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와서 적응하는 중에 나를 힘들게 했던 질문 중 하나, '이 모든 어려움을 복음으로 퉁칠 수 있는가' 신자를 괴롭히면서 또한 복음의 모든 것을 담는 멋진 질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생각해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이 이 요한복음에서 나오고 있다.



요한복음 003

오늘 구절은 어려운 말씀 중에 하나다. 그 이유는 12절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 힘이 되고 확신의 근거가 되는 구절인 동시에 그 앞뒤의 구절이 빛을 보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12절 때문에 기독교가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구원이란 것이 갖는 은혜됨의 깊이와 오묘함을 다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믿고 구원 얻는것이 마치 납득할만한 결과를 제시해서 사람들에게 동기유발을 시킬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고 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니까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신자들의 맹점은,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동기 유발을 한다는데 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빛이 왔으되 세상과 피조물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빛이 왔는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이 세가지 지적을 우리의 죄인됨을 질책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빛이 왔는데 우리가 그를 못 알아봤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왜그러냐면 나는 믿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믿었는데 왜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가 하는 비교 말이다. 12절을 이유로 말이다. 나는 믿었고 세상 사람은 믿지 않았다는 습관이 있다는 말이다. 결론은 13절에 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다는 이 말은 12절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12절은 불가능하니까 혹시 그런줄 아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난 줄로 알아라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기적, 축복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는 누구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정당성을 제시해서 그 결과를 설득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거꾸로 설명한다. 안 믿는 것이 정상이라고 오히려 말한다. 그리고 믿는 것이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너무 이상해서 기적이라고 설명한다. 자기를 만든 주인을 모르고 영접할 줄 모르는 자들이 그를 영접하게 되는 길은 우리에게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이 현실로 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났다고 한다. 기독교 복음이 제시하는 은혜와 축복과 기적이 담겨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흔들리는 부분은 무엇인가. 제 2,3의 축복이 없다는 것 아닌가. 나는 예수를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무슨 도장을 찍어주는게 없다는 거다. 성경은 가장 중요한 우리의 우리된 특권과 자랑과 확신과 축복의 기초를 내가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을 내적조건, 나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동전을 넣으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도해주고 헌금해주고 철야해주고, 그 다음에 뭔가 나오지 않으면 힘들어한다. 예수를 믿는 기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기현상이다. 

이 문제를 우리가 얼마나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는지 모른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예수님은 섬김 받으려고 오지 않았다.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셨다. 이건 엄청난 일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희생하고 사랑하는가에 집중해서 사실을 망각한다. 빛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오셨다. 빛을 비춰봤는데 너희가 몰라봤다고 심판하러 오시는게 아니다. 그걸 저주하고 고소하고 꾸짖고 심판하러 오신게 아니다. 그런줄 알고 오신거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게 아니라 섬기고 고치려고 오신거다. 죽은 것과 죄인인 것, 멸망의 자녀인 것을 알고 오신다. 우리가 그 분을 몰라보실 것을 그 분이 더 잘 알고 오신다. 그 분의 오심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침을 받았다.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적이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믿으면 죽고나서 영생인데 아니어도 본전이지 않은가 그러니 믿으라고 하는게 말이 안되는거다.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이 말을 해도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다. 신자들이 갖는 가장 큰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맹점. 믿는자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어느만큼 안 믿는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게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자기가 예수를 믿는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면 상대방이 안 믿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다보면 쓸데 없는 증거를 찾게 된다. 하나님님을 믿어드리기로 했으니 복을 주십시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중에 하나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초나 확신의 근거로 제시된 적은 없다. 한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찌개란다. 이유는 복을복을 끓어서이다.  그것이 복을 요구하는 2차적인 자기 신앙 성장의 과정이라면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가지고 자기 신앙을 확인하러 가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자기 확인이 된다면 문제다. 자기 확인을 2,3차 적인데서 찾으면 안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걸로 결론이 나야 한다. 우리가 왜 하게 됐나,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난자이기 때문이다. 

이걸 성경에서 얼마나 강조하는지를 구약에서 살펴보자. 구약, 이스라엘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이스라엘은 신자의 상징이 아니라 죄인의 상징이다. 사 1:2-17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신 끔찍한 말씀. 나의 백성은 나를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을 모른다. 자연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더 많은 어떤 것들을 베푸신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 근본적인 기적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한 인간이 하나님께서 더 많이 찾아오시고 베푸신 것을 인하여 더 나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성경이 하는 얘기다. 오죽하면 10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귀를 기울여라. 이스라엘 백성을 죄인으로 지칭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 문제를 자기 스스로 풀 능력과 가망성이 전혀 없다는 거다. 의인은 없나니 한 명도 없다. 성경이 주장하는 바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아는 자도 없고 관심을 가진자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믿고 있다. 성경이 지적하고 싶은 대목이다. 어찌하여 너희가 예수를 알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가. 내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나의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그의 오심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큰 기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영접하는 자가 되었다 내가 믿었다고 꿈결에라도 생각지 말아달라.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이미 얼마나 엄청난 기적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가.

이사야 1장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 1장에서 구약이 이렇게 끝난다. 죄인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 할 필요성이 확실한 증거로 삼고 있다. 우리의 가난은, 믿음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는데서 온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자가 없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까지 온 것을 알기 때문에 나오는 북받친 감격, 자신에 가득찬 비명이 되는 것이다. 신자 모두가 갖는, 이미 경험한 경험이며 특권이며 확신인 것이다. 그것이 없는가? 다시 달라고 하라. 경험하고 갖고 있는 것을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치고 이 지점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요한복음 9장  39절
소경과 소경 아닌 자. 소경을 심판하지 않고 소경 아닌 자를 심판하시겠단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너희 중에 소경 아닌 자가 누구냐? 9-11절은 꾸중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접하게 하시는 거다. 우리로부터 시작하는게 아님을 아는가. 이것으로 족하다. 여기에 덧붙이는 것은아이스크림 위에 갖다 꽂아놓은 이쑤시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원하신다. 우리 생애에 간섭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거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첫번째, 믿음의 축복을 능가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왜 신앙생활로 이길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는 지점이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