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2
2013. 8. 2. 23:02알바의 여파가 딱 이틀 가는 구나...
이제 좀 몸이 말을 듣는 것 같다. 여기도 오후에는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다. 허나 습하지 않아서 땀이 마구 난다거나 하지 않네. 신기하다. 그래도 정오 땡볕을 받으며 벨리브를 타면 좀 그렇다. 이러커니 저러커니 해도 겨울보단 낫겠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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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다만 그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종기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으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
엘리바스, 소발,.. 세 친구
욥인지 알기 어렵게 되므로, 하늘을 향하며 티끌을 날리고,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고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욥을 놓고 신앙 내기가 벌어지고 있다. 사단의 거역함을 하나님께서 꾸짖자 사단이 자기의 입장을 변명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흠을 잡는다. 그 증거로 하나님은 사탄을 꾸짖기 위하여 욥을 증거로, 증인으로 사탄 앞에 세웠고, 사탄은 욥에게 준 하나님의 어떤 특혜들을 거두면 욥도 자기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항의 했고,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들이셨다.
욥은 까닭없이 고난을 받게 된다. 욥은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신앙을 지켰다.
두 번째 장면.
다시 하늘나라의 회의에 사탄이 참석.
거봐라 욥이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을 지키지 않았냐.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니, ...
본체를 치십시요. 옷을 찢어봤자 새 옷을 입으면 그만이니, 진정한 실력을 알 수 없다. 뼈와 살을 치셔야 한다. 그래? 좋다. 생명은 건드리지 못한다.
이렇게 욥의 고난이 시작된다. 억울하게 가족을 잃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이제 그 몸까지 어려움을 겪게 되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난지라.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살다가 어려움을 겪으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안 아픈데가 없다. 실감이 나는 고난을 성도들이 겪는다. 성도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사는 모든 인간들이 겪는다. 누구나 한 번 이상 이런 극심한 고통에 처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고통이 없는 분들은 없는게 고통이다.
우리가 말하는 표현 중에 '난 이해가 안돼'. 이건 무식하다는 표현이다. 우리가 그 말을 쓸때는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을 당해? 왜 일을 그렇게 했어? 사실은 이해가 안가는, 본인이 모르는 일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본인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자꾸 어려운 얘기 하지 말라고 아내가 그런다. 복받는 얘기 하랜다. 욥기가 복 받는 얘기라는 걸 할 참이었다. 사탄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깬다. 사탄이 하는 일은 그것이다. 사탄이 하는 일을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한다. 억하심정이란 말이 있다. 무조건 하나님 반대. 그가 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진심을 기울인 존재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이다. 창조 세계,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그의 유일한 삶의 보람, 삶의 이유이다. 그가 무엇을 갖고 왔든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라면 경계해야 한다.
나머지는 현실적인, 상황에 맞는 답을 만들어내고 반성도 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싸움은 이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떼어놓으려고 한다. 사탄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한데, 2장에서 사탄의 역할은 끝난다. 사탄이 떼어내는 싸움은 2장에서 끝이다. 그 이후로 하나님이 붙이시는 싸움을 시작한다. 그 이후로 나오는 불평, 억울함, 호소 등이 나오는데 이 모든게 다 하나님이 붙잡는 행위 이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생명을 주신 이가 생명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는 표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선언이다. 분리시키려는 사탄의 시험과 붙드는 하나님의 싸움 속에서 인간이 어느 쪽에 붙느냐가 달려 있는데, 사탄은 2장에서 끝내고, 하나님은 42장까지 이어가면서 기어코 인간을 자기 편으로 끌고 가고야 마는데, 이것 자체가 대단한 축복이다. 하나님이 그의 손에서 인간을 결단코 놓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제일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선언이다.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존재에 대하여 하나님은 영광과 승리와 우리 항복을 목적하고 있다. 그것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낀 욥의 문제인데, 욥에게 이런 고난과 고통이 생기는 이유는 특별한 가치, 고난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서도 볼 수 있다. 인간의 타락 현장이다. 이 부분을 보면 강조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 동산 나무의 뱀을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너희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 하셨다. 뱀이 왈, 너희가 죽지 않는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 여자가 그 열매를 먹고 남편에게 준지라. ...
하나님은 애초 선악과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들지 않았다. 인간의 선택권을 허락, 자유를 주셨다. 인간은 독립된 인격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고 독립된 인격성 속에 자유라는 선택권을 가진다. 인간은 독특한 존재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인데 본인이 무엇이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한 이야기는 너희가 저걸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못 먹게 했다는 논조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충분한 분, 충분하도록 선하신 분이 아니다. 뭔가를 너희에게 주지 않은, 뭔가를 유보해 주신, 뭔가 절반쯤만 허락한 분이라는, 금령을 인식시킨다.
이 선택권을 가짐과 동시에 다른 안전 장치가 없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동시에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권리는 권위 아래에 있다. 하지 말라는 명령 아래에 있는 권리이다. 이 권리를 가지고 권위를 깨자, 결과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보호막이 해제되자 자신이 연약하고 한계의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욥 1장. 8절부터.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이 어찌 까닭없이 경외하리이까? 그의 모든 소유를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닙니까?
울타리, 울타리 아래 두셨기 때문이다. 그 울타리를 거둬보십시요. 그래도 믿나.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권리를 깨자 벌거벗은 채로 강렬한 태양 앞에 서거나 또는 얼어죽을 추위 앞에 선 것 같이 벌거벗은 현실 앞에 서게 된다. 하나님이 이 권위를, 우리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제한하는데까지 쓰지 않으시고 그의 울타리로 보호하신 것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고 순종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욥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권위를 부수고 나오는 그 위험을, 모험을, 그 시험을 허락하셔야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 울타리는 사탄에 의해서 제거될 수 있는 그 보호 아래에서 행복해 하고 안심하는 것 정도로는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도 된다. 우리는 그 울타리를 사실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많이 기도하는, 나이 들면 하는 기도 있단다. 하나님 아버지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도 우리 가족들 속 안 썩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안 받고, 제발 이 1년이 후딱 지나가게 해 주세요.
우리가 요구하는 울타리이다. 좋은 일 보다는 괴로운 일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그렇게 안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제 각오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권리와 독특한 지위를 허락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길을 열어놓는 하나님의 창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다만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 정도가 아니요, 그 존재가 고유의 가치와 고유의 영광을 가지는 것인데, 인간에게 있어서 그 고유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우리에게 허락한, 하나님이 허락한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기꺼이 그 자유로운 선택으로 순종을 결정하여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기꺼이 자신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을 하나님이 영광으로 삼으시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의 선택과 자유가 무한하듯이 하나님은 그것을 항복시킬 더 큰 울타리 더 깊은 울타리 더 오래 걸리는 창조의 일들을 계속 하시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욥기이기도 하다.
요 5장 보자.
14그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15그 사람은 가서, 자기를 낫게 하여 주신 분이 예수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16그 일로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신다고 해서, 그를 박해하였다. 17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께서 아직도 일한다. 예수를 보낸 것은 아버지의 일의 연장이다. 주인공인 인간의 반역을 받아들이시고 그 타락을 허락하시고 그 타락을 회복하여 부활 생명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창조를 완성하는 일을 위하여 일하고 계신다. 예수를 보내시는 데서 보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고 지금도 일하시고 욥기 속에서 내내 하나님이 욥과 함께 일하신다. 그를 설득하신다. 그가 마음껏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고 억울해하고 분해하고 고함지르는 것 다 받으시고 여러 답변을 제시하는 속에서 그가 길을 찾게 인도하시고 함께 하여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입을 닫고 무릎을 꿇게 합니다.
우리는 욥기 내내 인과율의 응보를 보게 될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말미암는 인과 응보. 세친구가 내내 말한다. 니가 지금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공연히 너에게 재앙을 줬을 리가 없다. 생각해봐라. 부지불식 간이라도 잘못한게 있을 것이다.
욥기 1 장 시작에 무엇을 전제 했는가?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라도 지었을지 모르는 죄를 위해서 제사도 지내고 흠없이 했다. 그게 전제조건이다. 욥에게 이 벌을 받을 이유는 없다를 전제해놓고 들어가는 것이다. 욥에게 뭔가 있었을 것이다. 그 친구들의 모든 공격에 대해 욥이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욥에게 잘못이 없다면 왜 재난이 일어나는가. 불의, 불합리 하지 않으신가.
마지막에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보이신다. 이것은 대단한 인간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다. 창조 세계를 보여주는데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인간은 마치 중요한 손님 같이 초대되어 창조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구경을 하게 된다. 오늘 또 하나, 욥기의 결과에 나오는 중요한 결론은 이거다. 이 장관, 이 아름다움, 이 경의로움이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보상이냐 이거다.
하마가 나한테 뭘 해서 이 힘을 줬겠느냐, 아름다운 달과 별이 네가 무엇을 해서 나왔겠느냐. 아무것도 없는데서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너희가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럴 이유와 능력도 없는 데서 내가 주는 것이고 나의 의로움과 성실함으로 주려고 하는 것이 이 창조 세계에 얼마든지 증거가 넘쳐나느니라가 이 욥기의 답이다.
이 답으로 만족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아무 이유없이 받은 것, 우리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갈 때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편 103편
1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마음을 다하여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여라.
2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인간으로 하여금 기꺼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으로 순종을 약속하는 찬송과 항복을 바치는 것을 목적하는 게 시편에 넘쳐나는 것이다. 시편은 모두 노년에 지은 시들이다. 고난에 대한 시들은 다 그보다 나이 젊어서, 현실에 급박함에 떠밀려 지은 시들만 비명이요 고함이고, 찬송은 다 그것을 지나서 인생의 마무리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항복의 고백이다.
그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관이란 언제나 최상의 보상 아닌가. 최상의 보상인데, 인자와 긍휼로 말미암은 관, 우리가 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것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알아낸 정의는 인과율의 보응이다. 잘 하면 상받고 못하면 벌받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는 창조의 하나님이다.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어떤 사물이 존재케 하고, 아무 선택, 인격, 감각도 없는 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는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동의를 구하신다.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긴 과정을 돌아가신다. 우리의 불평과 저항과 방황과 분냄과 짐짓 거절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따라 오신다.
강요하지 않으시며 우리와 함께 당신을 항복시키기 위한 긴 길을 허락하신다. 그게 우리의 숙명이 아닐까. 긴 세월 동안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슬픔과 원망들은 사실 우리가 몰라서 하는 비명들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외면하거나 불공평하거나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욥기는 이제부터 얼마나 고생하나 보자가 아니라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시기 위해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시며 가슴 졸이며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옆에 있는데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몰라보고 무슨 짓을 하는지 두고 보는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복 주심과 높으심을 보고 그가 어디에서 걸리고 넘어지고 자폭하는 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가 이해가 부족하고 믿음이 없고 우리 생각으로 잣대를 삼았기 때문에 그 일이 생겼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받아내는 귀한 열매, 내가 주를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내가 눈으로 주를 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되는 것이다.
나는 듣기만 해도 좋다. 나는 볼 필요가 없다는 하나님이 참지 못하는 일이다. 나는 내가 너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려는 하나님인 줄 알지어다. 나는 그냥 이것으로 좋사오니 여기에 앉혀주옵소서는 못한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우리를 향한 사랑과 열정을 기억하고 욥기의 과정을 따라가고 우리의 인생을 성경을 통하여 반성해 보자. 귀하고 놀라운 내용이요 인생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큰 은혜와 기쁨이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