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20장 - 강해 16

2013. 9. 7. 20:44

욥기 20장 - 강해 16


소발은 즐거움과 결실이 없는 삶이 될 것이라고 동일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18장에서는 인과응보의 논리. 20장에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원칙, 인과응보에 근거한 논리를 펴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결국 너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라는 것으로 몰고 가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이미, 신명기 28장에 신명기적 원칙, 인과응보의 원칙과 시편 103편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는 진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두 원칙 사이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인과응보라는 법칙이 없으면 질서가 무너진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은 그 원칙을 세우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길, 진리, 생명은 법과 원칙이 아니고 인격이 만들어낸 성실함이다. 인격이 그것을 잡고 있다면 그 원칙은 유익을 위해서만 효력을 발하고, 손해를 위해서는 융통성을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유익을 위하여 원칙이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 늘, 죄악된 성품으로 인하여 면책과 핑계의 자리를 찾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대조시키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예정을 강조하면, 내 책임은 없다로 도망가고 내 책임이 있다고 하면, 내가 내 운명을 결정했다는 자랑으로 간다. 이 두 강조의 나쁜쪽의 적용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모두 어느 쪽에 쓰셨나.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우리가 책임있는 삶을 살아 훌륭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는데서 우리의 책임을 사용한다.


그 원칙, 혹은 그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하자가 있는게 아니라 우리의 죄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19장에 나오는 욥의 절규 같은 어떤 간증에 해당하는,


 25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죽으면 다시 돌아가는 티끌에 불과하는 존재를 마침내 그가 이러한 티끌을 위하여 서실 것이라는, 욥의 비명 같으면서 어떤 섬광같은 간증이요 서명을 19장에서 보았다.


그 19장을 빌닷과 소발이 인과응보라는 종교성의 보편적인 원칙으로 욥을 꽉 묶고 있다. 욥은 그 원칙 밖에 서 있다. 원해서가 아니요, 도를 깨우쳐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밀어냈다. 욥기 1장에서, 하나님이 사단에게, 넌 왜 그 모양이냐 욥을 봐라고 했을 때 사단이 이렇게 말한다.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에 섬김이 아닙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그 울타를 깸이다. 사단은 욥의 무너짐, 욥의 배신을 의도했지만, 인격자의 손에 주어진 법칙이라는 시편 103으로 끌고 나오고 있는 셈이다. 


요나 2장

요나는 니느웨 성을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명을 버리고 도망가려는 배에서 제비뽑아 걸려 바다에 던진 바 되어 물고기에 삼킨 상태에서 한 기도다. 이것은 외적인 고통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고통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미련함, 비겁함, 하나님의 크심을 못 알아본 무지함, 완악함, 해결할 수 없는 자기 실체를 본 것을 고백하고 있다.


4절에서 그가 돌이키고 있다. 

4내가 주님께 아뢰기를

‘주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어도,

내가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이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될 예정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써의 요나는 자신의 민족을 멸망시킬 앗수르를 회복시키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자신의 애국심이나 이기주의적인 이해관계와 동떨어져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하박국2장

하박국이 초라한 나라의 현실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더한 예언을 하신다. 아니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냐는 하박국 선지자의 반문에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대답을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회에 꼭 있어야 하는 윤리 도덕 법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법 속에 있기보다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원수랑 살게 되어 있다. 가족이다. 가족은 초법적인 관계다. 이것은 대차대조표가 없다. 끝없는 책임이며 기쁜 짐이다. 그걸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갈라서고 따질 것인가? 죽을 때까지 짐이며 유일한 기쁨이다. 어떤 날은 무자식이 상팔자고 어떤 날은 손주 없이 무슨 낙으로 사나라는 날들과 날들이 교차하는게 아니라 매순간 매초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하여 놀란다. 그 이상 기쁠 수 없고 그 이상 짐일 수 없는 그런 현실을 살면서도 결국 꺼내어 놓을 때에는 명분적이고 사실 맛없는, 매정한 법을 우리는 마치 가장 필요한 근거인 것 같이 내세운다. 


서두에 말한 것과 같이 그것이 인격의 손에 붙잡힌 법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 법을 만들고 적용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면 스스로도 불안하고 힘들 뿐만 아니라 그 법칙으로 나를 붙잡아 나를 편하게 하는데 밖에 쓰지 못한다. 친구들은 옳은 말을 하지만, 그것을 적당하게 쓰는데 밖에 나아가지 않는다. 욥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비정하게 구느냐.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율법을 받는 동안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자 모세가 진노하며 다시 산에 올라가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한다. 하나님이 이 민족을 버리고 모세로 말미암아 다시 새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말씀에 대하여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릴지언정 내 민족을 버릴 수 없다. 이 정도는 되야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자격이 있다.


또 한 사람 있다. 바울이다. 로마서에서 그는, 내 골육, 내 백성을 위하여는 내가 저주를 받아도 좋다. 내 동족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는 고백을 써놓았다. 이 마음을 갖지 않는 자는 성경을 볼 자격이 없다.


종합적으로 확인해 보자. 예수님이 선언하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아니고 죄인 부르러 왔다. 아무래도 좋다고 쓰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은혜를 강조하면 무책임해진다는 우리의 죄성이다. 책임을 강조하여 할 말없게 만드는 것은 무슨 잘못인가? 우리가 자랑하고 싶은 우리의 죄성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가 전혀 충돌이 없다.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움에 대하여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기꺼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 그것이 로마서 12장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

9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10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11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12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13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14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15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16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18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19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요셉이 팔려가서 고생을 하고 나서 뭐라고 답하는가?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고 알게 됐다. 형님들 걱정하지 말라 나를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 인생의 원수는 없다. 우리의 이해관계와 우리의 연약함이 만든 분노이지 원수 없댄다. 하나님이 모든 것으로 다 일하신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이 말씀 다시 생각해보라.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원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한 대로 갚고 그 원한을 상대방에게 풀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고 감수하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에 겁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욥은 아직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이한 인도하심 속에 더 큰 하나님, 더 깊은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 그 친구들은 모르고 있다.


친구들은 자꾸 욥을 정죄하고 훈계함으로써 어디에서 어디로 나가고 있는가를 더 분명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욥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더 큰 일하심을 배워나간다면 친구들이 욥을 붙들어 매어 자신을 안심하려는 경지를 넘어, 욥이 친구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고 기도해야 하는 하나님의 판정의 깊은 인도하심 속까지 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 평생에 과연 늘 함께 하셨고 모든 것을 복이 되도록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셨다는 것을 아시는 날이 올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우리의선언이 될 것이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