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 확장의 위험

2010. 3. 11. 23:59
어이쿠 맙소사 내 인생에 마케팅 관련 책을 읽게 될 줄이야.
사장님이 건네주신 책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한 챕터가 눈에 띄었다.

기업이 초기에 성공을 하다보면 근거 없는 자기 확신에 빠져 이것 저것 계열 확장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
집중력은 떨어지고, 성공률은 낮아지고, 기업 가치는 저하되는 악순환의 길로 들어가기 쉽다는 것.

이 내용도 어찌보면, 삼성과 같은 포털 대기업을 설명해 낼 수 없다는 모순이 생기지만.
개인의 역사를 반추해보건데, 대부분의 에너지 낭비는 쓸 데 없는 계열확장에서 나왔다는 것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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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날지 못한다

2010. 3. 11. 23:50
하루가 이렇게 빠르다보면 죽는 것도 정말 시간 문제겠다.
끊임없이 해야할 일에 치여사는게 아무렇지도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이런 저런 일에 기웃거리는 것에는 이제 그만 게을러지기를 바라며,
시간 안에 공백을 두어, 끊임없이 뭔가를 채우려는 불안에서 좀 놓여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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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의 역사

2010. 3. 8. 21:42
철학입문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셨드랬다.
사람이 어떤 주장을 하던지 그 안에는 반박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사람과의 논쟁은 끝이 없이 이어지거나, 아니면 아예 상대방의 주장에 대꾸를 하지 않거나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첫번째가 적극적으로 끊임없는 저항의 연속이라면, 두번째는 회피라고 할 수 있을까나.

나는 주로 회피를 선택한다.

힘든 일을 앞에두고 용을 써서 저항하기 보다 아예 힘든 일을 만나지 않도록 이리저리 피해다니는데 용을 쓴다. 덕분에 내 삶은 직업이 없어도, 혹은 알바를 하더라도 심적인 여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회사생활은 내 삶의 전반적인 면에서 변화를 요구한다. 조그만 일이라도 적당히 피해갈 수 없고 하나하나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

고작 한달 동안이었지만, 참 그랬던 것 같다. 몸이 힘들기보다 마음의 쉼이 없는 것이 더 힘들었다. 회피의 역사는 이제 그만 접고 적극적인 저항의 역사를 펼쳐가야겠지. 음메-

한달 만에 조퇴를 선언하고 집에 와서 쓰러지고 보니, 나의 한계는 내 의식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구나 싶다.뭐라 단정지을 수 없는 오늘의 상황은 일단 슬프지만,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뚤뭇 만세를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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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녕 그대의 원수란 말이오?

싼균의 참을성은 그 한계를 넘어서서 폭발할 때에야 비로소 나에게 다가온다. 정말 무서운 현실인 것이다.
왜 나는 미리 감지하지 못할까? 왜 나의 현실감각은 그리도 무딜까?
생각만 무성한 채, 현실에선 언제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나의 겉멋든 자세로 인해 오늘도 싼균은 속이 썩는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전에 그녀의 방부제부터 되어야 함-
핸드폰의 글자 '부동'을 '동'으로 바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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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꿈을 꿨다.
자주 연락하지 않는만큼 친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는 친구 한 녀석이 꿈에 나타났다.
전혀 안 그런 녀석이 같이 길을 가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담배를 꺼내 문다.

응? 뭐지?
나는 꿈에서 이 친구의 행동이 당황스러웠다.

담배가 나에게 공포심을 조성하는 단어가 된 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아이들이 하나, 둘, 담배를 손에 쥐었다. 이것은 금기의 벽을 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는 자기가 이끌어가겠다는, 자기 삶의 주인의식을 선포하는 발로였던 것이다. 물론 걔중의 찌질한 아이들은 열외로 하자.

그때만 해도 이런 것들이 내겐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남들 다하는 걸 안한다는 독특함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개인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담배는 나에게 있어서 진보의 아이콘이 되었다. 아욱한 담배연기는 뇌를 혹사시키는 자의 특권이자 휴게소가 되었으며 너와 나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 주었다.

꿈에서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했드랬다.
'아 저놈이 진보의 진영으로 갔단 말이지.. 그래 뭐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군.'

그런데 이번엔 그 친구가 주차장으로 가더니 차를 타는게 아닌가. 돈도 없는 녀석이 차를 몬다는 건 나에게 또다른 파격이다.

자동차, 젊은이들의 자유의 아이콘.
배가 불룩 나온 회사원이 스포츠카를 타는 건 분명, 중고등학교 때 찌질하게 옆 친구따라 담배를 배운 사람이다. 그러나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월급이란 말에는 코웃음을 치는 사람이 차를 탄다는 건(똥차스러울수록 더 멋있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에 반발하고, 녹색지구를 외치는 자에게 차를 가지고 있어도 그런 것쯤은 나도 진정성을 가지고 인식하고 있다는 과감한 표현이 완성되는 것이다.

꿈에서 깬 그 날 아침의 기분 참 오묘했다.
이 시대에 자신이 의식의 진보자임을 자처하는 세대(대략 386?)들에게 진보라는 것은 무조건 장착해야 하는 기본장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좀 아리송하다. 나는 여전히 지켜야 할 것이 많고, 연대보다는 경쟁이 더 발전적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그네들의 연대의식은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지만 실제로 뼛속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몇이나 봤나 하는 생각이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마치 옛날에는 빨갱이가 시대의 죄인이었던 것 마냥, 나 자신이 진보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시대의 재판을 피해갈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담배는 싫고, 경제력없이 차를 모는 것은 내게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쯤쓰고 나서 제목을 보니 내가 여기서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내가 차분히 사람들을 관찰해보건대, 다분히 진보적인 사람도 매우 보수적인 행동을 하고 있더라, 그리고 보수적인 정치인도 누구보다 진보적인 행보를 걷는 사람이 있더라(우리나라에서는 못 봤다.)사실 사람을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흑백논리를 가지고 온 이분법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그 친구를 만나러 간다. 정말 오랜만이다. 담배를 피우면서 차를 타고 오더라도 사랑하자. (사실 개뻥이다. 진짜 그렇게 나오면 나는 모른척 하고 집에 가야겠다.)
Posted by 뚤뭇 :

열등감

2010. 2. 15. 16:01
열등감이란 스스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다. 주로 타인에게 주눅드는 일이 많기 때문에 자신의 실제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그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기 십상이다.

예전에는 내게 있는 열등감을 대하기가 참 어려웠다. 특히 사람들을 만나서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교나 교회에서의 삶 나눔을 할 때, 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은 매번 나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안전거리를 유지하기에 바빴다.

물론 이러한 열등감은 극복해야 하고, 원만하게 다듬어가야 할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열등감이란 건 무조건 몹쓸 물건일까? 버려야 할?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알고보면 자신만의 전문분야가 있는 경우가 많다. 잘 알고 있듯, 자신의 존재감을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애에 대한 욕구를 외적으로 발산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바로 열등감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조금은 오덕후스럽고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사람들의 역할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항상 사람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인기가 있으며, 어쩌면, 사람 사이의 관계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하는 분들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에너지가 하는 일-집착스럽고, 세심하고, 소심하고, 꼼꼼하고, 고리타분하지만 완성도를 위해서는 그것 밖에 방법이 없는 일들-을 하기는 힘든 것이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다. 영업보다는 편집인 것이다! 이 말을 하고자 이렇게 대단한 말을 꺼냈드랬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긴 내 블로그인데. 메롱.

내게는 편집을 해야 할 이유 100가지와 영업을 하지말아야 할 이유 100가지가 있는데, 현실은 영업인 것이다.
어흥- 열등감만을 무기로 가지고 세상을 헤쳐나가기도 빠듯한데 그것조차 통하지 않는 세상을 살라고 하신다.

이건 '아잉 출근하기 시러 2탄' 정도가 되겠다.
Posted by 뚤뭇 :
시선이 극히 미시적이게 되면 자신이 보고 있는 것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마련이므로 쓸데없는 고집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한편, 여러가지의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여 삶의 여백이 만들어내는 폭넓은 시선을 유지하여 삶의 외적인 면으로 인해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함이 좋은데, 결국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 그리고 요동치는 세상에 자신을 잠잠히 두는 일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에 마음을 둠으로써 가능하다.

따라서,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뜻하지 않게 꽃을 피우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해서, 오로지 뿌리를 내리는 일이 아니면 안된다는 근시안적인 시각을 고집하기보다는 현재 나의 위치,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그리 크게 어긋나는 일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취직준비를 하면서 줄곧 가졌던 생각, 즉, 어떤 상사를 만나든 그 사람을 사랑하고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아잉 출근하기 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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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착각, 착각.

2009. 11. 26. 01:12
나는 엠과 대화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엠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만 엠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은 2005년에도 있었네. 지리산 밑에서 나는 그네들에게 똥싼 얘기를 했다. 나의 소중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만 그네들은, 물론,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으히히.

하고 싶었던 출판학교를 신청하면서 조금은 허탈한 마음도 있었다. 88만원. 한 달 월급.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하고 싶었다. 내가 먼저 중언부언하기 전에, 엄마는 흔쾌히 돈을 줬다. ... 도시락을 먹고 싶었지만 결국 돈이 없어서 도시락을 쌌고, 자전거를 타고 싶었지만 결국 버스비가 없어서 자전거를 탔고, 자전거 알바가 좋았지만, 결국 돈이 없어서 자전거 알바를 했다. 도시락은, 자전거는, 자전거 알바는, 맛있고, 멋있고, 잼있지만, 그것들은 내게서 최선의 대접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서운해할 것이다. 그러고보니 오늘, 15년 금융결제원 경력의 형님이 당구를 치면서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당구를 잘 치고 싶으면 당구장에 돈을 많이 내." 그래, 당구비 이상으로 당구를 잘 치려는 생각은 조금 위험하다. 돈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그밖에,
바울반, 자신의 존재를 걸고 대화하는 사람을 조심할 것. 그 속에서 들리는 황당한 말, 내 편은 누구인가.
차 선생님, '분배, 양심, 평등, 자유'를 추구하는 그의 바탕과 사상과 삶을 '욕구'하는 나.
출판분야에 대한 고민, 내가 욕망하는 나와, 생겨먹은 그대로의 나 사이의 갈등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착각, 착각,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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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끝

2009. 9. 14. 00:27

오늘에 머리 위로 쌓였던 오만상 불평불만을
그와의 수다로 툭툭 털어버리고 나면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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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반 4천원, 뚝불 5천원

2009. 8. 19. 01:28
알바 두 달 째.

일을 시작했던 지난 달에는, 주로 조용하고 수더분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에게 일을 가르쳐주는 정직원 한 명은 사장의 대의를 거스르데 민감한 성격인지, 점심 때가 되면 우리에게 두 가지 메세지를 동시에 줬다.
- 먹고 싶은거 시켜도 되는데, 백반이 나을 거에요.

우리는 조용하고 수더분한 사람들이었기에, 그저 무심하게 백반을 먹었다. 그래서 백반은 한 때 닥백-닭고기 백숙이 아니라, 닥치고 백반-이라는 깜찍한 애칭까지 얻었드랬다.

그런데, 이 달로 접어들면서 몇몇 헌 사람들이 나가고 새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먹는 낙을 아는 동시에, 사장의 대의보다는 자신의 만족을 우선시 할 줄 아는, 대인배들이었다.
- 먹고 싶은거 시켜도 돼.. 근데, 백반이 나을 거에요.

그들은 뒤엣말을 못 들었나보다.
- 난 뚝불!~
- 저는 제육덮밥이요!~
내가 먹어보지 못한 메뉴, 하지만 이들은 백반이 먹어보지 못할 메뉴.
어느 틈엔가 함께 백반을 먹으며 전우애를 불사르던 헌 사람들도 금방 물타기를 했지만 나는 새로운 대세에 대한 뭔가 모를 불편함을 느낀 터라, 이미 익숙해진 한 가지 메뉴 밖에 말할 줄 몰랐다.

맛없고맘편한백반 VS 맛있고불안한뚝불


왜 그네들은 이제와서 백반을 배신했을까?
그건 진정한 전우애가 아니었단 말인가?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면, 우리가 먹었던 반찬이 얼마나 잘못된 조리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맛이 없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대며 우리의 수고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회사의 대의에 살신성인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모두 무의미해졌다.. 고 나는 한탄했다.
그런데, 이런 나 자신을 보니 뭔가 켕긴다.

맘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백반말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뚝불을 선택할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
뭐지?
더 웃긴 것은, 이젠 백반을 먹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오늘 먹은 비빔밥은 양이 훨씬 많아서 급하게 먹어야 했는지, 나는 오후 내내 방귀와 트림을 달았드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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