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001 / 복음이란 / 롬 1:1-7 / 1991.01.06
2014. 8. 6. 21:07로마서 001 / 복음이란 / 롬 1:1-7 / 199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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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 / 복음이란 / 롬 1:1-7 / 1991.01.06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신약성경은 처음에 복음 성경을 기록한 4권이 있고, 그 이후 제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했는가하는 사도 신경 이후에 서신서가 나온다. 로마서가 서신서 중 제일 처음에 나온다. 로마서가 다른 서신서 중 가장 먼저 처음에 쓰여진 것은 아니나, 당시 성경을 편집할 때 다른 서신서 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로마서가 중요한 이유는 내용의 균형성, 포괄성에 있어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서신서들은 바울이 세운 특정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로마서는 전혀 상황이 다르게, 바울이 세우지 않은 교회를 향해 보내는 서신서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르며, 모세를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계, 즉 로마의 성도, 이방인들에 대해 보내는 서신서이다. 로마서에서 설명하는 복음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실천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
11절에서 이 글을 쓰는 대표적인 이유가 나온다. 은사란 은혜로 베풀어 주는 것 공짜를 의미한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은혜에 있어서 한국 기독교가 그렇게 균형감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 자체와 복음 자체를 은사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방언이나 신유, 환상,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것들을 은사로 생각하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자체를 은사로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로마서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 자체를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서는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책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책이다. 복음이라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복된 소식이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을 보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복음은 은사이고 이 부분에 있어서 충격적이다. 은사란 사고 방식에 있어서 충격적이란 말이다. 휴머니즘은 오늘날, 인간애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나쁜 의미를 갖는 단어다. 신적인 사고 방식을 대적하고 인간을 중심에 놓는 단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복음이 복음된 조건은, 이것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라고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으로 초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휴머니즘이란 사고체계 속에 있을 때에는 완전한 의를 향하여 찾는 과정이다. 의를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행위의 종교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가진 행위의 특성이다. 우리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자칫하면 휴머니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모든 사고 방식과 정신 체계의 궁극적인 권위가 인간에게 있는 것과,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시다는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 넘을 수 없는 차이가 두 사상 사이에 대립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우리 신자들도 틀리기 쉽다.
로마서가 하려는 작업이 뭐냐하면, 복음이 뭐냐 하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다라는 것이다. 16절에 가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설교라하면, 우리는 설명이나 설득, 가르침을 생각하지만, 라틴어의 어원을 보면 선포라는 의미가 정확하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은 설득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선포 그 자체였다. 우리에겐 어떤 개념이 많으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었다. 내가 선택했다는 개념으로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는 복음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죄인의 상태에 있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면하셨다. 다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는 사건이다. 죄가 다 사하여졌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이 아니다. 마치 어떤 나라에 나쁜 사람들이 왕을 배반하고 도망가서 살고 있는 마을에 왕의 사자가 와서 왕의 포고문을 읽는 것과 같다. 왕께서 득남하신 기념으로 백성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준다라는 공포와 같다.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받으리니.. 회개하고 구원을 얻어라. 이것을 누구에게 줬다는 건가? 구원의 시작, 구원의 역동성, 그 능력의 출발과 효력이 누구의 손에 달려있느냐 하면 반응자의 손에 달려있는게 아니라 그것을 시행하시고 만드신 이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이교도들 앞에는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인간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등장하는 거다. 구원, 은혜, 복이란게 우리가 뭔가를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 자체란 말을 바울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가 1차적으로 이해되지 못하면 복음이 제 구실을 못한다. 우리 신앙의 최고 취약점은 언제나 우리가 얻고 우리가 약속 받은 것을 증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힘들어한다. 인생에 일어나는 나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신자들의 신앙이 약한 가장 큰 이유는, 늘, 자주, 지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진이 일어나는 땅 위에 건물을 지을 순 없다. 지반이 튼튼해야 건물을 높이 지을 것 아닌가. 강한 신앙은 좋은 기초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6절,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주도권을 하나님이 잡고 계시는 거다. 구원 문제에 관한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거다. 나 같은 것을 부르신 거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아무런 조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최악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개입한 사건은 실로 놀라운 거다. 그래서 복음이라 하는 거다. 우리는 복음을 복음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복된 소식에 그 복이 없어지고 말았다. 자기가 믿는 만큼만 전전긍긍하면서 쉽게 떠밀려 내려간다. 복음이 나에게 실로 복된 소식인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원의 교리가,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은 이 구원이, 그리스도인의 미래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하는 것을 바울이 설명하고 있다. 복음된 가치는 하나님께서 값 없이 우리 죄인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영광되게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나같은 것을 구원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이 취소되거나 약화되지 않고 방해되지 않고 영광된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이 이 구원의 복음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중간에 포기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죄인들을 구하실 뿐만 아니라 영광된 자리에까지 앉히시는가를 로마서가 설명하고 있다. 구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운명은 내가 방해할 수 없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 그리스도 죽음으로 자기 사랑을 확정. 하나님쪽에서 조건을 갖고 하셨지, 내 쪽에서 한게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얻은 거다. 지금 내가 느끼는 자책감, 내가 이렇게 큰 죄를 지었는데 라고 하는 자책감은 그나마 괜찮은 상태이다. 우리는 구원 받기 이전에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구원의 방식상 우리가 얻은 구원을 취소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연합되어 있다. 그것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주라 시인할 수 없다. 신자는 이중 인격자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혼자가 아니다. 나를 건드리는 자는 주를 건드리는 자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예수 믿는자를 핍박했다. 하나님을 편든답시고 신자들을 핍박했다. 그때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사울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신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나 혼자가 아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내가 지옥에 가면 주님이 따라가게 생긴 것이다. 우리는 하늘 보좌에 주님과 함께 실제로 지금 있다. 우리의 신분과 영원한 운명이 거기에 있고 그것을 방해할 자가 없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워하는자는 아직도 복음을 잘 모르는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예수 안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오늘날 신자의 가장 아쉬운 점은, 하나님 안에 있는 신자의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14절, 복음이 복음된 성격은 우리의 운명으로서 고정된 방식 중에 이런것이 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신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잘 되는 것이 망하는 것이다. 신자는 실패한 것도 잘된 것도 약이 된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이것이 복음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특권이다. 결국은 복음이 뭐냐하는 싸움으로 가야한다. 믿음의 강약은 무엇으로 말미암느냐. 우리에게 허락하신게 무엇이냐, 그분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만큼 신자의 신앙은 커진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 천사, 권세자,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모든 신자가 분명히 알기 원하고 신앙의 가장 좋은 기초를 놓기 원하는 주장이다. 이 근거가 흔들리면 그 위에 아무 것도 쌓을 수 없다. 우리 신앙의 연약함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데서 온다. 하나님의 의지와 집념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이나 실패를 하나님의 연약함과 실패로 연결하지 말라. 우리에게 허락된 복음을 복음되게 간직하자. 이것이 복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자 되게 하셨다. 여기서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우리가 쓸데 없이 뭘 더 구하는 이유가 뭔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자다운 싸움을 이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이 요구한다. 신자답게 사십시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의롭게 살라. 신자다운 싸움을 해야 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