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001 / 말씀이신 그리스도 / 요 1:1-3 / 1984.03.07
2014. 8. 15. 07:24로마서를 시작하려고 했으나, 우리와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기로 한 친구들이 있어서 그 말씀에 맞춰 요한복음을 듣기 시작. 예수님이 말씀으로 오셨다는 부분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근데 왜 아이폰 티스토리 앱은 이런지 이해가 안된다. 블루투스 키보드를 쓰는데도 화면에 키보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구나. 어허허. 첫 출시니 어여 업데이트 해주심 감사.
요한복음은 성경의 어떤 책보다 어렵지 않나 한다. 하나님을 묘사하려고 했기 때문일 거다. 이것만큼 집요한 추적을 하고 있는 성경은 없을거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시선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그가 하신 일을 설명하지 않고 그 자체를 묘사하려고 한다.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예수님의 사건이 많지 않다. 어느 장이나 보면 사건은 잠깐 반짝 나온다음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하나의 빌미로 삼으셔서 설명하시고 말씀을 펼치시는 일들이 훨씬 많이 등장한다. 우리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첫번째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으로 시작해보자.
하나님에 관한 묘사는 참 많다. 전능하시다. 거룩하시다. 사랑이시다. 자비로우시다. 오래 참으신다. 여러가지 표현이 있으나 왜 하필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라고 하는가. 18절 말씀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났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할만큼 묘사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펼쳐보이고 있다는 뜻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묘사하고 계시다는 뜻이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쓰는 이유이다.
물론 내가 지금 예수님과 하나님을 혼용하고 있는 걸 기억하라. 잠깐 짚어갈 문제, 하나님이 몇 분 계시는가?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몇 분 만날것인가? 한 분 만난다고 생각하는 사람? 두 분? 세 분? 세 분을 만난다고 하면 이단의 탄생이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시나? 하늘 보좌에 계시나? 한 분이란 건 숫자 상으로 한 분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품과 능력과 존귀와 영광이 똑같은 한 분이라는 말이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똑같다는 말이 본체라는 말이다. 둘이 합쳐서 한 명이라는 말이 아니다. 빌립보서 2:9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다고 나온다. 하나님도 됐다 예수님도 됐다하는거 아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 혼자 독백하는건가? 아니다. 대상이 있다. 사도신경을 뭐라고 외우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우리가 상당히 오해하는 부분 중에 하나다. 성령님은 또 따로 계시다. 하나님을 대표적으로 부를 때는 성부 하나님을 부른다. 하나님이라는 뜻은 신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옛날에 공부를 헛해서 오늘 하고 싶은거 못하고 복습하다 끝날 판이다.
다시 요한복음.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우리는 천국에 가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그런데 그 속성이 다 똑같을 것이다. 세 분은 능력이나 영광에서 차이가 없으시다. 순서만 있을 뿐이다. 성부자령. 세 분이 일하시는 순서가 있다는 뜻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거다. 그 이름을 말씀이라고 별명을 부여받는 이유가 이제 펼쳐지는 내용인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감잡지 못하니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가르치시는 거다. 그 중 한 사건, 요한복음 14장. 예수 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빌립 이 예수 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 께서 대답하셨다. “ 빌립 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요한복음서 14:6-9 RNKSV)
말씀이란 단어가 갖는 1차적인 의미는 설명용이라는 거다. 벙어리 냉가슴, 꿀먹은 벙어리, 맛은 기가 막히게 좋은데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걸 벙어리 꿀 먹은 것 같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이라는 별명을 가지시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을 전달하고 알려주는데 최고의 방법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에게 모든 초점을 모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거다. 그의 행위, 사건, 말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빌립이 무식한 질문을 하고 있다. 보여달라.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 14:10-12 RNKSV)
예수님을 추적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잘 아는 방법이 없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는 장면을 보라. 지금은 용서의 시대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내 형제라고 하셨다. 천륜을 어기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더 기뻐하는가가 그대로 살아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이유다. 우리가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이 역시 복음서이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모두를 배불리기 위하여 하신 것이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좇는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고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죽음에서 주님이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 불쌍한 것을 죄 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를 분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예루살렘의 부패함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다. 한탄과 탄식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목숨 버려 우리를 사랑하신 일들을 보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사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가시며 잡히시는 날 밤, 잘린 귀를 붙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복음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그것이 말씀이 가리키는 무서운 내용이다.
요한복음 17장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요한복음서 17:15-18 RNKSV)
예수님을 보내어 하나님을 설명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보낸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낸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냅니다라는 말이다. 신자라는 것은 세상 속에서 유일한 말씀이다. 기독교에 대한 유일한 말씀, 내 판단, 내 행위, 모양이 그대로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르셨다. 예수님께서 그의 전 생애를 말씀으로 사셨다. 그는 걸어다니는 말씀이다. 그것이 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란 말이다. 그렇게 보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신자의 삶은 무서운거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밖에 나가 생활해보면, 내가 신자라는 말만 하면 옆에서 다 쳐다본다. 신자라는 말을 속박스럽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우리는 모두의 소원이 그거다. 안 보이는데 가는 것. 교회가 왜 자꾸 커지는지 아는가? 숨기 위해서 그러는거다. 불을 켜서 댓박 속에 집어넣서 닫아 놓은 것과 똑같다. 세상의 빛이 있을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신 것 같이 우리를 빛으로 부르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빛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목마른 자여 다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먹고 마시라. 우리가 그래야 하는 거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신자는 그걸 위해서 사는 거다. 우리가 물론 구세주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문이 되어야 한다. 일차적으로 통과할 수 있는 그 문이 되어야 한다.
아내와 나는 전화 받는 일을 많이 한다. 아침 먹다 전화를 받으면 점심 때까지 전화하는 경우도 있다. 할 수 없이 밤에는 전화를 끊고 수면제 먹고 자는 날도 많다. 그런데도 저희 같은 사람들한테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감수를 하는거다. 누군가가 나에게 전화를 걸 일이 없으면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우리 최고의 소원이 뭔가? 예수 잘 믿을테니 편하게 살게 해주세요. 이럴거면 왜 사나. 교회 왜 괜히 와서 일찍 끝내달라고 하는가, 차라리 집에 있지. 구역 예배 가서 말도 안되는 말을 들어주는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 기다리는 거다. 타인의 말을 듣는거다. 남이 뭐라고 하는 말을 다 듣는거다. 예수님이 그랬다.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문제 있는 사람이다. 쌩쌩한 사람들 오지 않는다. 소경, 앉은뱅이, 등등, 그런데 성한 사람은 누군가? 바리새인, 경찰.. 예수님 잡아가려고 온다.
우리 말에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신자한테는 틀린 말이다. 얼마나 병신들 속에 있는가가 신자를 말한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 속에 가서 끼기를 해야 한다. 거꾸로는 안 된다.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지 못한다. 있다는 것이 지식이나 돈을 말하는게 아니다. 신앙이다. 신앙이 성장하고 나면, 다른 사람의 무식한 말을 참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키우는 토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도대체 뭣 땜에 갖고 있는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신다. 물론 우리는 지치기 때문에 가끔 우리끼리 모여야 한다. 신자끼리 모여서 힘을 얻고 끼리끼리 모여서 힘을 얻고 흩어지는거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현장은 아니다. 영양 공급을 받는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는 거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훨씬 중요한 말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는 이렇게 보냄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로서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 앞에서 그것으로 존재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사람을 보니 하나님을 보내신 자요. 예수를 믿는자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이 사명인줄 알고 마음에 기억하고 목숨다하여 살아야 하는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