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34

2014. 1. 13. 07:48

욥기 마지막 강해를 들을 수 있어서 참 감사한 주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 영광의 길을 알고 좇아가는자가 되어야겠다. 한 해가 더해 갈수록 성도라는 감투를 쓰고 인생을 살아내기가 버겁다는 것을 느낀다. 왜 그러지? 성도의 삶은 자기개발이나 자기노력과는 전혀 다른 것인데. 웃긴 노릇이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어느샌가 현실에 코박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자신을 보기 십상이다. 여전히 팔다리에 힘 빡주고 내가 하려고 한다.


박 목사님 왈, 자폭과 타협을 조심하란다. 그게 우리의 대적이다. 일찌감치 성도의 삶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면, 그때부터는 완전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는 길 밖에 없는거다. 조심해야지. 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엔 여전히 지뢰가 남아있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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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욥기 마지막 시간이다. 끝이 잘 됐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거다. 잘 됐다. 의미심장하다. 갑절이나 복을 받았다고 다 얼버무리면 안되고 세 친구에게 노하신다. 너희는 욥에게 가서 용서를 하나님께 구하라. 욥이 중재자가 되어 하나님이 그들의 잘못을 욥의 중재에 의하여 용서하겠다고 나온다. 


세 친구가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재물을 다 드리고 용서를 받는다. 욥기 내내 그랬다. 엘리후는 안 나오고 세 친구만 나오는 것도 사실은 의미심장하고 만만치 않다. 엘리후로 오면서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 이야기를 했다. 닫힌 세계, 우리가 이해하고 확인하는 것, 제일 많이 쓰는 것, 인과율이라 했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 그 다음에는 합리성이 있다. 이 두가지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는 결론이다. 세 친구의 말이 그들의 말에서 틀린 것이 아니라 큰 틀을 그들의 이해로 닫아놓아서 틀렸다는 거다. 그들을 욥이 받아서, 욥이라는 더 큰 틀 안에 놓여있어야 된다고 욥으로 하여금 중재하라고 한다. 이게 결론이다. 욥에게 나타난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잘못한 것이 없는데 고난을 당한 것, 세 친구가 계속 뭐라고 한 근거. 고난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거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설정이 뭐라 했는가? 욥은 의인이다에서 출발을 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한다. 욥은 이해할 수 없다고 세 친구들은 니가 우기는 것만 봐도 잘못한거다가 됐다. 결론이 뭐라고 했나, 세 친구가 없어져야 하는게 아니라 세 친구가 욥의 이해 안에 있어야 한다. 그 셋이 주장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욥이 경험한 더 큰 것이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합리성과 인과율보다 더 큰 법칙이 있다.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를 위해서 표현하자면, 엿장수 마음대로와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인과율에, 그 합리성에 드러나는 거다. 도덕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으로의 부름.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들을 하나님의 마음대로라는 것이 질서가 없거나 혼란스럽거나 아무래도 좋은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지만 그것에 메인 것이 아니라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복주시려고 하는거다. 욥이 고난을 통과하여 복을 받았다가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존재케 한 창조 세계는 그것을 지은 분의 궁극적인 목적, 영광의 찬송이 되는대로 인도되고 있다고 결론이 되는거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옳은 의가 아니라 선일 거다. 선하다는 말은, 의인은 우리에게 자꾸만 그른 것을 생각나게 한다. 옳음을 이야기할 때는 옳음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보다 부정적인 것의 반대편에 섬으로써 자기를 자꾸 확인하게 하는 우리의 한계가 있다. 

선을 이야기할 때는 그래서, 선하지 않은 악한 것을 생각하여 선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조금 덜하다. 의인은 불의가 금방 반대 개념으로 떠오르지만 선을 이야기할 때 악을 떠올려서 선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라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이지, 긍정적인 목적을 이해하는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욥기가 제시하는 결말이다. 

우리가 율법주의나 합리주의를 가지게 되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분위기가 다분히 냉랭해지고 비정해지고, 실제적이기 보다 관념화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따지는 신앙이 되지 말고 누리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스펄전 같은 설교가는 내가 많이 가슴찔리는 이야기를 했는데, 설교자는 쾌활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의미있다. 나는 쾌활할까? 가슴이 많이 찔린다. 

욥기는 쾌활할까? 하나님의 결과가, 딸 셋 아들 일곱을 두는데, 아들들로는 복을 설명하기가 없나봐. 딸의 이름들은 모두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거다. 하나님의 복이란 건,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적인 수량 보다는 더 큰, 예술적인, 깊은 감사와 찬송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고 찬란한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폭풍 속에서 나타나신다. 폭풍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도 의미심장하고, 폭풍 속에서 나타나셔서 예쁜 딸을 주셨다. 이건 좀 안 맞다. 그러나 그게 아주 멋진 연속성이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라고 할 때 욥기 내내 우리는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는 느낌을 가진다. 고난을 당하는 욥을 놓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내기를 하는 하나님, 친구들과 욥의 논쟁을 지켜보는 하나님, 심사 위원 같고,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 그런, 제 삼자적 국외자의 모습으로 보여지는데, 폭풍 속에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그 과정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개입하고 계시다는 비유다. 하나님의 마음이 불타올랐다는 표현이다.

호세아 11장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해 내겠다는 내용

하나님 안에는 절망과 사망이 없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하시고 실천하시는 우리 아버지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역사와 개인 인생에 개입하시는가 이다. 하나님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뛰어들어 우리와 씨름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 이삭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기까지 요구하신다는 거다. 자식을 잡을만큼 들어오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일들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거다. 그런 희생을 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거다. 거기에 부활이 나타나고 나중에 예수 안에서 그게 뭔지가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잡았다. 그런데 잡은게 끝이 아니었다. 여호와 이레 이야기를 하면, 바치기로 순종하니까 살려줬다고 끝에 가서 이야기를 뒤집는데, 죽이고 살아난다. 죽이고 죽으라고 하는 거다. 죽이는 것도 어렵고 죽는 것도 어렵다. 얍복 나루를 가보자. 창28장에서 형을 피해 외삼촌에게 도망가는 야곱에게 나타나신다. 베델에서 만나시고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하신다. 

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을 붙들고 씨름하신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라 너는 이스라엘이라. 탕자가 돌아와 저를 아들로 대하지 마소서라고 할 때, 무슨 소리냐 너는 내 아들이다. 이게 이스라엘이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음이라. 아버지는 늘 아들보고 나보다 낫다고 한다. 아버지가 가만히 두고보다가 성공하니까 난 니 아버지다 라고 하지 않고 씨름씨름해서 아들을 만들어놓고 너 잘났다고 한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나왔잖은가. 요셉은 옥에 가두고, 하나님이 가뒀다고 한다. 그 쇠사슬이 몸을 묶었는데 직역을 했다. 쇠사슬이 그 혼을 뚫었다는 뜻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폭풍 속에서 나타나셨다는 말도 다 그런 것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필요한 시간 만큼 기다리시고 말씀하시고 놓아 지켜보신다. 하나님이,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놓아두시지 않으신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필요한 과정이었다. 뚜껑 여러번 열어서 음식 하듯이, 폭풍 속에서 욥에게 뛰어들어오시는 것이 결말인 것이다.

시편 136편. 감사의 시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비천한 가운데도 봐준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에도 봤다. 티끌과 재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만드신 하나님.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여, 이 낮은 자리에서가 아니라 어떤 낮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영광의 자리입니다. 이거 괜찮습니다. 이거다. 비천한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영광을 만드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적이 누군가? 내가 생가하는 대적은 이거다. 자폭과 타협. 하나님의 일하심과 능력과 깊이를 내가 포기하는 거다. 최고의 원수다. 자폭과 타협.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을 이루시는 지 몰라서 자폭하거나 타협해. 자폭의 한 형태가 계속 회개하는거다. 이상한 말을 했지? 계속 회개해서 안심하려고 하지 말라. 고난과 이해할 수 없는 게 끝나기를 바라지 말라. 어디까지 울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가는데까지 가야한다. 그가 폭풍 속에 있고 내 마음에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라고 말씀하는 걸 늘 매일 기억하라. 내 마음이 너를 인하여 내 속에서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그런 하루하루를 지나는 거다.

고린도전서 12장. 뜻 밖의 이야기 - 은사 이야기
12장과 14장의 은사 이야기다. 그 가운데는 사랑 장이다. 은사 이야기를 하다가 그 가운데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달콤한 이야기 중에 나오는게 사랑이 아니라 은사 중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은사는, 시기와 경쟁, 자랑을 경계하면서 은사 이야기를 한다. 은사는 너 자신의 우월함의 증거가 아니다. 그 얘기를 한다.

7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에게? 모두에게. 한 사람이 잘났으면 모두에게 유익이 가야 한다. 욥이 옳고 세 친구는 틀렸다고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욥의 옳음이 세친구를 부둥켜 안는 것으로 간다. 의는 관계래요. 관계. 우리가 신앙적으로 옳으면 더 많은 사람과 기뻐야 된다. 우리의 옳음이 다른 사람과 불화가 되면 그건 옳은 게 아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에서 누구든지를 기억해야 한다. 누구든지.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무시무시함이다. 하나님이 다 열어놓고 있다.

너 하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데 신앙은 쓰지 않는다. 그리고 유능할 필요도 없다. 유능하려면 유익이 되라는 거다. 끝에 가서, 29절. 29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30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유익해라. 더 많이 유익해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러니 사랑이 은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큰 은사를 가져서 유익해야 하듯이 사랑은 다 상대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랑은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다.

13장 8절.
8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욥이 지금, 세 친구를 중재하여 용서를 받아내려고 하고 있다. 인과율과 합리를 품어야 한다. 그것보다 더 크지만 그걸 품고 있다. 이것과 그것이 수평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더 큰 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열려있는 틀 속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일하심과 궁극적인 승리를 믿어야 한다. 굉장한 결론이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무엇인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다. 믿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의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해와 확인에서도 논리성으로 돌아와 구별한다. 틀리면 언제나 구별한다. 분리된다. 신앙으로 보면 묶어 감싸라는 거다.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로 부르셔야만 할 수 있는 거다 욥기의 결말은 그리로 간다. 

고난을 통해서 간다. 고난 당한 것을, 억울함을 보상해 주는 것이 결론이 아니라 고난으로만 이 자리에 간다는 거다. 욥이 뭘 경험했나 억울한 것을 경험했다. 세 친구는 뭐였나 그들은 분명한 걸 얘기 했다. 누가 더 큰 가 억울한 것을 경험한 것이 더 크다. 억울한 자가 분명한 자를 감싸라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억울함을 통과해서 가는 자리에 욥이 왔다고 결론을 내린다. 몇 배의 복을 받았나? 두배. 갑절이나 복을 받았다. 그게 성경의 모든 이야기다. 

히브리서 5장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고난으로 인해서, 대제사장이라는 칭함을 얻게 되었다.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가롯 유다도 회개 했으면 됐다. 베드로에게도 약속하셨다 돌이킨 후에 용서를 구하라. 이 고난의 자리를 통과함으로써 그들을 다 끌어안을 만큼 깊고 넓어지셨다. 실제로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었다. 

욥의 결론이다. 고난. 자기를 주어 감싸안는 기독교가, 그 주인되신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고 설득하고 일하시는 방식,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의 자리까지 요구하시고 부활시켜 받는 영광, 그게 기독교다. 여기까지 와야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아니면 세상은 늘 우리보고,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안심과 해결과 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속인다. 

세상은 답이 없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 우리가 이 나이 되도록 살면서 본 거다. 누구를 구별해서 떼어 미뤄가지고 얻을 수 있는 것 아무 것도 없다. 그게 기독교다. 그러니 울어야 하고 부둥켜 안아하는, 그런 감성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다. 무섭게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욥이 42장이나 끌어서 끌려온 자리까지, 우리의 현실, 하나님이 살게 하신 구체적인 현실에서 부딪혀 보라. 이걸 쾌활하게는 말 못하겠지? 그러나 우리가 이 답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고 우리가 예수 안에서 갖고 있다. 하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 무시무시한 약속이다. 기억하시고 승리하라. 뭐하지 말랬나? 자폭하고 타협하지 말라. 무슨 타협? 대강, 쉽게 해결을 보는 인생을 살지 말라.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도전 앞에, 폭풍 속에서 나타나시는 불붙는 사랑 안에 제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서 제대로 익으라. 제대로 영광스러워 지라. 아름답고 멋있고 찬란해 지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라.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