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장 초입. 유대인
2013. 7. 4. 17:0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다른 것과 틀린 것은 다른 문제이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우리의 속성. 다른 것을 왜 틀렸다고 하는가?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잘났다는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늘 죄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잘나길 바란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품적으로 받아들이기 싫어한다. 죄란 처음부터 아담의 죄의 형태로 나타난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동등되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먹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우리는 계속 태어난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회개해서 천국에 가 있는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시점에서 우리는 시작한다.
인간은 이지적으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적의를 드러냈을 때 가장 긴장되는 근육은 목이다. "목이 곧은 백성이요." 인간이 하나님께 반발하는 것은 이성적이 아니라 감정적인 반응이다. 경향은 인간의 기호,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적대심, 증오감을 가지고 있다. 대인관계, 자기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하는 최고의 노력은 자기 확인이다. 아첨에 귀가 커지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죄의 뿌리이다. 누구나 갖고 있고 누구나 약한 모습이다.
우리는 그 단맛을 외면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단맛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극복하지 않으면 점점 나의 마음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자,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이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짜요, 틀린 것이라 해서 죽은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유대인 편에서 보면, 자기는 선민이요 율법을 지켰는데 틀렸다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정말인가를 확인하는 족속이 아니다. 인류라는 족속은 나를 누군가가 누르고 바보를 만들게 되면 그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자기를 지키는 자들이다.
세리와 같이 올라간 바리새인이 기도를 한다. 하나님 저를 저 세리와 같이 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토색, 나쁜짓 하지 않고 십일조를 내고 매일 기도해요. 그러자 하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이요." 유대인의 이러한 행동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맞는 말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파괴당한다.
신탄진 읍에서 일어난 독살사건.
어떤 사람이 원한을 품고 어느 집에 모여서 그 동네의 친목회를 하고 회의를 하는데 막거리를 나눠 마시는데 청산가리를 넣어서 세 사람이 죽었다. 서울에서 수사진이 급파되어서 어떻게 된 것인가 수사를 했다. 시골이라는 것은 방범대원이 돌지 않아도 질서가 유지되는 곳이다. 아직까지 시골은 전통적인 균형들이 유지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한테 그럴 수 없고 그 집은 우리 집과 그럴 사이가 아니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전통적인 유대관계 때문에 물러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전통적인 관계가 홀딱 뒤집어 졌다. 왜냐하면 수사진들이 시골에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이간질하게 시켰기 때문이다.
청산가리 누구한테 팔았느냐고 물어보자 아무도 말을 안했다. 그럼 꿩을 잡는 사람을 봤는가, 꿩 같이 생긴 사람을 봤는가, 닭같이 생긴 꿩을 봤는가, 아무리 수사를 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무조건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유도심문을 했다. 누가 그러는데 당신, 그 사람과 시비가 있었다면서? 라는 식으로 유도 심문을 한다. 시비를 걸고 이간질을 해서 사람들이 서로 헐뜯게 했다. 결과적으로 범인을 잡았다. 그러나 이제 그 시골의 관계가 모두 깨졌다.
우리의 인간관계는 어떤가? 누가 우리를 찔렀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이 나오는가? 내 약점에 대해서 누가 손가락질을 하는가? 자기 방어 기제만큼 쎈 것은 없다. 우리가 신자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자기 방어를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쪼다가 아닌가? 쪼다라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우월감, 자기 방어, 이 부분이 우리에게 없어야 한다. 이거 없어지는데 얼마나 걸리는가? 예수님이 죽을 때 보통 없어진다고 한다. 그것을 끊임없이 노력하면 안 한 것보다 한 게 낫고, 그 열매를 보게 된다. 그 열매를 보는 자는 그 맛을 알기 때문에 기쁨으로 자기를 죽이는 자를 더욱 노력하게 된다. 오늘날 교회가 갖는 가장 큰 아픔은 교인끼리 별로 친하지 않다는 사실 아닌가. 거기도 우월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뉘우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순서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있었던 것 같이 어떤 사람을 통해서 누가 나중에 부름을 받을 수 있다. 처음된 자가 나중된 자 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흘려 값주고 산 우리는 모두가 귀한 존재들이다.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마음을 합치자, 사랑하자."라는 슬로건으로 이 담을 헐지 못한다. 합치자, 사랑하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로 전혀 합칠 수 없다. 이 기준으로 사람을 재게 된다. 나는 누구나 포용할 수 있는 큰 사람이다라는 말 밖에 할 줄 모르게 된다. 인간의 이해력을 넓히는 것도 아니고 포용력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큰 사람이 되기 때문에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죄에 대하여 죽기 때문에 합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 곳, 극장. 동일한 이익이 겹치는 곳. 그리고 무덤. 사자는 말이 없다. 교회와 교회끼리, 성도와 성도끼리 싸우는 곳이 있다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가 죽으면 그 싸움은 없어진다. 합치자는 말, 사랑을 하자는 말, 무의미하다. 죽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죽을 존재다. 우리는 크신 은혜로 살아야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 그 중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 믿는 자에게 절망도 교만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신자의 자기 확인법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열심에 감동하고 그것이 자랑이고 그것이 오늘의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신자된 자들의 모습이다.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