지만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다만 명분으로 붙들어 맬 수 없을만큼 깊고 넓다는 사실이다.
17절부터 있었던,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전능자의 진노를 업신여기지 말라. 내가 인생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견고한 도덕적 질서라는 것이 하나님의 중요한 통치 방법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두 직접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으로써 이보다 더 큰 질서는 없어보이니, 네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세로 돌아와라. 하나님이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벌을 주었겠느냐, 네가 지금이라도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할찌라도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한다. 돌아오라고 한다.
이렇게 욥을 몰아가지만, 스스로 이 두 번째 단락의 중요성이 욥기를 길게 만드는 것이다. 욥은 계속해서, 이들이 말하는 도덕적 질서 가지고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이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친구들은 너가 이 도덕적 질서를 벗어났고 이 도덕적 질서 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계속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아파보니까 제일 섭섭한게 뭐냐면, 정답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목사님 왜 이렇게 아프세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미웠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그래요. 그건 맞는 말인데 아무 도움이 안된다.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내가 아픈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해결이 되지 않아요. 그 답을 하는 사람은 그것 밖에 할 얘기가 없어요. 자기는 안 아프니까. 안 아프니까 말을 끝내려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데 듣는 사람은 그렇게 넘어갈 수 없다. 얼마나 아프세요? 고통스러우시겠어요. 이게 낫다.
욥의 싸움이 이 싸움이다. 욥기를 다시 한 번 그 맥락에서 보라. 세 친구가 하는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맞은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욥은 시작을 어떻게 하나. 보응의 원리를 벗어난 자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는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설정이 되어서 등장한다. 친구들은 와서 도덕질서로 답을 하려니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우기는 것이 잘못이다라고까지 꼬집어야 이야기가 된다.
하나님을 만나자. 이거다. 욥의 답은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중요한 답을 내린다. 친구들은 도덕 질서가 있다는 주장이고, 욥은 도덕 질서를 만든 이가 있다는 것이 주장이다.
솔로몬의 기도가 이런 거다. 내가 백성을 다스릴 수 없으니 지혜를 주세요. 솔로몬에게 지혜를 줬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이 나온다. 생모냐 가짜냐를 판단하는 것에서 나온다. 백성 앞에서 판단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옳은 길이다 틀린 길이라고 보여야 할 대표자로 왕직을 맡고 있는데, 그것은 누가 잘했다 못했다는 사법적이고 형법적인 뭐 그런 판단을 떠나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는 것이다. 반을 자르라고 하니 생모가 포기한다. 그것이 솔로몬이 받은 지혜다. 생명을 다스리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덕, 율법, 양심을 줬다. 그러나 그걸 가지고 사람을 잡는다.
양심과 도덕, 법을 가지고 사람을 잡는다.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사람을 살리는 건 그것보다 더 나가는 거다. 법을 준 하나님, 도덕을 준 하나님이 생명을 주어 생명을 보전하시고 질서를 주어 복주시기 위하여 그걸 줬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친구들은 놓치고 있는 거다. 도덕 안에, 율법 안에, 논리 안에 사람을 가두려 들고 욥은 이 고난으로 인하여 이것을 벗어나게 된다. 스스로 연구해서 벗어나는게 아니라 자신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전에 우리 한국교회가 전도에 열심을 낼 때는 모든 사람을 예수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할 줄 몰랐다. 믿은 사람이 할 일은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사명이요 존재의 이유가 됐었다. 그러나 살아보니까 전도가 인생일 수는 없다. 전도가 임무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것은 임무보다 더 큰 거다. 사람은 임무를 가질 수 있어도 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인간이 되면 그에게 인생이라는 것이 주어지고 세상에서 살고 현실에서 살게 되는데 그 속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들어 있다.
생각하게 하며, 헌신하게 하며, 고민하게 하며, 짐을 지게 하며, 당황하게 하며, 막막하게 하는 일들 말이다. 우리가 어떤 대의, 유익, 이라는 것으로 한 사람의 인생관이나 무슨 가치나 보람을 삼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삶을 다 싸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사람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했다고 말할 사람은 드물다. 아브라함 링컨을 보라.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지만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할 순 없다. 그는 많은 짐을 지고 살았고 링컨은 웃는 얼굴이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막막한 표정이잖나. 왜 훌륭했냐면 웃음을 희생했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된 거다. 그러면 다 웃음을 희생하고 살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다. 그런건 아브라함들만 하는 거다. 우린 할 수 없다. 인생이란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링컨은 말이야, 이렇게 갖다붙일 수 없다. 인생을 살면서 제일 답답한 이야기가 뭐냐면, 왜 훌륭하지 않냐고 화를 내는 사람이 가장 답답하다. 왜 훌륭하지 않냐고 하면서 싸우자고 하면 참 답답하다. 인생은 훌륭한데 자랑할 수 있는 거지 행복한 건 아니다.
행복은 굉장히 사소한데 있다. 행복은 문득 찾아오는, 언뜻 스쳐지나가는 풍경 같이, 섬광처럼 번쩍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행복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없다. 고난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통상적이다. 구름 사이로 언뜻 햇빛이 비치듯이 문득 섬광처럼 한 번씩 얼굴을 내밀고 사라지는 것이 행복이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 싸움을 하는 것이다. 욥은 자기가 당한 현실을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누구를 찾을 수 밖에 없는가. 하나님을 만나자는 거다. 도덕질서가 전부라고 이야기하면 자기는 설 자리가 없다. 3장에서 계속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것 봤잖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답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다.
그러다 이제, 하나님은 이 이상일 수 밖에 없다라는 대로 욥이 떠밀려 나갈 수 밖에 없는 거다. 자기 현실이 그러니까. 자기 현실이 도덕 질서를 벗어나 있으니까,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담아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안되는 것이다.
친구들은 자기 일이 아니니까 도덕질서 안에 묶어놓고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욥에게 친구들이 경건, 순종, 무죄, 정직의 사실에서 소망과 기력을 얻으라고 충고한다.
욥은 계속, 그것이 헛되다. 그것 가지고 답이 된다면 왜 울부짖겠는가가 욥기이다.
5:1~ 세번째 단락의 이야기로 오면서 욥을 이야기한다. 두번째는, 의인과 악인이라는 잣대 밖에 없던 판단으로부터 지혜와 우매, 라는 판단의 차원으로 갖고 온다. 인간이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겠느냐. 하나님보다 어찌 더 뛰어나며 하나님 위에 설 수 있단 말이냐,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 것이지 악하게 굴어서 답을 얻을 자가 누가 있느냐, 악한 자들을 보라. 그들은 영원히 살 것 같고 영원히 승리자인 것 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살 수 없다. 악한자들과 죄를 짓는 자들의 잘못된 모든 것들이 환경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죄가 나오지 않느냐. 그러니 너도 마음 속에 쓴 마음일랑 먹지마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다시 볼까? 5장 6절. 흙에서 재난이 오고, 티끌에서 악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악당은 그 속에서, 인간이 악과 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니라, 너도 그러지 마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대목이다. 중요한 욥기의 주제, 비상구가 열리는 셈이다.
인간에게 재난과 악이 일어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진 자유 때문이다.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고, 악인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자이다. 그러면 우리 금방 이해한다. 도덕적 질서 속에서 두 가지 구별법이다. 지혜와 우매자를 논하자면 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단 말이냐? 그러지 않다면 순종해라.
그러다보니 결국 재난을 초래하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 가진 선택권 때문이요 자유 때문이 아니냐? 라는 출구를 열어놓는 꼴이 된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되냐면 모든 인간의 경험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본인이 순종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달려있는 문제가 된다. 그 순종하고 순종하지 않는 일을 하나님이 견고한 도덕 질서를 주신 것 같이 꽉 붙들어 선택의 여지 없이 통치를 하시지 않고 열어 놓느냐. 라는 싸움이 되는 거다.
현실이 착하게 살면 복받고 악하게 살면 벌받는 보응의 원리라는 대 원칙 속에 있지만 살아보면 꼭 그렇지 않다. 착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악착같아야 한다. 악착 같아야 하는 건 착한게 아니다. 착하면 안돼 착한건 죄야 현실을 살려면 착하지 않아야 해.
왜 하나님이 이 현실을 열어놓으셨을까라는 이 욥의 질문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성경이 제시하는 의문. 이 의문에 자신을 비춰봐야 한다. 대부분 이렇게 살지 않는가?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이렇게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해놓고 완전히 항복해지지는 않는데 이 정도로만 해야지 안그럼 어떻게 해?라는 애매한 자리에 많은 성도들이 있다. 이걸 속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욥기가 성경에 있으니깐.
주인공은 욥이다. 욥기다. 세친구가 아니다. 욥은 견고한 도덕질서에 대해 불만을 품고, 그것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아우성 치고 있다. 아, 성경이 이런 일을 다루다니! 혹시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속 깊은 사람들을 칭하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 그냥 하나님께 난 맡기고 착하게 살다가 또 휩쓸렸다가 그러면 또 잘못된 것 같으면 기도하고... 이렇게 살기에는 이제 우리가 좀더 깊은 인간과 인생의 실존에 대하여 생각하고 답을 찾아야 될만큼 한국 기독교도 자랐다고 생각한다.
이 시작이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문이 되고, 포기했던 어떤 답을 찾는 문이 열리는 그런 내용이라고 느끼고 기도하자.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보니까 인생이 짧은데도 무시무시합니다.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희망, 꿈, 드라마, 배신, 좌절, 절망, 의심, 고통, 갈등, 막막함, 가슴이 저릿저릿한 그런 인생입니다. 그 모든 것을 붙들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대강 믿고 대강 미루고 대강 타협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럴 수도 있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따라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이 욥기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길을 찾아 하나님을 만나 하나미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깨달아 우리의 짧은 인생 속에 이루시는 주님의 신비와 기적을 맛보는, 누리는 진정한 인간의 책임있는 축복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