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13 - 욥16-17장

2013. 8. 22. 21:56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답변


욥은 읽기 힘들고 읽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10사람들도 나를 경멸하는구나.

욕하며, 뺨을 치는구나.

모두 한패가 되어

내게 달려드는구나.


예수님의 고난과 매우 흡사하다. 자신의 고난은 세상적인 것에 의한 고난이라면 답이 있었을 텐데 하나님이 나를 대적하고 있다. 나는 죽는게 낫다. 죽은 것과 똑같다. 둘 다 공통된 이야기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 해답이 없는 자리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받았기 때문에 답을 찾을 수 없고, 가장 가까운 사람도 편을 안 들기 때문에 변명 마저도 할 수 없는 자리에 있다. 핵심은 이거다. 이런 고통이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쉽고 가볍게 목적하지 않으셨다. 


신앙 생활 해보면 물론 쉬워 보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믿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자꾸 외면을 하고 싶고 쉬운 것으로 가리려고 한다. 기도를 더 하고 선행을 더 해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자꾸 외면하고 그 정도에서 다른 쉬운 답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기독교라는 신앙이 주어진 신앙의 공동체와 그 시대, 문화라는 것과 같이 가는, 기독교 신앙의 유산이 짧으면 깊은 경지에 갈 수 없다. 


깊어야만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것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만, 예전에는 배고픔을 면하는게 행복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배고픔을 극복해도 행복하지 않는다는 문제에 직면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태복음을 보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보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17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18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 좋다. 만족스러운 약속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21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천국 열쇠를 주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사랑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근거 위에 교회가 서고, 음부 위에 교회가 서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한 이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당신 스스로 죽는게 아니라 하찮은 피조물들의 손에 의해 창조주가 죽으시겠다는 거다. 베드로가 펄쩍 뛰었다. 그러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한다.


자 이제 이렇게 가보자. 하늘에 회의가 있는데 사탄이 왔다. "사탄아 넌 왜 그 모양이냐? 넌 왜 시비거리만 찾아다니냐. 욥을 봐라."

"아이고 하나님, 욥을 건드려보시죠."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자."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의 명예를 욥에게 걸었다. 


사탄을 물리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행동이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다. 인류를 위해 진 십자가가 인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모범이 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히5:1

1각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 임명받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의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2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그는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연약함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4누구든지 이 영예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5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7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말한다. 욥이 지금 걷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실지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 그 길. 죽음을 통과해야만 도달하는 그 승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야 한다는 말이 가지는 너무나 구체적인 증거 욥. 이렇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앞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을 가지기 위하여,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 아니다. 내것으로 만들어내는 고난을 통과해야만 얻어낼 수 있는 것. 노력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내용 자체의 어떤 완성을 위하여 고난을 필수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을 지니라. 의 길을 가기 위하여 "그리 마옵소서"라는 말에 대해 "사탄아 물러나라"고 말씀하셨다. 


그 고통된 영광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전제가 뒤따르다보니 욥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다. 필사적인 불평이 거룩한 행동이라는 것은 친구들도 몰랐고 욥 자신도 몰랐을것이다.


롬8장에 이 얘기가 고스란히 있다.


18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19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21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22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3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고난은 당연한 거라 한다. 이 현재의 고난을 통과해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의 자리에 갈 것이다. 그래서 23절과 같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하며 이 길을 간다. 답이 없는 이 길을 간다. 그래서 26절에 이렇게 나온다.

26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실력 없는 그대. 이 글을 보았다. 자기는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것 중에 이 구절이 가장 놀랍다고 했다. 


어느 종교가, 신이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가 있느냐. 가장 놀라운 구절로 뽑았다. 성령이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기도하고 있다.


욥도 자신이 뭘 하는지 알았겠나. 


26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8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기독교 신앙의 심비는 우리가 알고 해결하는 정도보다 훨씬 크다는 거다. 알 수 없는 거다. 성경은 단 이 약속 밖에 하는게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증거는 예수다.


우리는 시원한 인생을 살지 못한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훨씬 많은 것을 계획하고 있지만 우리는 알 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더 내마음대로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 목적한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간단한 것으로 우리가 만족하게 놔두지 않으신다.


욥이 싸우는 것이 이 지점이다. 영광의 길이다. 늙으면 안다. 늙어서 기운 빠져서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 희노애락, 생각, 의심, 불만, 이해, 소원, 후회, 이런 모든 것을 망라한 것보다 더 큰 데로 우리를 목적하고 계셨다는 것을 아는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게 한다.


겁날 것이 없게 된다.


누가복음 15장

탕자


12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러나 이 비유는 둘째가 돌아온 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첫째의 분노가 있다.


 25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26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27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29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32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잃었던 자식을 얻어서 기뻐한다 정도가 아니라 죽었다 살아난 아이와 죽어본 적이 없는 아들의 비교 대조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온 것 아닌가. 잃어버린 아들을 위하여 신이 와 대신 죽을 수 있는 귀한 존재. 아니 처음부터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어땠겠는가. 그러면 맏아들처럼 됐겠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면서 꼭 필요한 길이라고 선언한 것처럼 말이다.


일부러 죄 지으라는 말, 혹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 형통이라는 말을 심사숙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만족과 자랑을 위해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놓고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이 길을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고난은 억울한 것도 아니다. 그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고백,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요 길인 것이다. 그러니 엄살들 떨지 마시라.


쉽게 스스로를 속이지도 마시라. 예수를 믿고 사는데도 이상하게 힘든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영혼을 마취하거나 잠재우지 않는다. 쓱 업어서 날라다 주지도 않는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신다. 장렬함과 각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하나님의 목적과 그 방법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선언이다. 그 인생을 살 줄 아는 믿음이 모든 억울함과 비명과 불평을 넘어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이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신 것 같이" 라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고, 이에 대한 명예와 자랑으로 붙들어 매기 바란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