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1-6 강해 33

2013. 12. 17. 08:33

강해 33 / 욥기 42:1-6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우리의 기대와 약간 다른 결론이 나온다고 지난 번에도 말했다. 속 시원하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 같이 분명한, 결론이 없고 창조의 깊이와 하나님 통치의 즐거움들로 답을 다 하시고, 42장에 와서 짧게 욥의 항복과 회개가 나오고 끝이다. 그 후에 물론 보상 같이 가족의 축복 재산의 축복이 이어지긴 한다.

5절에서 욥의 고백 중 중요한 부분이 나온다. 이 절을 가지고 오늘 생각해보기로 한다. 귀로 듣기만 한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말 속에 욥의 비명과 불편이 들어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셔서 억울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라는 답을 욥이 얻었다는 뜻이다. 세 친구들이 욥에게 네가 당하는 재난은 하나님의 외면은, 네가 하나님을 외면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고, 욥은 나는 하나님을 외면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니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표현을 달리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사이의 혼란, 불가해한 일이 이제 욥기에 가장 중요한 주제인 것이다. 욥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외면한 탓인가. 제일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물은 것 같이, 욥 네가 하나님을 외면해서 하나님 없는 자리에 들어와 이 재앙이 생긴 것이 맞냐가 답이냐. 욥기의 설정에서부터 욥은 의로운 사람이다 죄를 짓지 않았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어떤, 우리 이해의 식으로 표현하면, 내기? 시험? 같은 것으로 출발했지, 욥에겐 하자가 없었다. 욥의 비명을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느꼈던 하나님의 부재라고 생각했던 것과 임재였다는 뜻이다. 내가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외면으로 말미암아 생긴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껏 나를 축복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게 뭐냐는 것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말이 안된다. 그게 뭐냐. 이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의,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어떤 불연속, 갈등, 같은 것을 대표적으로 경험한 사람이 엘리야다.

왕상 19장
엘리야가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바알을 따르던 제사장, 아세라를 따르던 제사장을 다 죽이고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고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던 곳에 비가 오게 하고, 궁전에 뛰어들어갔는데 부인이 아직도 살기가 등등하게 살아서,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너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하자 놀라서 호렙산으로 도망간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불러놓고는 큰 힘으로 사역을 하시지 않고 늘 도망다니고 숨게 해서 엘리야는 평생의 불만인 것이다. 엘리야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죽이러 찾아온 척후병들을 기도해서 죽인게 다다. 변변한 것 못하다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과 우상들 사이에 누가 진짜 하나님이시냐를 확인하는 대 전투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엘리야가 준비한 제물이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속에 마차 안에서 자기 발로 뛰어들어가 궁전에 들어갔는데 이세벨이 위협을 가하고 엘리야는 놀라서 도망가는 장면이다. 

하나님이 묻는다. 너 왜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한다. 하나님, 어떻게 된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버리고 하나님의 선지자들 다 죽이고 나만 남았는데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것이 엘리야의 불만, 반론, 항의다. 하나님께서 그 앞에 강한 바람과 불을 보내시고 세미한 음성 속에 계신다.

15절 이하 하나님의 답
너는 네 길을 돌이켜 다메섹에 이르거든…

하나님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아람은 당시 최대의 적국이다. 뷱이스라엘은 누구 하나 하나님을 순종한 적이 없다. 북이스라엘의 예후를 왕으로 삼으라. 예후도 악왕이 될 것이다. 네가 비운 자리, 외면한 시간은 없다라고 답하신다. 이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하나님이 보이게도 일하시고 감추고도 일하셨다. 이것이 엘리야 선지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문제가 다만 엘리야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다윗의 제일 어려웠던 일은, 초기에 그가 어린 나이로 적장 골리앗의 목을 베고 물맷돌 다섯 개로 이마를 명중시켜 골리앗을 잡고 그 목을 베고 이스라엘의 구국의 영웅이 되었는데 블레셋으로 간다. 이스라엘을 위협한 적국의 장군을 죽인 구국의 영웅이 되어서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갔던 피난처가 곧 블레셋이라는 기가 막힌 장면이다. 너는 칼과 창을 의지하여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어디가고, 그렇게 죽이고 짓밟던 적국의 안으로 도망가 목숨을 구해야 했느냐는 말이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의 이해할 수 없는 그 연속성을 본다. 어떤 연속성인가?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실하심의 기적의 연속성 말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복받고 외면하시면 벌받는 이런 이분법보다 더 큰 성경의 설명, 하나님 일하심의 기이함을 우리가 알 수 없는, 복을 주셔서도 복을 받고 고난을 주셔서도 복을 받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해야 한다. 고난으로 일하시는 건  싫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으로 주실 수 있는 것을 고난으로 주신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안의 조건이 내가 잘할 땐 복주시고 못할 땐 벌 달라는 말할 틈이 없다. 우리는 잘 할 틈이 없다. 잘하면 복주고 못하면 벌달라는 말에 남아날 자가 없다.

우리가 못하든지 잘하든지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한다. 고난이나 형통으로 복을 주시는 건 같은 원리다. 

마13장
앞에 있는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설명. 비유는 못 알아듣게 하려고 그런다. 이것은 알아듣지 말라고 하는 거다. 이런 표현이다. 그러나 이게 정말 그런 뜻인가? 모르게 하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큰 비밀이 숨어있다. 씨뿌리는 비유는 뭐였나? 씨를 뿌리는 데 더러는 길가에, 돌밭에 등등 떨어진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게 들린다. 밭이 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밭은 그나마 날려고 하는 것도 방해를 하면 했지 밭이 무엇을 만든게 아니라 내가 뿌린 씨가 결실하는 거였다. 좋은 밭이 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씨가 떨어져야 된다. 너희는 돌짝밭이거나, 사람들이 늘 밟고 다니는 굳은 땅, 가시떨기 뿐이었다. 내가 씨를 뿌릴 뿐만 아니라 싹을 틔워야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해봤자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 얘길 왜 하시나? 너희는 씨를 스스로 만들 수도 없고 씨를 키울 실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할 생명과 능력을 가진 이가 여기에 왔다는 뜻이다. 듣고 알아먹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자가 이미 왔다. 너희는 아무런 준비, 필요, 생각도 없는 때에 내가 왔단다가 이 비유다. 아멘이다.

이 말이 정말 그런 생각이 들면 롬 5장.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모를 때였다. 오셔서 말씀하실 때도 몰랐고 우리를 위하여 죽을 때도 몰랐다. 그러니 욥에게 하나님이 답하는 거다. 네 이해와 네 합의와 네 간절함 같은 것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무지, 너의 한계, 너의 어떤 고집,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하여 나의 성실함과 거룩함이 있단다. 네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 하나님 이러실 수 없습니다 등, 나는 왜 이럴까요? 양쪽 다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과 자비하심이 없다면 모든 존재는 희망이 없다. 내가 그 모든 것 위에 나를 근거로 하여 자비와 긍휼과 능력으로 일을 한다는 걸 안다면, 너한테 이르는 어떤 것도 겁낼 필요가 없단다.

하나님이 함께 했다가 떠나가셨다.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고 고백하는 욥. 내가 티끌과 재 가운데(수치스럽고 망한 자리 같은) 거기서도 이제 괜찮습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라고 한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의 가장 못난 자리와 경우를 덮으실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고 싸맬 수 있다고 항복하는 거다. 이 문제는 다만 이렇게만 소개되어 있지 않고, 로마서 11장에 보면 동일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롬11:30
30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방에게 구원이 어떻게 넘어갔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해서 그 권리가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고 한다. 사실은 그릇의 물이 넘쳐야 넘어갈 수 있었던 지위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고 이것이 성공해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실패했던 거다. 아무 조건없는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 하심에 그 근거가 있다는 것이 부각되었다. 그러니 그 긍휼의 무조건적인 성격 그대로 배신한 이스라엘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게 바울의 논리다.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18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19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20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 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21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23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24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