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spoiled by 아내

2014. 8. 2. 17:44

토요일 아침, 느지막히 잠이 깨 침대에서 댕굴댕굴 거리니 아내가 틀어놓은 손목사님의 욥기 설교가 귓가에 울린다. 욥기의 어려움은 특별한 어려움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고통의 단면을 보여준단다. 그것은 바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통제하지 못할 때 다가오는 고통. 내 식으로 말하자면, 집세를 낼 수 없는 환경으로 치달았을 때의 고통이 아닌가. 오호라 욥도 이런 고통을 당했구나. 집세는 낼 수 없는데 왜 낼 수 없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거,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거, 그 말인즉슨 세상을 내가 통제하려들기보다 세상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알아간다는거였구나. 말은 참으로 아름답구나, 하지만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고통스럽구나. 욥과 같은 고통이 뒤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할 수 없는게 인간의 한계구나. 그리고 그 고통 또한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허락하시지 않겠구나. 이건 뭐, 어렸을 때 태권도장에서 관장님이 다리찢기 하라고 위에서 팍팍 누르던 뭐 그런 맥락이구나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어제 자기 전에 아내에게 시킴 받은 책읽기의 내용이 떠오른다. 조르주 아말감인지, 아감벤인지가 말한 동시대인이라나. 동시대인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어색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 어색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려는 행동 뭐 그런거라던데, 암튼 이 사람 글을 잠깐 읽어보니 한 마디로 뼛 속까지 진보구나 싶다. 진보라 하니 매우 민감한 단어가 되버린 것 같은 이 한국 사회. 하지만 이 맥락에서의 키워드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 아니던가.


오호라 통재로다. 난 타인에 대한 공감 빼고 다 할 수 있는 인간이 또한 아니던가. 아내에게 시킴 받은 책읽기를 통해 다시 한 번 나란 인간을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도 희미해질 때 즈음, 아내가 유툽에서 불어로 된 힐송 노래를 틀어댄다. 오우 얘네들 볼 때마다 느끼는건데 비됴 만드는 실력이 쩐다. 음, 인물들이야 뭐, 머리 작고 키 큰 유럽 아해들 나오니 뭘 해도 멋진데 필름 색감이 요즘 딱 트렌드다. 얘네들도 동시대인이구나. 그런데 나랑 왜 신체 비율은 동시대인이 아닌건감. 어색함을 느낀다. 그럼 확실한 동시대인인거구나. 


이렇게 토요일 오전이 지나가고 있다. 오후엔 바르비종 마을에 갈거다. 내가 결정했다. 뻥이다. 아내가 가잰다. 아내는 언제나 할 일이 있다. 신기하다. 나에겐 주말의 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 시간을 그냥 허비함에 가까운 것인데 그에게 주말의 쉼이란 내가 보기엔 평일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내의 통제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상징으로다가 그가 싫어하는 쓰리빠와, 단촐한 외출에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배낭을 장착하고 나가야지, 이얏호.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