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은, 희락과 기쁨, 감사라고 말한다.

3절부터 빌립보서의 본문의 시작. 헬라어에는 하나의 동사만 들어있다. 감사하노라. 나는 감사하노라. 죽음의 지경에 처한 바울이 감옥에서 처음 한 말이 감사다. 감옥 속에서 감사와 기쁨이 뭔지 아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요소. 마음 속에 감사와 희락과 기쁨이 주중에 있었는가? 성도들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일방적인 기쁨이 아닌, 성도가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는 참된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를 3가지로 보여준다.

사도를 감옥 속에서 기쁘게 만든 기도제목

1. 빌립보 성도들로 인해 감사 - 동역
빌립보 성도들로 인한 기쁨, 왜냐하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빌립보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
참여: 코이노니아, 동역, 교제 즉, 그의 사역에 동역하는 기쁨 때문에 기뻐하고 있음. 신앙의 기쁨은 동역 할 때 온다.
- 너희 무리를 위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은혜에 “참여”도 코이노니아.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거짓된 교리로부터 변호하고 보호하는 것.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에 빌립보 성도들이 동참했다는 것이다. 나의 매임에 너희가 함께 참여함.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에바브로디도 편에 헌금을 보냄.
- 우리는 다른 지체와 동역할 때만 성경적인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다. 이 사회는 어느 시대보다 부유하지만 기쁨과 감사가 있는가. 혼자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
- 동역은 성도가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큰 기쁨 중의 하나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처럼 보여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지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서 절대로 완전할 수 없도록 사람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완전해 지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나의 약함을 다 보완해서 내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의 감당할 수 없는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교회 안에서 누려져야 한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 나의 부족함을 자꾸만 물질이나 다른 것들로 채워서 완전해지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건 아닌가?
- 어느 한 사람 만큼은 용서할 수 없고 잘 해줄 수 없는 사람 있다. 다 마음이 통하고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과만 같이 가는 동역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그를 절대로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동역을 한다면 세상적인 모임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들을 품어내는 노력이 포함된 것이 동역이다.
- 우리는 모두 공사 중이다. 주님을 만나면서 얻은 급속한 변화 뒤에 성화의 과정이 뒤따른다.

2. 하나님께 감사
사람과 동역 하면서 실망할 때 냉소에 빠지지 않는 기쁨과 감사의 근원은 하나님. 사람들과 동역하는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끝까지 실패함이 없이 데려갈 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6절). 사람 때문에 냉소에 빠지지 않는다.
>> 사람들에게 실망할 것을 두려워 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킨 사람을 끝까지 데려갈 줄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더 순전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재미있는 존재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믿는다. 사람을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는 근원이다.

3. 바울이 그들을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의 작은 수고와 섬김이 크고 귀하게 온 것이다.
그들이 잘하고 예쁜 짓 해서 기뻐진 방식이 아니다. 그들을 향하여 먼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우리의 삶에 거듭되는 기쁨과 감격을 만들어 낸다. 예수가 나를 먼저 사랑하신 것 처럼.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7절)”, “내가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8절)” 빌립보 성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바울이 품고 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남을 먼저 사랑할 수 있다.

나눔
아내와 이레를 사랑하자. 나도 결혼하고 나니 아내에 대한 생각이 점점 달라진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항상 곁에 있으니까 당연히 내 편은 맞는데! 그만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내에게 툭툭 하기가 십상이다. 가정에서 아내를 적극적으로 사랑해야겠다. 이레를 낳고 나서 손잡고 자는 일도 드문데 말이다. 이러면 안된다.

어제 밤 이레가 잠들기 전에 한참 찡찡 거리는 걸 보고도 얘는 이제 수면 교육을 시작해야지 라고 하면서 안아 주지 않았다. 계속 울고 있는 이레를 보면서, 나는 이 아이의 수면 교육을 위해 이 울음 소리를 계속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무거워서! 안아 주지 않는 건지 경계가 모호해지더라. 이레가 태어난지 50일이 지났으니 이제 수면 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건 맞다. 그 말인즉슨 아이가 스스로 밤이라는 환경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워 나가야 하는 동시에 이 일은 이레 스스로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레가 직접 경험하고 터득해야 할 것을 가로막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 이게 혹시 나의 편리함이나 혹은 이레 너도 앞으로 살아갈 환경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아야 돼! 라는 공격적인 마음이 들어있지나 않은지 항상 조심해야겠다. 아빠라고 해서 앞으로 딸이 하는 모든 행동이 마냥 좋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이레를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이레를 대하는 겉으로의 방식은 같아 보여도 결국 나 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것 같다.

교회의 기초가 가정이다. 가정 안에서도 우리는 타인이자 서로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주님 안에서 동역을 경험하고 배워 나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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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설교
배경
빌립보서: 대부분의 신약 서신들은 교회가 가진 문제를 다루는데, 빌립보서는 문제를 다루어내기 보다 교회를 향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서신이다.

빌립보 지명: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도성을 점령하면서 시작. 빌립 2세가 도성을 점령한 다음에 자기의 성전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가 된다.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예수 오시기 40년 전에 아우구스투스가 이 지역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왕권을 다투던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게 되자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점령지를 영토로 인정하면서 많은 특권을 주게 된다.
투표권, 자체원로원, 로마 법 체계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공용어였던 라틴어. 면세 혜택. 로마 군대 주둔해 도시를 보호했던 지역
그래서 이 지역 시민들은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특심한 동시에 자부심도 대단했다.

바울이 유럽의 마게도냐로 가서 방문한 첫 번째 지역이 이 빌립보 도시이다. 이 장면은 사도행전에 잘 나와있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보니 회당도 하나 없었다. 유대교를 믿는 여자들 중 복음을 영접한 성공한 사업가 루디아가 복음을 듣는다.
점을 잘 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을 보고 계속 말을 건다. "지극히 높은 자의 종이 하나님의 말을 전한다."

귀신 들린 여자의 종이 소리를 쳐서 하나님의 종이니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계속 소리치니 바울이 귀신을 물리친다. 귀신을 물리치니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주인이 바울을 감옥에 가둔다.

감옥에서 만난 간수 이야기는 아름다운 회심 이야기 중 하나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 일어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빌립보서는 그 곳의 교회가 세워진 지 10년 남짓 된 시점에서 쓰여진 서신이다. 그 때까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역을 잘 도왔다.

바울은 감옥에서 죽을지 살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쓴 네 개의 옥중 서신 중 하나다. 남서울 교회는 교육 특구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다. 자녀의 교육 떄문에 이 곳으로 이사온 분들도 있을 텐데, 성도들은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바울은 감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신 중 하나를 썼다. 빌립보서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시편의 다윗이 쓴 글을 보라. 기쁨을 노래하는 시들은 거의 다윗이 쫓길 때 썼던 것들이다. 시련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성도들은 놀랍게도 그 시련과 고통 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글들을 쓰고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고백을 쏟아놓게 하는 것이 성도들의 경험이다. 성도들은 중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내면의 진실한 변화가 일어난다. 성경은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인격과 됨됨이의 중심이 마음이다. 성도는 내면이 변화된 사람. 환경이 열악하고 어려울 때에도 다른 것들을 읽어 낸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말씀을 누릴 수 있다. 변화된 마음과 말씀과 성령이 계신다.

우리 속에 성령이 없으면 누구도 성령이 아니다.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최선, 최고의 아름다운 글들을 쓰고 만들어내는 차이가 성도들 속에 있다. 우리가 환경의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다. 내면에 생명을 가지고 성령과 말씀이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최상의 조건이 제일 좋은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선 절대로 안된다. 고통스럽고 실패하는 자리에서도 최상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그 속에 고백과 노래를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 세상을 거슬러 가고 세상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남들이 울 때 다 울고 남들이 불평할 때 다 불평하면서 사는게 아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면서 살기 떄문에 성도인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 감옥, 실패, 아픔, 눈물이 있던지 그런것들이 더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내는 것이 꼭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종(둘로스)
이 귀한 서신을 누가 쓰고 있나. 바울과 디모데가 보내는 사람으로 이름이 나온다. 디모데가 이 교회를 개척할 때 같이 있었다. 이 디모데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리고 달아났을 때 끝까지 바울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바울과 디모데가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라고 말하고 있다. 종 가운데에도 계급이 있는데 바울은 그 중에 가장 하찮은 종 둘로스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과 자식에 대한 소유권도 없는 것이 둘로스이다. 바울은 예수의 종이라서 생명에 대한 권리도 없다고 소개한다.

이러한 종됨은 성도들의 삶의 핵심이다. 이것은 억울림과 억지로 하는 종살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됨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하는 종됨을 말한다. 한 인격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종됨으로 사랑하는 백성이다. 베풀어 주는 것 가지고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사랑은 희생이다.

목회를 하면서 많은 부류의 사람을 만난다. 예수 믿은 지 오래되도 예수 믿는 맛이 뭔지 모른다. 신앙 고백은 하지만 예수 믿는 재미를 모른다. 예수 믿는 맛을 알아야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 행복한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예수 믿는 맛의 결정체는 주님의 종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담임목사가 한 마디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교회에 대한 단상. 목회자도 종일 뿐이다.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여 가르치는 것. 말씀이 만홀히 여겨지지 않기 위해서 그 직분이 귀하게 여겨질 뿐이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다. 각 성도들이 주님께 순종하면서 주님을 중심으로 함께 움직여져야 한다.

교회 안에는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종이 되는 교회를 하고 싶다. 교회 와서 사람들을 부리려고 하고 큰 소리를 치려고 하고 영향력을 미치려는 일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힘을 다해 영혼들을 섬길 처소를 찾아내고,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찾아 하는 것이 교회이다.

자식을 잘 기르는 것이 무엇인가.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잘 기르는 것이다. 후배들이 가까이 와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목사, 더 훌륭한 목사가 되어주길 바란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사도 바울은 지체 없이 말한다. 예수 때문에 너희들의 종이라고 말하기를 말한다.

모든 성도와 감독, 집사들
바울이 누구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가. 감독들은 오늘날 장로를 말한다. overseer, 사람들을 돌보고 필요를 공급한다. 집사들과 함꼐 몸을 사용해서 한다. 성도들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한 단어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saint. 성경은 예수를 특심하게 잘 믿는 무리를 세인트라 하지 않고, 평범한 우리를 세인트라고 한다. 모든 성도가 세인트이다. 모든 진실한 성도들을 세인트로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구원의 목적이다.

모든 성도가 귀하고 하나 같이 평범하고 보탬이 없는 성도는 아무데도 없다. 모든 성도가 하나 같이 보석 같고 귀하고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될 귀한 분들이다. 특출한 일부만 성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님 앞에 모두가 절대적인 가치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귀한 생을, 마귀가 “너는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님 앞에 특별하고 하나 밖에 없는 세인트가 우리들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
이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복을 주시는 일이다. …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 세상은 모두, 운이 좋기를 원한다. 성도들에게는 은혜가 있다. 자격과 공로, 내세울 것이 없는데도 당신의 풍성한 사랑에만 근거해서, 우리의 자질, 가능성, 일한 것, 조건, 자격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에만 근거해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요한 선물을 그냥 주시는 것, 그것이 은혜이다. 나이가 들수록 은혜라는 말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더 낮아지고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면 은혜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에만 근거해서 내려지는 은혜가 있다. 믿어야 하고, 의지하고 붙들어야 한다. 세상은 자꾸만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의 공로에 의지해서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고 그 귀한 은혜를 선물과 복으로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평강이 있다. 평강은 은혜를 아는 자가 아니면 누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평강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없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도 자유와 평화, 노래가 있다. 주님이 아버지시고 예수가 나의 주님이고 왕인 줄 아는 성도의 삶에 은혜가 있다. 그때 비로소 근심과 경쟁으로부터 놓이게 되면서 평강을 누리게 된다. 참된 자유가 있어야 기쁨과 희락이 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평강과 희락이 있다. 자격 없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평강과 희락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주위 사람들이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눔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일상에서 얼마나 누리는지를 생각해본다. 나의 일상은 아르바이트 하는 일터와 가정이다.

일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은혜는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일터에서 누리기는 참으로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에 따른 보상 체계가 일터의 근간이라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터에서 정직한 근로와 합당한 보상은 성경적으로 볼 때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어디까지 하는 것이 적절한 노동인지 그 경계를 알기 힘들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인정을 받을지, 그렇게 해서 좀 더 내 일자리가 안정이 될 지, 그래서 나의 수입이 더 좋아질지, 이 방향으로 생각하다보면 끝이 없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내 스스로 원하지 않는 다는 걸 알게 된다. 그냥 적당히 일하자. 나의 부족함이나 불완전함이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말자. 차라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일터에도 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나의 바톤을 넘기자.

이레가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상황이 나에게도 참 여전히 어색하고 모든 것이 더 처음스럽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더라면 내가 고민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괜시리 더 고민하게 된다. 여기라고 자식 교육에 욕심내는 사람이 없을까. 이웃집 아저씨도 2살 된 아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의료와 보육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의 모든 시도들이 모이면 아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가 엄마 아빠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면 참 거창해서 남사시러운데, 아무튼 걍 집 근처에서 상황에 맞는 의료와 교육을 받으면 될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뚤뭇 :

근황

2015. 5. 23. 20:50

블로그 글이 한 동안(?) 뜸했다.

라는 문장과 '근황'이라는 제목이 평범한 나의 캐릭터와 너무 잘 어울리는 군. 


요즘엔 블로그라는 말도 유행이 지난 것처럼 보이지만 난 요즘도 꾸준히 파워블로거들의 글에서 많은 지식과 통찰을 얻고 있다. 그렇다 애플 관련 블로그 말이다. 아내가 그렇게 일상적으로 맹비난 하는. 


오늘 남포 교회의 박영선 목사님이 과거에 설교한 히브리서를 듣는 중에 요즘 느끼는 바가 있어 적어본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때의 사건 말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아브라함의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조금도 망설임 없이 드릴 정도로, 하나님은 귀한 분이란 걸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이 이 장면에서 드러난다. 세상의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 다시 말하면, 세상의 주인이 나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요즘 근 1년 가까이 한 곳에서 알바를 한 덕에 우리 가족이 파리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 파리의 높은 집세와 약간의 생활비, 그리고 몇 달에 한 번 갈 수 있을 정도의 여행비와 학비 등등을 해결해 준 고마운 알바였는데, 지난 달에 이 일이 끝날지 모른다는 얘기가 사무실에 돌았었다. (결국 다시 몇 달 더 하게 되었지만.) 한 동안 잊고 지내던 한국 귀국설이 다시 마음 속에서 올라왔었다. 꾸준한 수입이 없으면 감당하기 힘든 우리 집의 가계 구조인지라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면 뭐 그런 수순인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 기쁜 소식인데 이상한 맥락에서 이 얘기가), 아내의 뱃 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는 중이다. 막상 선진국에서 살아보니(상식이 일천해서, 프랑스는 그냥 내가 느끼기엔 선진국이라는 유행지난 단어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아이가 크는 환경이면 한국보다는 여기가 낫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렇게 마음이 갈팡질팡할 때 요즘 생각했던 한 잣대로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잘한 실패를 참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면 모든게 잘 되야 한다는 관념이 주위에서 떠돈다.(여기서부터 말이 좀 애매해지는데, 정치적으로 각자 알아서 해석하시면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실패'를 선택해야 하는 때가 분명히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때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나는 안다. 실패 안에 하나님과의 신뢰와 누림이 공존할 수 있다. 정말 이 표현이 요즘 시대에 그로테스크하고 사디즘처럼 느껴질 지 모르나, 언젠가 내가 이 주제를 가지고 나의 귀한 경험을 나누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지금도 그런 기회가 혹시 내 주위를 그냥 스쳐지나가고 있지 않은지 둘러본다. 성도의 일상 중에 하나님을 누릴 수 있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Posted by 뚤뭇 :
요한복음 10 / 하나님의 사랑(1) / 요 3:16-21 / 1984.06.2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잘 추적해서 그 깊이를 더듬어 보면, 얼마나 우리가 큰 감격 속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갈 지 모르겠다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요3:16을 하나로 기억하는 것과 요3장이라는 전체적인 문맥을 갖고 있는 것은 다르다. 16절 말씀 하나만을 볼 때 일어나는 부작용이 있다. 은혜의 진리로부터 차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6절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보내셨고 그것을 믿으면 복을 받고 믿지 않으면 형벌을 받는다. 사랑이라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 오해되는 말이다. 관념론적으로 생각하면 둘이서 완성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에 나는 많은 불만을 갖고 있다. 사랑은 만들어내는 작품이나 미화, 아름다움을 예술, 문학적 작품으로 다듬고 깍아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오해를 종종 한다. 우리도 잘 아는 재벌 명문 가문이 있다. 편의상 A가문과 B가문이라 하자. 두 가문의 딸과 아들이 사랑을 했으나 적대 가문으로 인해 비극을 맞는다. 집에서 반대한 결혼을 했기 때문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로미오가 견디다 못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나갔다. 상당히 열심히 벌어서 성공했다. 줄리엣이 그 돈으로 투자했으나 쫄딱 망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길, 줄리엣이 어찌 저러나 하는 거다. 요3:16도 하나님이 제시한 사랑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서 좋은 것으로 만드는가하는데 잘못된 초점이다. 성경이 사랑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쓴게 아니다. 누가 그 일을 하며, 누가 그 일을 설명하는가가 성경의 초점이다. 성경에서 사랑을 말하면 누가 사랑하느냐에 초점을 말해야 한다. 누가 사랑을 했는가? 하나님이 사랑하신거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사랑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해얄 일은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사랑이라는 말에만 집중하지 말고, 누가에 초점을 맞추란 말이다. 사랑이란 단어는 이런거다. 계획했다. 어떤 만큼? 천하가 두쪽나도 하고야 말겠다.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의지와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의지를 발동하는 일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을 하는 주체자가 분리되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는 거다. 우린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랑이란 것을 바로 꺼내놓고 이야기를 한다. 원래는 그럴 수 없다. 사랑엔 국경이 없다. 인간이 갖는 사랑의 기교함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고 하면 와닿는가? 사랑이라는 집념은 누가 계획하시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하나님의 집념이 있으니 그 일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나는 무얼 했나? 이걸 성숙하는 신자가 자기에게 던지는 질문으로는 가능하지만 이걸로 구원의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고야 말겠다는 선언이다. 될 때까지 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표현이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16절을 다시 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보다 중요한 이야기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합쳐야 완전해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불안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이 시민권 있는 자다.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면목 없습니다만 그의 기업을 이을자가 된다. 무색하고 무안합니다만 하여튼 천국의 영원한 소망이 그에게서 취소될 수 없음이 사실이다. 그것이 어떻게 사실인 것을 알 수 있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단다. 그 사랑이 다시 빛이 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는 것이야말로 신앙적인 사람이 가져야 할 근거요 그리스도의 원천이요, 오늘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흔들리고 무너질 수 밖에 없을 때마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축복이요 운명인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어찌하리요. 누가 하나님을 거스려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난미이 내 편이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어찌 그 아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는가? 그의 아들을 우리의 죄값으로 줄 지언정,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할 지언정 우리는 저주하지 않겠다. 그 분을 죽음에 내어줄 지언정 우리는 죽음에 내어주지 않겠다는 거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이 나를 찾는 것을 누가 방해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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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구불구불 따라가다보면 목사님이 하시려는 말씀이 뭔가 하는 멘붕이 올 것 같다가도 확연히 풀리는 지점이 온다. 복음의 값에 내가 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 그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좌절의 순간이 올 때,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구원의 때가 마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믿은 것으로 착각할 때에 우리는 복음의 값을 우리가 지불했다고 오해했던 부분이 드러난다.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내 복음으로 인하여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 고백이 되자.




요한복음 9 / 니고데모(2) / 요 3:8-15 / 1984.06.17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니고데모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나게 한다. 지난 시간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과 그가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 틀렸다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독교를 가장 쉽게 표현하면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자'다. 그 뜻은 참으로 깊고 오묘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다 깨닫는 것보다도 그 내용이 곁길로 흐를 수 있다는게 더 무서운 일이다. 신자가 신앙 생활을 하는데 가장 무서운 건 자책감이다. 내가 이런 꼴을 하고도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자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자폭, 도망, 슬슬 다 그런거야 하고 넘어가게 된다.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나를 믿는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겠다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표현이 가진 깊은 뜻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 성경만큼 깊고 오묘한 말씀이 없다. 들을 수록 새로운게 나온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가, 그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난처하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자를 믿는가, 십자가 사건을 믿는가, 아니면 그 둘을 다 믿는가? 본인이 대답을 해보라.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물론 어려운 말이지만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성경에서는 이 맥락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어렵지? 여기까지만 듣고 나가면 이단되는거다. 다 듣고 나가야 된다.


지금 예수님은,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15절 말씀,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라는 것은 독립된 약속이 아니라 14절 말씀을 이해하는 자에게만 얻어지는 부수적인 거다. 14절이 더 중요한 형국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영생을 얻게 하는데 있어서, 영생을 주는 핵심적인 사건은 15절이 아니라 14절의 사건이다. 15절의 약속은 14절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 인자가 들리는 사건이 있어야 약속이 성취된다. 15절의 약속들, 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게 하겠다. 나를 믿는자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신 영생이 일어나는 사건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하는 것이 15절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14절이 딴 게 되고, 14절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15절이 딴 게 된다. 


여러분의 영생은 예수를 믿어서인가, 십자가 사건을 믿어서인가? 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예수가 최소한 영광의 모습이어야 되나 처참한 모습이어야 되나? 영광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십자가는 처참한 모습이 아니라 감격의 모습이 되어야 맞다.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좋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생겨나온 사건 자체는 영광스럽고 감격스럽고 멋있어야 하는게 일반적인 사고 방식이다. 


이자가 5천만원이면 원금은 얼마겠는가? 아무리 비싼 이자라 할지라도 5억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그 때 얘기하는 십자가 사건이나 예수는 구원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한 원금으로서 늘 많이 치장된다. 아직 본론을 꺼내놓지 않았다. 이제 살살 들어가보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이 표현으로 이 문제가 풀린다. 신약은 구약을 그 사건으로 제시하지 않고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다행이다. 민수기 21장으로 가보자. 


4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5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6그러자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7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8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9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믿어라. 누가 십일조 내라고 했냐. 믿지도 못하냐. 그러나 조심하라. 요15절을 놓고 보면 14절이뒤집힌다. 믿지도 못하냐, 쳐다도 못 봐? 식으로 말하자면, 민수기는 쳐다본 목표물이 근사한 것이어야 한다. 믿는 자마다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자면, 민수기도 쳐다보라에 강조점이 떨어진다. 그러면 쳐다보는 목표물이 근사해야 한다. 그런데 모세로 하여금 들라고 한 물건이 쳐다보고 싶은 물건이 아니다. 뱀이다. 뱀은 성경에서 딱 한 번, 뱀 같이 지혜로우라는 맥락 말고는 죄의 원형으로 상징된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들리워져야 한다. 뱀은 곧 예수님을 상징, 근데 이 뱀이 사탄, 죄, 그리고 예수로 상징이 이어진다. 큰일이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오해하는 지점이 명백히 드러나는 거다.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은 쳐다보는 목표물로도 아니고 쳐다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효력을 얻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쳐다보는 대상인 뱀 자체가 효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다.


쳐다봐야할 것이 쳐다봐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쳐다보는 것 자체도 가치있는 방법이 아니다. 쳐다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민수기는 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란 말이더냐, 민수기에서 찾아봐야 하는 사건의 핵심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렸다. 그들에게는 불뱀에 물린 것이 자업자득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셈이다. 불뱀에 물린 걸 해결하는게 문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늘 당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늘 불뱀에 물린 거 치료받았다고 해서 내일 물리지 말라는 법 없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상 그들은 불뱀에게 또 물릴 것이 자명하다. 그들의 죄인된 것을 고치는 것을 하나님이 제시하신다. 우리의 죄를 없이 하는 것, 죄를 처치하는 방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세지로 제시하신다. 


나무에 뱀을 달아매라. 뱀은 죄의 원흉, 저주의 상징이다. 왜 나무에 달라고 하는가? 성경은 이 사건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 나무에 달아매기 위해서 특별한 요구를 이스라엘에게 규칙을 제시한다. 사람을 나무에 달지 마라.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나무에 달아매는 것은 저주를 받는 것이다. 거기다 뱀을 달아맨다. 죄의 원흉, 놋뱀은 심판을 의미. 신명기 28:23,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땐, 적군의 포로가 되고 하늘은 놋이 되고 이런 단어는 늘 심판. 그 발은 심판하러 오신다는 뜻. 밟아서 죽이겠다는 뜻이다.


심판받고 저주받은 뱀을 쳐다보는 것이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사명이 되는 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믿어라고 할 때, 나는 힘이 있다고 사랑받을 만하다고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고 주실만한 능력의 하나님이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르다. 요3장 보면, 이 사건이 사실상 14절을 근거로 해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내가 저주를 받음으로 너희가 고쳐지리라. 이 얘기를 이렇게 하면 명백해진다. 니고데모와 이야기를 하시는데, 예수님께 요구하시는 건 이거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당신은 대단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는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고 깨닫지 못한다. 진실로 이르노니 네게 필요한 것은 중생이다. 왜 그 말을 하셨나. 니고데모야 중생해서 다시 돌아와라고 하지 않았다. 니고데모의 현상이 어디에 있는가 수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생을 촉구하고 있지 않다. 중생을 위해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 모든 조건과 방법이 인간 자체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해결하겠다고 하신다. 너의 죄값을 위해 내가 죽겠다고 한다. 내가 너의 죄값을 치르는 수 밖에 너희를 중생시키는 방법이 없다.


15절에서 나를 믿으라는 말은 방법이 그 방법 밖에는 없다는 표현일 뿐인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서 왜 이렇게 열을 올리냐하면, 여기까지는 이렇게 이해했든,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별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다음 신앙으로 도약하는데 중요한 갈림길이 보인다. 예수가 오신 걸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를 제시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의 문을 열게 하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영접하고 믿어서 구원을 얻을 것인가 안 얻을 것인가하고 최후의 방법으로 제시됐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예수는 그렇게 오지 않았다. 내가 죄인이라서 날 구원하기 위해서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보석금으로 내놓은 거다. 내가 구원을 택하는 방법이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빼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놓은 거다.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난다. 둘은 혼동되고 있다. 그걸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해 실제로 이해하는데는 오해가 따를 수도 있다. 


이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의 신앙에서 문제가 생기는거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방법론으로 택하게 되면 그의 신앙은 자기의 기준과 기대한 것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때마다 무슨 지점으로 돌아가게 되냐면, 이러고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효력이 될까로 가게 된다. 구원을 얻은 이후에, 그거 확인하느라고 평생 머리가 세는 신자들이 많다. 다른거 할 틈이 없다. 다른 어떤 걸 하는 모든 것이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거다. 그 모든 것이 단지 자기 자신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맴돌고 있다는 거다. 이걸 딛고 뛰어야 하는데 밟을 때마다 가라앉는다.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구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예수를 선택하여 믿은자가 아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방법을 일방적으로 동원하신거다. 우리가 예수를 찬양하고 십자가 사건을 감격으로 본 것은 내가 받을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신 거고 예수님이 즐겨 자청하여 오셨다는데 감격과 감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선택했다고 오해하며 기뻐하지 말라. 우리는 죄인임을 고백할 것 밖에 없다. 나의 논리로 보면 내가 믿은 것 같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 마냥 보인다. 그러나 살펴보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붙잡으셨고, 그.가. 나를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로 속량해내셨다.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하나님을 본 다음부터 경험과 인식이 있는 거다. 


태어난 아이가 자기의 출생을 모르듯이 영적인 출생도 본인이 깨닫지 못한다. 아는 날이 오긴 한다. 아는 때는 이미, 태어나서 한참 된 다음일 수가 많다는 거다. 새삼스럽게 그 때 궐기해서 혼자 떠들고 잘난척 하지 말라. 감사의 신앙고백이어야 하지, 종특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끊임없는 교만, 그리고 이어지는 좌절. 우리는 아무도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없고, 동시에 좌절할 것도 없다. 우리는 옛 조건이나 가진 것으로 부름 받을 자가 아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만큼이나,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이요, 소유요, 그분이 놓지 않으면 놓아질 수 없는 사람임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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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 니고데모,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

요3:1-7
14절까지 연결되는 이야기의 전반부.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 유대인의 관원이자 스승격인 사람.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상당히 괜찮은 얘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정적이고 날카로운 답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의 고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특별하다고 했으나 예수님은 영적인 차원을 보지 못함을 꾸짖고 있음.

니고데모가 찾아온 동기는 예수님의 표적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요6:26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다. 마12:38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세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들이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게 없다. 인자도 사흘 밤낮을 어둠에 있을 것이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사람들이 구하는 증거에 대해 예수님은 표적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다. 이미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포도주, 나사로, 문둥병자, 소경, .. 이것보다 더 큰 기적들은 없다. 여기 나와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저들의 올무에 걸리고 저들이 이미 결론을 내린 것 같이 사형에 합당하다는 죄목을 얻기까지만 할 뿐이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전도를 했다. 성 사람들이 회개를 했다. 요나가 가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을 때 전도한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이었다. 그의 공의, 심판, 요구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가 전한 내용의 주체는 하나님이었다.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와서 이야기를 해도 안 듣는 상황이다. 요나의 말을 듣고도 회개한 사람이 있는데, 너희는 요나가 말하는 주체인 하나님 자신이 와서 말을 해도 안 들으니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요3장에 우리의 약점이 나온다. 니고데모의 고백: 표적을 보니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예수님의 답변: 거듭나지 않으면 끝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온 근거나 원인은 예수님 보시기에 영적이라기 보다는 육적이라고 하고 있다. 거듭나지 않는 한,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넌 왜 나를 못 알아보느냐 죽어라고 하는가? 아니면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가?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얘기다. 마12장에서도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예수님이 하신다. 어떤 표적을 보여도 항복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거듭나지 않는 한, 어떤 표적을 봐도 항복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의 영적 회복을 하는 대속 제물로 바쳐지지 않는 한에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더라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결단코 꾸짖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이르노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마12장 사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 근데, 요나보다 더 큰 하나님 자신이 와서 말하는데도 듣지 않았으니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요3장을 근거로 해서 보면, 너희들이 못 알아보니 죽어라가 아니라 못 알아보는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왔노라고 말한다.

전도서의 결론인,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요나의 얘기를 듣고도 항복을 했는데 내 얘기를 듣고도 못 알아들으니 저주를 받고도 마땅하다라고 말해야 정상적인 맥락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후미에, 속죄를 받게 하려고 왔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어떤 원리를 가지고 인용하는가를 다시 봐야 한다. 원래 있었던 사건을 훨씬 더 풍성하고 깊게 하나님이 채우신다.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자를 니느웨 사람이라고 한정짓지 말고 인간이라고 해야 한다. 인간이 정말 회개 했다면, 전도 내용의 핵심인 하나님을 말하기도 전에, 벌써 무릎을 꿇고 회개를 해서 땅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겠는가? 니고데모야 너는 아직도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않는게 당연하다. 예수님은 그들을 속죄하기 위해서 오신 거다. 당연한거다.

그러면 요나가 전한 니느웨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가? 잘 생각해보라. 그러면 요나 선지자나 니느웨 사람들이 가짜라는 말인가? 아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을 인용함으로써, 고정된 역사적 사건을 뒤집자는 것이 아니라 그걸 원리로 해서 다시 어떤 가설로 끌고 나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겁나는 것은 앞의 이야기를 놓고 볼 때, 예수님이 새로운 각도로 요나와 니느웨 사람들을 다시 보여주려고 할 때 너희가 나를 좇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나온다. 예수님을 좇아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하면 중요한 오해와 착각이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이 아니라 먹고 살려고 찾는 것이라는 말이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해 보면  교회의 인간들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서로 상대방을 못 살게 하고 손해 주고 자기는 이익 보겠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전쟁이다. 이념의 싸움은 허울이지 사실은 인간의 싸움이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단 하나의 기준, 예수 믿으면 좋고 예수 불신하면 다 악당이라는 기준 밖에 없다.

나는 이북에서 피난 왔다. 피난 왔다는 것은 잘 살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에서 피해온 사람들은 주로 지주다. 평안북도 구성군의 교회 재물을 관리한게 할아버지였다. 우리 아버지가 자라면서 그 모습을 봤다. 목사들이 얼마나 치사하게 먹고 사는 문제에 매였는지를 봤기에 아버지는 그 반발로 죽던 해에 교회에 나가셨다. 외할아버지는 목사였는데 평균 3년 이상 교회에 있지 못하셔서 개척교회를 13개 세우시고 돌아가셨다. 교회가 기성화되는 싸움 때문에 먼저 사표를 내고 나가시는 스타일이었다. 나에게 그런 아픔이 있다. 성경 말씀을 하다보면 불현듯 지난 날의 상처 받은 기억 때문에 목청이 높아지는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고,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여러분이 통촉해 주시기를 바란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을 상처주고 싶지 않다는 진심이 있다. 그런데 가끔 어떤 대목에서 광견병이 발작하는 부분이 있다. 나의 가장 큰 아픔은 목사다. 목사로서 받는 대접만큼 지극한 것이 없다. 목사가 됐기 때문에 받는 대접은 정말 극진하다. 얼마나 극진하고 진심어린 대접을 받는지 모르겠다.

근데 왜 목사는 대접을 받는데 하나님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가? 왜 요나의 얘기를 듣고 회개를 한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나? 우리가 하는 일, 직장에서 하나님이 대접을 받고 계신가를 보라. 예수님의 뼈저린 질책, 니고데모야 내가 네게 진실로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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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놔.. 마음이 무거워진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마태복음 병행구절을 보자. 21:12 이하. 요한복음 2장과 마태복음 사건의 특이한 점은,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라고 인용구절이라고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사건이 그 분만이 하신 사건이 아니고 예전에도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서 갖는 핵심이 있다. 과거의 사건을 추적해보아 과거의 사건이 어떤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핵심


역대하 34:1

요시아 왕은 유다 말기의 왕이다. 요시아 왕 이후에 몇 왕 지나지 않아 망한다. 36장에서 바빌론에게 망하는데, 34장에 요시아 왕이 나오니 이스라엘의 운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행한 선왕이다. 어떻게 우상들을 제하여 버렸는가가 나온다. 8~13절은 성전 수리 내용이다. 이 성전을 수리하다가 성전 안에서 여호와의 율법 책을 발견한다. 그 책을 읽고 요시아 왕이 더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더 깊이 복종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킨다. 


그러나 예레미야 7장을 보면, 예레미아의 무서운 경고가 나온다. 요시아 왕이 지금 성전을 수리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게 만든다. 여호와의 절기를 진심으로 지키고 성전에 모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때 예레미야를 보내서 이상한 말씀을 경고케 하신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한 쪽에서는 왕이 선두에 서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회개케 하고 전심으로 주를 따르게 하는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얼마나 진심어린 일들이었는지가 역대하 34장에 잘 나타나 있다. 성전을 수리하라 그랬더니 12절에 보면 진실히 그 일을 했다고 한다. 35장에 가면 유월절 지키는 문제에서, 자기 처소에 가서 섰다는 것은 자기 일을 제대로 했다. 군기가 엄정하다는 뜻이다. 15절, 이스라엘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모습. 18절,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만큼 유월절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었더라. 유월절을 잘 지켰다고 성경에 나온다. 온 백성이 요시야 왕을 위시해서 얼마나 많은 감격과 희열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 와중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서, 재건하고 있는 성전에 가서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을 들어가는 유대인들아 들어라,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라고 하는 무서운 말을 하신다. 


대체 무슨 말인가? 한 쪽에선 잘 하고 있는데 한 쪽에선 경고를 하는 당파 싸움 같은 양상이 왜 일어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5절 이하의 말씀을 상기해보자.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서 과부, 무죄한 죄, 고아 잘 돌보면 이 곳에 영원히 거하게 하리니.. 도적질, 살인, 간음, 거짓맹세, 우상숭배 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말을 가증한 일이다.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곳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냐. 성전을 수리하고 성심껏 수리하는 사람들을 향해 왜 도적의 굴혈이라 하는가? 너희가 여호와의 전이라 입으로 시인하면서도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헛된 말이 된다. 무익한 거짓말이 된다. 너희가 도적질, 살인, 간음, 거짓맹세, 우상 숭배를 하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는 들어온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하는가?


딴 짓 실컷 해놓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와 제사나 지내고 있으면 구원을 얻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8절.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한다. 도적질, 살인, 간음, 거짓맹세, 우상숭배하면서 내 전에 들어와 제사만 지내면 우리는 괜찮다고? 이제 확실해졌지? 이것이 도적의 굴혈이 됐다는 뜻이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악을 쓸만한 시점이 왔다. 목청을 가다듬고 ㅋㅋㅋ 심각한 얘기다. 어떻게 도적질이 되느냐 하면, 여호와의 전에 나오는 것과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고 그의 기쁨, 싫어하는 것을 나의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21절 가보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너희는 나의 모든 명한 길로 행하라. 그러면 복을 받으리라. 너희 희생의 번제물을 아울러 고기를 먹으라. 너희가 바친 제물 니가 쳐먹어라. 니가 제사한 고기 바치고 이제 딴 짓하지 말고. 제사 바쳐 놨다고 딴 짓한다 이제. 내가 언제 제사 바치라고 했는가? 제사 드리지 말고, 그냥 니가 쳐먹고 말을 들어란 말이다 말을. 희생 제물 바쳐놨더니 할 거 다했다고 이제 딴 일 하더란 것이다. 내 말을 들으라고 그랬지. 먼 말인지 알아듣겠는가? 내가 고기 못 먹어서 영양실조 걸렸냐. 제물 바쳐 놓고 다른 짓 하는거다. 7:10보라.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신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다하면서 하나님은 제물 바쳐서 입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놔둘 것 같으냐, 그 경고다. 이건 우리 현실에도 아주 적용이 된다.


교회는 강대상의 권위가 있으려고 한다. 성가대, 장로님, 이건 권위의 상징이 아니다. 봉사직이다. 교회가 어떤 짓을 할 수 있는가? 장로를 사고팔 수 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서 이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앞으로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우리 교회서 그러지 않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장로님들이 장립식할 때 선물 안 받는게 참 기분 좋다. 다른 시중에 있는 교회 가보면 장로 장립할 때 한탕 해낸다. 장로 시킬 때, 장로되면 기천만원 내게 되있다. 교인들이 장로를 뽑을 때 영적지도자를 뽑는게 아니라 누구의 주리를 틀어서 평소에 할 수 없는 한탕 털어낼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 장로 왜 시키나, 시켜서 한 번 왕창 받는거다. 장로들은 왜하나? 죽을 때까지 자자손손 울궈먹는 직분이다. 아 좋다. 뭐 뜯어먹을만큼 뜯어먹어라 뜯어먹히고 평생 영원무궁, 백두산과 동해물이 마르고 닳도록 울궈먹는거다.


도적의 굴혈이 아니고 뭔가 이게. 자행되고 있다. 교회 목사가 어떤 집에 갈 수 있고 없느냐 그런 근거는 없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게 목사를 부를 수 있는 집은 어떤 집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 중에 있다. 여러분 집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목사를 부르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장로를 불러야 한다. 장로는 말 그대로 세상적으로, 인생과 인간을 보는 눈에 있어서 지혜와 경험이 있는 분이다. 목사에 비해 장로의 기도가 영험이 있다. 목사는 기도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좀 낫다. 전문적으로 이건 배웠으니깐. 3-4천년 된 얘기를 장로가 하나 목사가 하나 차이가 없으나, 인생 문제는 1년 다르고 한 달 다르다.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근데 왜 자꾸 목사를 부르나? 뭔가 더 나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사를 불러서 봉투를 준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무슨 접경선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공증을 쎈 걸 한다. 많이 드릴 수록 가장 확실해진다. 이런 것 때문에 정당한 영적인 문제가 대두되지 않고 쓸데 없는 장사하다가 서로 다 망하는거다. 한국교회의 욕먹어 싼 일들 중에 목사로부터 시작되는 일이 많다. 


요즘 사우나 얘기 나오는 것과 같다. 욕 들을 것 같으면 안 가면 될거 아닌가? 정 불쾌하면 골목에 숨어있다가 패면 될 것 아닌가? 목사는 교인들이 돈 안 주면 먹고 살게 없단 말이다. 자동차 양복 사주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모든 근거 밑바닥에 말하자면, 하나님을 경배의 제 1차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제1 원인이 되어있는가 우리는 상거래를 하고 있는 도둑놈, 해적, 산적이다. 


우리가 늘 한시도 까먹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 하나님 눈 앞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관심 둘 것 없어야 하는 인생이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성전을 헐자고 한다. 원체 도움이 안되니까 성전을 헐어버리자는 거다.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나온 가장 큰 이유는, 성전을 헐기 위해서였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고 개뿔도 아니다. 목사랑 만나야 뭐 실감나고 기도를 받아야 나아보인다. 이런 무식한 이야기들이 통용되니까 사기꾼들이 횡행한다. 이 세상 가장 큰 사업은 교회다. 장로하고 목사하고 한 3명 모여서 짜고 헌금 내라고 긁으면 뭐, 그 이후로 세금을 내나 뭘 하나.


어떤 교회 공동의회하는데, 이렇게 설명한다. 목사님과 장로님이 회의한 걸 통과시켜주는 뎁니다. 이러고 있다. 목사는 굉장히 무서운 직군이다. 안 해야 한다. 그런데 부름을 받으면 두려움을 갖고 해야 한다. 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그 직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이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이익을 받지 않고 손해를 보고 있다.


말라기 1장

구약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안타까운게 있다면 하나님을 이름을 들먹이면서 모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한 번도 권위있게 선포되지 않고 협잡 모리배들이 모여서 자기의 이익과 탐욕을 채우기 바쁜 싸움과 장사치들의 소리치는 험화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정하는 지점이 어디인가?


예레미아7장

16절, 그런즉 너희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간구하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결심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생활을 영위하고 있나? 무엇을 위하여 땀을 흘리고 무엇을 가장 두려워 하는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나님께 정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가르치는가?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면 선행을 하라.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돌보라. 우리는 조금이라도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과 친하려고 노력하는게 현실 아닌가? 돈을 꾸어줘받자 받지 못하는 사람을 섬겨야 한다. 이 세상이 갖고 있는 힘, 물질과 이 세상의 권세를 탐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증명하지 않으신다. 갖고 있는거 홀딱 다 까먹으라는 것 아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되 그것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투자하지 말라. 주위의 다른 사람을 돌아보라. 생색내지 말고 돈주고 얼른 도망오라. 돈 없으면 한달에 한 번 도와주고 오라. 마음이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이를 악물고 하라. 그걸 하지 않고 나와앉아있는 한, 십일조를 1억원을 하는한, 눈깔을 빼서 헌물을 한다해도 무의미하다. 와서 좋은 옷 입고 성가대의 성가를 듣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옳다, 지당하다고 하면서 돌아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요한복음 4:19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나는 집사, 십일조, 성가대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게 아니다. 단 하나의 기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신다. 우리 교회는 그런 실수를 하는 분위기는 아니라서 기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분위기다. 우리는 다행이다라고 할 때는 아니다. 8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인간들이 갖고 있고 늘 넘어지는 실수의 대목이기 때문에 우리도 경계해야 한다. 한 10년, 20년쯤 흐르고나면 무슨 실수가 여기서 싹틀지 모른다.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놓을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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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첫 기적은 물로 포도주를 바꾸신 기적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퉁명스러운 대답. 에수님의 기적은 그닥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쓰인 적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향해 있다. 자신의 헌신과 수고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 쓰였다는 말이다. 내가 요즘 한창 하고 있는 어른 되기 놀이에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다. 수연이에게 참 많은 말을 했는데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예수님의 첫 기적,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 생각 같이 쉽진 않다.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첫번째 기적으로 택했다는 것을 명심. 첫번째 표적을 왜 하필 술 만들기로 하셨을까? 아직도 술 담배를 정리 못하신 분들 있을거다. 아직까지도 나갈 때 악수하면 포켓에 담배가 보인다. ㅋㅋ


기독교는 술담배를 갖고 시비거는 종교가 아니다. 그걸로 천국을 못 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은 절제를 요구받고 있고 덕을 요구받고 있는 것과 근본적인 사상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대니스 레인 목사님이 했던 말, 새벽기도를 안 할 수 있다고 하자 어떤 목사님이 이단이라고 공격했다. 주일날도 꼭 11시에 모일 필요는 없다. 주일은 늦잠 좀 자자는 거다. 우리가 오후 예배를 3시에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일찍 하고 권투 중계 보자는 거다. 그걸 꼭 7시에 해얀다는 법칙이 있진 않다.


술은 성경에서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술 취해서 좋지 않게 구는 건 경고를 하고 있다. 술은 늘 기쁨과 환희의 상징으로 쓰인다. 잔치에 술이 떨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술 담배 문제가 영적인 기준에 걸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한국 사람에게는 술담배를 안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비견될만큼 하나의 상표가 됐기 때문에 절제하라는 것이다.


기쁨에 관한 얘기가 포함된 오늘의 내용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설명을 하시는거다. 미래를 기대할 것이 없고 축복을 기대할 것이 없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잔치와 기쁨을 회복시키시고 기다리고 소망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시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살펴볼 것은 그것이 중심이 아니다.


포도주가 모자랐고, 예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일렀고, 예수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을 행해야 옳다는 건가 안해야 옳다는 건가? 말은 안할 것처럼 하시고 행동은 결국 하셨다는 거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문을 보면,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되어 있다. 당신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


더 헷갈린다. 게다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셔놓고 또 그 일을 직접 행하신다.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은, 요한복음에는 내 때에 관한 기록이 7번 나온다. 


이 때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이 고난받으며 십자가에 지시는 시간을 말하는 거다. 때가 이르리니. 주께서 잡혀 가시고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가고 예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본문을 돌아가서, 포도주 만드는게 왜 때와 연결이 되는가? 이런 생각을 해보자.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으로 인해서 기적을 일으킨 것과 일으키지 않은 것 가운데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무슨 이익이 있었을건가? 예수님 때에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하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행적을 추적할 때마다 기억해얄 것은 그 어떤 사건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일차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쓰일 때는 있다. 어떻게 섬기러 왔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쓰인다.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는 지적들이 나온다. 죄값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데 메시아로 왔노라를 증명할 지언정. 가나 혼인 잔치는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그에게 있어선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예수님이 누군가를 증명해내는 가를 시작하는 지점이다. 십자가를 지시는 길의 첫 발걸음이다. 축복과 영광과 갈채의 시작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과 어려운 일로 들어서는 시작이다.


여자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의 모친 입장에서 보면,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어떻게 좀 해라. 필요한 것을 채워라. 내가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을 하러 온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온 자다. 귀신자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온 자가 아니라 죽어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을 화해시키러 오기 위함이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떼우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틀렸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내 영광을 드러내며 그냥 포도주나 만들어주러 온 게 아니다. 물론 그가 포도주를 만드실 것이다. 이런 말 다 필요없이 예수의 어머니께서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면 네 만들어줄게요라는 항복과 결과의 말이 되면 끝 아닌가. 


같은 사건이지만 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진다는 말이다. 악을 써도 마땅한 말이다. 예수님의 모친께서 요구한 것과, 예수님의 시각을 통해서 새로운 각도로 보는 것은 신자의 생활에서 천지 차이가 난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잔치를 이루시사, 포도주를 만드시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기 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다. 우리의 영혼을 축복하러 오셨다. 십자가의 가시관을 만들어 출발하시는 길로 첫 출발의 표시로 포도주를 만들어 내셨고 그의 수난의 시작은 우리에게 잔치의 시간을 이루어내는 쌍곡선을 이루어내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신자란 누구나 예수를 알게 된 이후로, 어떤 축복과 기적도 남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것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선 한 신자를 두 번 다루신다. 신자를 하나님께 항복시키는 것으로 다루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일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 때 필요한 것은 말하자면, 행복한 것도 아니고 평안한 것도 아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 들어가는 일을 시작하는 거다.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남 앞에 화려하게 치장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연출하신다. 죽은 나사로를 일으키셨다. 바다 위를 걸으셨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얼마나 남았다는 사건을 볼 때 반대되는 개념을 봐야 한다. 


공생애 최초 세례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거든 증명해보아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살아가는 것. 나중에 무슨 기적을 만드는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신다. 대치되는 사건 아닌가. 마귀가 성전 꼭대기에 올려놓고 뛰어내리라. 마귀의 시험에 대해서는 일절 대꾸를 안하시다가 그의 생애에서는 그것보다 더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가. 자신을 증명하는 시험을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들이 아니다. 뒤에 있는 모든 사건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 분이야말로 산 떡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라는 부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광과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신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에 그런 일들로 말미암아 갈채를 받고 추앙 받는게 아니라 훨씬 오해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사건. 눅 12장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것을 보이신 것은 단 하나의 목적. 우리가 누구며 그래서 예수님이 오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을 확인시킬 수 밖에 없었음.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초대하는가?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나의 게으름과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예수님을 늘 등장시키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에 그를 좇았던 사람은 너무나 많았으나 십자가에 달릴 때 사도 요한 하나만 거기까지 따라왔다. 


마태복음 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시는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못하는 족속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아놓고도 그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를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베드로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증명되는 것을 요청받는다. 가장 큰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로 보일 것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찾는 가장 큰 이유를 보라. 자신을 증명하는데 얼마나 많은 기도 제목이 나오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치장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이야 말로 가장 기뻐하신 길인데, 지고 망하고 죽은 길이다. 그걸 가장 기뻐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신자란, 신자 이후로 어떤 사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어야 한다. 어떤 기적이 연출되기를 원하나? 무엇을 원하나? 그 모든 요구들이 기도제목으로 등장할 수 있다. 우리의 안타까움과 연약함을 돌아보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알까봐 하는 이야기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하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무엇을 골자로 기다리고 안타까워 하는가. 예수가 걸어가신 길은 영광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다. 모든 신자가 그 앞에 부름받는 순간부터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기억해야 한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좇을 지니라.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러가지 부족한 것 중에 기적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돌아오는 기적은 있다. 돌아온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생기는 기적이 없다. 저 사람이 저렇게 짓밟히고도 하나님의 사람일 수가 있나 하는 기적이 없다. 예수 믿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펼쳐보이는가 말고, 자기를 보호하는 것을 즐겨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의 자존심을 묻어버리는 기적이 없다는 것이다. 몽땅 바깥 세상에 들어오는 기적에만 관심이 있다. 들어온 자가 하는 기적은 없다는 거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우리의 썩어빠진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매일 매일 잔치를 하는 것 같은 감격과 기쁨과 보람이 되는 생애에 관심을 가져라. 우리의 순종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안타까운 사역에 동지되는 가장 놀라운 축복인 것이다. 원래 뛰어난 병사들에게 하는 사령관이 훈시 중에서 가장 멋있는 말이 있다. 


훈장과 약탈물을 많이 주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장병 제군들은 고향에 돌아가거든 다른 말은 하나도 할 것이 없다. 이 말만으로 족하네 나는 패튼과 함께 했었노라고. 나는 나폴레옹과 함께 전장터에 있었노라고.. 이것이 그들의 무한한 보람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패튼을 좇았던 사람들에게도 그 보람이 있었다면 십자군의 한 전사된 우리 모두에게 매일 벌어지는 전투와 매일 싸워야 하는 일거리들이 회피해서 싸워야 하는 수가 없다. 군복은 번쩍거릴때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있을 때에만 군복다운 것이다. 신자의 삶이 너무 예쁘다.. 싸움도 없고 갈등도 없고 숨어서 숨어서 목숨을 연명하는 것 말고는 없다는 것만큼 내일을 내다보는 비극이 없다. 아직까진 잘 해왔으나 정체되지 말라는 법 없다.


우리의 첫번째 경험들을 십자가로까지 연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 받았떤 감격들이 있었나.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걸어갔던 가나 혼인 잔치였던 시작이어야 한다. 거기서부터이다. 여러분의 생애는 기적으로 연결될 수 없고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과 친척, 친구들이 하나님을 보는 일들이 일어나야 마땅하다. 없으면 안된다. 그 일에 부름 받고 있는 거다. 우리 모두가 두 갈림길에 선다. 마리아, 혹은 예수님. 성경의 기록은 그런 이유로 이렇게 무섭게 하고 있다.


사람의 미련한 것 같이 한심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씀을 듣고 분명히 두드리고 깨우라. 힘을 다하여 결심하여야 하는 싸움이다. 쉽지 않기 때문에 사족을 붙인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 뭐라고 생각하나. 역사를 배우고 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배우면서 결론으로 무엇을 얻나. 사람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받지 않는다는 거다 사람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받지 않는다. 그토록 미련하다. 불을 보듯이 뻔한데 그렇게 한다. 지혜있고 축복 받은 사람이란 그런거다. 자기의 경험 외의 남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미련하려면 무식해야 한다. 고집이 세야 한다. 아는 문제에 대하여 게으르다.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살기로 결심하고 갑자기 미련해지지 않기로 한다. 오늘 가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여러분을 참으로 환영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이 모든 운명과 축복들이 너무나 비참해진다. 아직도 남은 생애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 첫걸음을 걸으신 가나 혼인 잔치의 심정을 헤아리며 단단한 결심으로 헌신과 순종으로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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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벨리브 매니아

2014. 9. 5. 19:58

Posted by 뚤뭇 :

내년엔 컴터 학교

2014. 9. 4. 04:34



긴 여름 방학이 지나자 집 앞에 있는 나름 유명하다는 디자인 사립학교 앞에도 다시 학생들이 붐빈다. 무심코 지나가다 눈길이 멈춘다. 나도 내년 초에 컴터 학교 가얄 것 같다. 체류 문제도 있거니와 3년 과정 탈없이 마치면 또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슬며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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