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14 - 욥기 18장
2013. 8. 24. 16:25요즘들어 블로그에 자꾸만 강해 말씀만 받아쓰기해서 올리니 아내가 재미없다고 뭐라한다. 그러고보니 이건 뭐, 내가 봐도 어르신들이 블로그 개설해서 꽃 사진만 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ㅋㅋ
그래도 어쩌겠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삶의 방향을 세울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삶의 방향을 세워도 나는 그리로 갈 수 없다.
그러니 말씀을 들으면 자꾸만 내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는 반대로 나아간다는 것을 발견할 따름이다.
그러면 좌절이 밀려온다.
그 시점에서 예수님의 주가가 막 올라가기 시작한다.
오호라, 나는 답 없는 사람이고나. 망한 주식이고나. 하지만 나는 내 주식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예수님 주식을 갖고 있지롱. ㅋㅋ
아, 난 이단이야..
욥기강해 14 - 욥 18장
빌닷의 두 번째 발언
빌닷의 주장: 악인의 결과는 비참하다, 심판 속에 그 보응을 받을 것이다.
1회전을 거쳐 이제 2회전 중이다. 엘리바스와 욥의 설전에 이어 빌닷이 등장했다. 자주 보는 성경이 아니라서 별로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는데, 내용에서의 진전이 없다. 같은 내용, 인과응보라는 같은 내용을 1회전에서는 자세하게 2회전에는 더 강하게 3회전에서는 더더 강하게 나오면서 내용은 더 간단해지고 더 강력해진다.
이 논리 안에서 해답이 되지 않으면 네 잘못이다로 간다. 설득을 해서 욥이 듣지 않자 더 강해지고 언성이 높아지는 과정 중에 있다. 말 안 듣는 사람은, 악인은,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않는 사람은, 망한다, 그의 처소도 흔적도 없어진다, 후손도 없다, 모든 사람이 보고 놀란다 등의 무시무시한 경고들로 반복되고 있다.
이 주장들이 우리는 현장 중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알고 보는 것 아닌가? 결론에서 하나님이 세 친구가 틀렸고 욥이 옳았다는 것이 나온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이것이 후손된, 뒤에 태어난 우리들의 복이다.
그렇다면 세 친구들이 무얼 잘못했는가. 욥의 대답 속에 무시무시한 이해를 했다. 이 세 친구의 주장을 한게 다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더 깊은, 더 큰 기대를 하는 논리를 막아서고 있다는데 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고백 - 예수님의 예언 -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간청 - 사단아 물러나라 라고 이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보았다. 세 친구의 말들 중에 틀린 것은 없다. 틀린 것은 없지만 한계와 영역, 차원에서 틀린 것이다. 우리가 알고 경험하고 분명한 것 속에 붙잡혀 있지 않은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길에까지 밀어넣으시는 하나님을 욥이 겪고 있다.
욥이 항상 세친구들의 발언에 대해 이와 같이 대답한다. "나도 안다." 내 상황은 보도 듣도 못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답을 주셔야 한다. 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옳다는 것에 대해서 놀라운 기독교적 이해를 해야 한다. 세 친구는 욥을 항복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권면에 정당성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앙 상의 어떤 질서와 분별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답이 다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늘 기독교 신앙과 세상적 윤리라는 것에 가장 큰 경계선이 옳고 그른 것에서 세상과 교회의 차이는 거의 없다.
어디에서 차이가 있냐면 옳게 만드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세상은 옳은 것을 알고 있지만 옳게 만드는 실력을 갖고 있지 않다. 기독교만 갖고 있다. 예수인 것이다. 내가 옳은 것을 제시하고 상대방을 판단하고 권면할 지라도 사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늘 명시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옳은 것으로 윤리나 도덕에 국한 되어서는 안 된다.
롬7장
14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15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17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19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20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21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22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24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2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이 오해하는 구절 중에 하나다. 내 안에 선과 악이 있는데 항상 선이 이긴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선악이 무엇인지 알지만 나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전기공학과를 나왔지만 형광등이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선악을 분별함과 지식과 도덕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안다는 것이 본인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옳을 뿐만 아니라 옳을 수 있는 힘을 주시는데 예수님의 임재로만 일어나는 특별한 특권인 것이다.
그게 이 얘기다. 내가 어느 것이 옳은 줄 아는데 그 옳은 것을 행하지 못한다. 악에게 붙들려 가는 것이다. 아는 것을 행할 능력이 없는데 왜 그러냐, 우리는 죄악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옳은 것을 모르기나 한다면 죄책감이라도 없을 텐데 우리는 또 그런 상태는 아닌 것이다.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 우리의 실체요 현실이란 것이다. 알지만 할 수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 할 수 없었던 것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우리가 규칙에 매여있는 자가 아니라 존재에 붙들려 있는 자가 기독교이다. 사람에게 충고를 하고 격려를 할 때 법칙을 동원하지 말고, 그 법칙이 성령의 손에 붙잡히도록 인격성을 놓치지 말자. 우리가 대표적으로, 성경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 사랑이 법칙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랑에 관한 성경의 정의와 설명을 보자.
사랑없이 이 세가지를 할 수 있고 이 세가지를 함으로써 사랑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천사의 말. 얼마나 진심을 가지고 희생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느냐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진심이라는 것은 자신이 예수 안에 있는 이란 말로 진심이 되는 것이다. 진심이란 이름 자체로 가치를 가지게 되면 기독교는 금방 정체성을 놓치게 된다. 예수 안에 있는 진심이란 것은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 결과를 보는 법칙, 결과를 만드는 어떤 기적이라는 것은 기독교 안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둘째, 산을 옮기는 능력이 있을 찌라도, 그것은 사랑을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능력이다. 능력. 2천년 교회사 안에서, 교회 안에 있는 두 가지 큰 장애가 있다. 교회가 안고 있는 큰 역사적인 큰 장애가 있는데, 하나는 콘스탄틴주의다. 콘스탄틴 황제로 인해서 기독교 가지게 된 권력, 승리주의다. 세상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서서 기독교를 항복하게 만들려는 생각이다. 공부를 더 잘해야 되고, 이겨야 되고, 그래서 큰 소리치는, 미국 기독교에 이게 강하게 있다. 미국은 극우파들, 교회의 극우파들은 미국이 제사장 국가라고 생각하고 전 세계를 하나님의 통치 안에 묶기 위하여 정치적인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늘 믿고 늘 대통령을 뽑을 때 교회 극우파들이 큰 목소리를 낸다. 가장 큰 목소리를 냈던 결과가 부시 대통령이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중세시대의 기독교를 보면, 오죽하면 중세 시대가 암흑기라고 했겠는가. 복음은 강요되는 순간, 힘을 잃는다. 누가 강요에 의해서 나와 앉아있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고 각 개인에게 찾아오지 않는 한 어떤 방법으로도 강요될 수 없는 고백이다.
또 하나는 계몽주의다. 설명하면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의해서 계몽주의가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사람은 아무리 잘 설명해도 항복하지 않는다. 이것이 계몽주의의 전성기를 지나 역사와 인류가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역사적인 과정에 의해서 현실을 본다면, 거의 낭패한 시기이다. 아무것도 믿을 게 없이 방황과 혼란의 시대다. 그러나 기독교는 지식이 발전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기독교는 변함없이 인격을 가진 종교이다.
셋째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것, 정렬, 헌신. 그것이 사랑을 대체할 수 없다. 기독교가 사랑,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함께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관계가 가지는 힘들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이게 왜 갑자기 욥기에서 나오냐. 우리가 친구에게 강요하고 충고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이 불편해서 이다. 가뜩이나 불안한데 옆에서 울면 문제는 해결할 수 없고 우는 사람의 입을 막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결론이 어디로 가는가.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고.. 이 모든 표현을 보라.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거 하나로 다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뼈대를 놓치고 피와 살로만 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뼈대에 살을 붙이고 피가 흘러야 한다. 그래서 욥기는 중요한 책이다.
신명기도 그렇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욥기처럼, 용서, 기다림, 피와 눈물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가?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혈육이 되고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서 살아보면 각각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과정과 방법이 다르다는 것 알지 않는가? 그게 성경의 가장 큰 요구로 맨 먼저 갖다대는게 사랑이다.
사랑은 서로 진심을 꺼내놓으면 아무 장애없이 흔쾌해지고 기뻐지는 그런게 아니다. 사랑이란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한 것을 믿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기독교 신앙의 힘인 것이다. 어떤 힘? 싸워봤자 소용없으니 그냥 가자가 아니라 결국 동일한 항복 지점에 이를 것이다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내가 성급히 정죄하거나 성급히 결론을 얻기 위하여 초조해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욥기 18장에서 이런 표현들이 여러 번, 오늘 빌닷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는 것 다시 확인해 보라.
5결국 악한 자의 빛은 꺼지게 마련이고, 그 불꽃도 빛을 잃고 마는 법이다. 6그의 집 안을 밝히던 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환하게 비추어 주던 등불도 꺼질 것이다.
14그는, 믿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서, 죽음의 세계를 통치하는 왕에게로 끌려갈 것이다. 15그의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집에 남아 있지 않으며, 그가 살던 곳에는
유황이 뿌려질 것이다.
17이 땅에서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어느 거리에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18사람들이 그를,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몰아넣어, 사람 사는 세계에서 쫓아낼 것이다.
너희 악인들, 친구들이 화내는 식으로 하면, 내 말을 안 들으려면 지구에서 떠나거라 이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이런 식의 반응에 대하여 성경이 아주 무서운 비유를 들이댄다. 달란트 비유다.
24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25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26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27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30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거다. 남겨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남겨야 한다는 것이 잣대가 아니다. 한 달란트 감춘자의 이야기는 이거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다. 내가 두려워서 감추어 놓았다.
조금 좋은 말로 바꾸어 볼까? 흠잡히지 않고, 욕먹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근데 성경은 이게 아니란 거다. 지금 빌닷의 요구는 이거다. 악한 자는 지구에서 떠나라. 욕 먹을 짓 하지 말고 오해받을 짓 하지 말고 실패하지 말고 늘 정당해서 누가 언제 뭐라고 하든지 떳떳한 사람되라. 근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말이다. 빌닷의 입장이 마태복음의 그 자와 같은 맥락이다.
있는 자는 더 받는 다는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예수 안에서 이해하란 거다. 걱정하지 말라. 우리 인생 속에서 어떻게 항상 칭찬받을 수 있나. 아는데 안되고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오죽하면 그런 노래까지 있나. 과거를 묻지 마세요. 오죽하면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나.
우리는 가장 깊게, 세상이 할 수 없는 데까지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상처, 우리의 자책,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 그러나 내 마음으로는 악을 섬기고 있노라. 그 갈등과 실패 속에서 감사가 터지는 것이다. 그 실패 속에서 아무 흠이 없고 아무 욕을 안 먹는 것으로 들어가면 실존이 될 수 없고 삶을 사는 자가 되지 않고 욕 안 먹기에 급급한 자가 되는 것이다. 욥이 끌려가는 답 없는 그 자리. 모든 설명과 이해와 경험을 갖다 대도 답이 없는 자리까지 들어가는 것을 누가 푸는가. 하나님이 푸신다. 그 전보다 배나 받는 축복으로 받는다고 했다. 걱정하지 말라.
기독교 신앙이다. 욥기가 가진 무시무시한 메세지다. 하나님은 굉장하시구나. 지난 주에 했다. 하나님은 예수를 감동과 설득을 위해 보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그 분을 죽이신다. 우리는 그 자리에 못 간다. 겁이 나서 멀찍히, 혹은 도망가는 제자와 같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목숨을 맡기는 자리까지 우리를 부르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무시무시한 자리까지. 거기까지 가는게 고통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 가능하면 안가고 해결하는게 가장 좋겠지만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라고 했듯이 우리는 가야 하는 거다. 복 받는게 무서운 거다. 그러나 시험을 받기 전의 욥과 시험을 받은 후의 욥은 경지가 다르다. 그의 딸들은 전국에서 최고의 미인이 됐단다. 괜찮은 복 아닌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경지이다. 그러니 순종하고 각오하고 기도하라. 여러분의 인생을 대강 대강 살 생각일랑 빨리 걷어치우고 사랑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과정을 통과하셔서 사랑의 기쁨을, 충만을, 영광을 함께 나누는 자리까지 오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