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8장
2013. 8. 7. 21:01욥8장
분을 내고 네가 경험한 걸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험담하지 마라.
8절. 너는 옛시대 사람들에게 물으며 배워라. 우리에게 전승된 경험과 지혜에 귀를 기울여라. 우리는 짧은 인생이다. 섣불리 우리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큰 소리를 칠 수 있으며 성급한 판단을 할 수 있겠느냐. 앞선 여러 세대에 걸쳐서 이어온 전통과 지혜를 담아두고 하나님의 의로우심, 성실하심에 항복하라.
시편96편
저자를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다 말년에 되돌아보고, 그렇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성실하시다라고 끄덕이는, 항복하는 모든 세대와 모든 사람의 합의에 의해서 시편에 올라와 있다. 이런걸 말하자면 전통이라 하는 거다. 세대와 모든 경우에 걸쳐 항복을 받아 공감된 고백.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하나님의 유산은 몇 백년, 우리가 가진 유산은 이렇게 긴, 여러 세대에 걸쳐서 확인된 것이니 너 하나의 경험을 가지고, 개인적인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쉽게 판단하거나 물려진 전통을 깨지마라. 여러 세대에 걸친 하나님에 대한 항복과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너에게 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니 겸손해라.
왕골과 갈대는 피었다지지만 진펄과 물, 흙은 오래 있는 것이니 이것처럼 무겁고 영원한 것을 다 평가하려고 하는구나.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기도 전에 마른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는 다 이와같고 무너진다. 그가 의자하는 것이 끊어진다. 굳게 붙잡아두어도 안된다. 큰 나라로 번성할 지라도. 내가 너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님은 선하시다, 복을 주실거라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지만 이 맥락에서 욥에게 이것이 답이 되지 않는다. 인과응보로는 답할 수 없는 조건이 설정되었다고 한다.
앞서와 같이 도덕률로도 답이 되지 않고 지금과 같은 전통과 지혜로 답이 되지 않는다. 전통이란 건 결국 사회적 구성이다. 사회 전체가 공감해야만 전통이란 것이 생긴다. 보복은 아무리 해도, 원수 사랑, 오른편 뺨 왼편 뺨 등의 핵심은 보복을 해도 보상이 되지 않으니 하지 마라.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는 것인데, 당시의 당사자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하나님이 하고 있다.
문제는, 한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전통, 그것이 어떤 시점에서 고정관념이 되는가. 정직한 것이 최고의 정책이다. 그럼 정직한 것이 최고의 정책이란 것이 고정된 교훈으로 전통이 되는 것은 어느 시점에서 고정되고, 고정되기 위한 시점을 위해서 개입하고 시험하기 위한 과정이고 어느때부터 고착되는 과정이 될 것인가.
시편 88편
모세에게 대들었다가 혼났던 고라 자손의 시.
고난과 억울함에 대한 호소와 간이 저리는 비명과 신음으로 끝나는 시다. 이것도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은 우리의 시편이다, 찬송시로써 시편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96편과는 얼마나 다른가. 이것이 찬송시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 내용을 보라 전혀 불신앙이지 않은가. 이런 일이 있다는 거다.
이때에도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축복 속에 두셨다는 것을 항복하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욥의 고백과 다르지 않다. 욥도 말했다. 죽게 놓아두십시오.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 셀라 ) (시편 88:10 RNKSV)
정답을 맞춘 자, 바른 길을 간 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그 얘기를 하면 아무래도 좋단 말인가? 로 금방 방종을 떠올린다. 그건 우리가 죄성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 하나님이 얼마나 부요하신가라고 이야기하면 금방 이게 온다. 분명해야 한다고 하면 각박하다고 반응한다. 이건 우리의 죄성이다. 하나님이 넓다고 하면 우리는 막막해하고, 하나님이 분명하다고 하면 우리는 갑갑하다고 한다. 우리의 죄성이다.
시편, 복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라 살아본 사람들의 결과적인 고백이다. 욥이 바로 빌닷의 도전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가 우리 결론을 알고 있다. 욥이 옳고 세친구가 틀렸더고 하니까, 세친구들이 발언한 어떤 황금율, 전통이 어떤 도전과 시험과 과정을 통해서 확정되었느냐에 대해서 성경은 많이 설명하고 있다.
구약의 큰 사건들, 천지창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다윗의 순종과 번영, 바벨론 포로... 지금 보면 익숙하지만 그 사건들이 일어난 때에는 분명 처음보는, 전통을 깨는 사건들이었다.
천지창조, 거대한 불연속, 없는 데서 있는게 나타나는 불연속.
애굽의 종살이. 사백년 동안 익숙해진 전통적인 종살이. 그러나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서 열 가지 재앙으로 꺼내는 놀라움.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세계가 깨진다. 그 전에는 바로왕이 세고 이스라엘이 약했는데 한 순간에 뒤집어 진다. 홍해, 구름기둥, 만나 등 모두 전통을 깨는 일
그렇게 축복받아 영원히 살 줄 알았는데 바벨론 유수가 일어나버린다. 그리고 십자가로까지 이어진다. 전통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리고 부활한다.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신다. 어디까지 우리가 가진 것이 고정관념인가. 하나님이 그걸 깨고 있는데. 깬다는 것은 조금 틀림 표현, 이 세 친구들이 증언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최고의 증언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히브리서가 시작한다.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에 난 사람들이 그렇다고 모두 신자가 되는 것은 또 아니다. 역사가 계속되어 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발견이 계속되어 진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세대가 거듭되면서 또 새로워지게 한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듯 말이다.
요한복음 15장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서 15:12-17 RNKSV)
친구라는 단어가 나온다. 세상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관계. 친구라는 관계는 더 우선하는 관계. 법으로 다스리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깝고 큰 관계. 친구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친구가 의롭다거나 가치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해서 다만 법칙, 틀, 규칙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틀은 더 고급한 관계를 통해서 적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법과 규칙과 도덕성과 역사, 전통보다 그것으로 그를 개념할 대상이 아니라 인격자이다. 만나 주신다. 설명을 해 주신다.
기도가 무엇인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밀접한 관계,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존재로 역사와 실존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겠다고 한다. 하나 물러나서 법과 호통과 힘으로 우리를 잡고 있지 않는다. 그것을 욥기가 여는 것이다. 구약 성경이 갖고 있었던 그 어떤 율법적 경직성이 전부가 아닌, 율법을 깨자는 게 아니라, 계명은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말이다. 그 법이 사랑의 표현, 사랑의 질서, 사랑의 규칙인 것 같이 그러나 그것이 사랑과 분리되어 혼자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성경으로 진정한 내용을 덧붙일 수 없으면 법은 무서운 것이 된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만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니 생각하라 더 싶이 생각하라. 기독교 신앙 간단하지 않다.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정도로만 사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더 무겁고 진지하고 깊고 신중하고 진심으로 채우는 열심과 각오를 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