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0-41 강해 31

2013. 11. 21. 19:39

욥기 40-41 강해 31(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베헤못은 하마, 리워야단은 악어로 번역 됐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문맥상, 하마와 악어로 짐승 이름을 붙였다가 원문대로 돌아갔다. 괴물로 번역하면 넓게 맞는 표현이다. 앞을 하마, 뒤를 악어라고 해도 이해에 큰 어려움은 없다. 

하나님이 왜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끌어들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하마와 악어, 그래도 문맥상 맞고 좀 더 거칠고 큰 괴물 짐승 이렇게 생각해도 된다. 하마를 꺼내놓고 한 얘기나 악어를 꺼내놓고 한 얘기나,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느냐라는 뜻이다.

욥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잠시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한 부분이 생겼다. 이해할 수 없는, 원인을 모를 고난이다. 친구들은 와서, 욥이 당연히 먼저 알고 있었던 인과 응보로 풀어내서 네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 재앙이 임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욥은 설정 자체가 그랬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사단이 와서 하나님의 도전 앞에 괜히 하나님을 섬기겠는가, 복주시니까 섬겼지. 인과응보의 원칙을 깨기로 해서 시작된 이야기다. 욥은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이다. 여기에다가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욥기를 잘못 읽는거다.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일은 있을 수 없는데, 말이 안되는 일이 왜 현실에 일어나느냐는 거다 욥기의 설정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제 욥의 질문에 대하여 답하는 내용 속에 하마와 악어를 끌어들이신다. 뭐라고 끌어들이는가. 네가 하마나 악어를 네 마음대로 노리개 같이 주무를 수 있느냐. 그 얘기를 한다. 그럴 수 없다. 그것을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다. 나 밖에 없다. 너를 짓듯이 그것들도 내가 지었다는 거다. 이게 무슨 대답이냐 하면, 너에게 일어난 고난을 네가 물리칠 수 있느냐는 얘기다. 너에게 일어난 고난을 이유 없는 재난을 네가 해결할 수 있느냐? 없지? 그렇게 묻고 있다. 하마와 악어를 장난감 다루듯 할 수 없듯이. 그리고 그 괴물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기 손 안에 모든 피조물을 갖고 부릴 수 있듯이 너에게 일어난 재앙도 나만이 부릴 수 있고 너는 해결할 수 없다고 답이 되는 것이다. 

없애면 된다. 창조에 괴물이 없었으면 놀랄 게 없다. 욥에게 재난이 없었으면 불평할 게 없었을 것 아닌가. 실제로 만들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는거다. 

시편 8 편에 중요한 답이 등장한다. 
이 시는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에 대한 다윗의 시다.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라는 거다. 하나님과 대등하진 않지만 너무 높아서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인간이 다스리게 하셨다. 낙타, 산염소, 매, 독수리에서 베헤못, 리워야단까지 왔다. 어떤 때는 고래라고도 번역을 한다. 큰 짐승, 큰 괴물,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했다. 아주 중요한 답이 나온다. 모든 피조물이 그렇듯이 수평적 차원에서 대항할 대상이 아니고, 너희는 그것들을 다스리는 존재란다. 악어나 하마보다 더 세서 그것을 물어 뜯고 물리쳐야 할게 아니라 그 위에 있단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억울함들, 버거움 같은 것들은 해결해야 하고 없애야 한다고 말하는데, 욥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것은 끝 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보고도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들과 부딪치고 충돌하는 차원에서 올라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씌우신 통치자의 입장에서 존재가치와 인간에게 부여한 특권과 지위들을 보고 있다. 욥이 실컷 친구들과 싸우고 불평한 모든 것들은 자기를 그저 죽어서 없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존재로 이해하고 살아있는 동안 평탄하게 해주시는 것 외에 소원이 없는 수준에서 쑥 올라오게 된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그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대해서 기대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큰 목적과 권세를 허락하셨다는 거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이 문제는 참 놀라워서, 예를 들면, 욥기 40장에서 본 이 문제. 욥에게 묻는 것은, 네가 악어를, 하마를 네 마음대로 놀릴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지 않느냐, 네가 네 고난에 대해서 불평한다면 스스로 해결해라 그럴 수 있으면 네가 너를 능력있다고 하겠다는 장면이다. 

10어디 한 번 위엄과 존귀를 갖추고,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11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네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 보아라.
12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13모두 땅에 묻어 보아라. 모두 얼굴을 천으로 감아서 무덤에 뉘어 보아라.
14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찬양하고, 네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뇨, 예수에게서 나타났다. 예수로 나타났기 때문에 다 안 믿었다는 말이다. 욥이 생각하는 것 같이 자기가 싫은 것을 해결해 버리고 없애버리는 것이 인간의 영광이거나 인간이 가야할 궁극적인 자리가 아니라 그것보다 위에 있는, 우리의 손이 우리를 구원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고 목적하는 더 높은 자리로 우리를 부르기 위하여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하여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손을 놓고 하나님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길로 자기를 승격시키는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15장.
하나님이 나를 선지자로 세워놓고 붙들어주지 않으셔서 내가 대적자들로부터 수모를 당하게 놔두시렵니까라고 불평하는 절이다.
하나님의 답.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예레미야가 사역에서 지치고, 못하겠다고 하는 자리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제 그를 붙들어 올리시는 장면이다. 이렇게 누가 썼다. 이 대목에 대해서. 반항적인 자기 연민의 상태에서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목적이 있다. 그것을 절대 타협하지 않으실 거다. 그것을 중간에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거다. 예수 믿는 것은 어렵다. 시편8편에 나오는 것 같이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다는 뜻을 이해해야 한다.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저들 위에 서야 한다. 모든 다른 피조물들 위에 서야 한다. 하나님과 방불한, 신성모독적인 비유가 아니다. 청지기로 우리를 세운 직분에 대한 하나님의 교육이 있다. 그것 없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은 없다. 예수를 믿으면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은 예수 믿는 게 아니다. 예수 믿으면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생존의 원리는 간단하다. 적자 생존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말할 때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꼭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오해받고 죽으신 분이다. 그것에서 우리는 비켜가거나 타협할 수 없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힘입어 죽으신다. 그는 제자들에게 누누히 말씀하신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제자들은 세상적 권력과 영광을 요구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답하셨는가.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가 받는 고난을 대신 받을 수 있느냐, 너희는 결단코 못한다. 할 수 있다고 하자, 주께서,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부정과 긍정이 뭘까, 모두가 동참해야 하는 그 잔과 세례는 무엇일까? 섬기는 거다. 모든 존재의 위협을 없애는 것, 베헤못을 없애고 리워야단을 쳐부수는 것이 다스리는 자의 영광이 아니듯이 그 창조들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로 묶을 수 없다면 진정한 통치가 아니라는 거다. 그 통치는 시편 8 편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되어 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신다. 약한자 같고 지는 자 같고 망하는 자 같은데 하나님의 통치는 그런 방법으로 세워진다고 한다. 욥이 당한 고난은 다만 사탄의 시험과 도전을 하나님께서 받아 욥을 채우시고 높이시는 방법이 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에 우리를 손해케 하거나 망하게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다. 욥은 억울하지 않다는 거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자는 나를 좇을 수 없다는 거다. 권능이나 헌신의 문제도 아닌 정체성의 문제다. 우리는 누구일까. 예수를 믿는 다는 건 무엇일까? 믿지 못하면 평생 불안하다가 끝난다. 안심하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게 된다. 사람의 위대함은 섬기는데 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 확연히 구별되는게 하나 있는데 감수하는 능력이 생긴다. 감수한다는 것은 억울한 것을 삼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나이가 들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거다. 나이가 드는 것은 다만 힘이 빠지는 것이 아니다. 쇠퇴하는 것도 아니며 그냥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영그는 것이다. 드디어 숨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고 나라와 후손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기 위하여 폭풍우 속에 찾아오신다. 네가 당하는 고난과 네가 한 모든 불평들은 하나님의 진정성을 가지고 개입한 폭풍우 같은 간섭이었다. 너 아느냐. 내가 성의를 다하여 내 진심과 모든 노력을 기울여 개입한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너 아느냐, 이렇게 묻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이 예상한 것보다 고전이었다. 연합군은 그날에 상륙해서 육지까지 갈 줄 알았다. 그 때 미군 병사들의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그 병사들이 나중에 나이 들어서 이 고백을 한다. 우리는 그 날 어른이 되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어른이어야만 견딜 수 있는 일을 그 때 겪었다. 열아홉 살이 어떻게 겪었나. 뒤는 바다고 앞은 독일군 기관총이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었다.

에베소서 4장.
13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14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15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16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데 까지 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요구되고 있다. 그러니까 쉽게 뭐라고 하지 말라. 예수 믿는 거 쉽지 않다. 쉽게 충고하지 말고, 쉽게 정죄하지 말라. 쉽지 않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니까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위하여 뭐라고 하는데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분을 믿는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표현이다.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이 길을 못 간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으뜸이 되면 다른 것이 무너진다. 다른 것으로는 확인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유일한 일이 된다. 욥은 그걸 배우는 거다. 내가 당한 모든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사 타협하지 않은 그의 신실하신 일을 배우는 자리까지 가게 된다. 나를 괴롭히거나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준비한 것이며 내가 소원하는 것으로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을 배우는 자리로 가는거다. 그래서 욥기가 길게, 성경 한 복판에 기록되어 있는 거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라. 예수 믿는게 뭔지 쪼끔만 어려워지면 다시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그냥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때에는 딱 의심이 든다. 하나님 뭐하고 계신가? 이게 억울한다. 욥이 내내 그 얘기를 하고 하나님이 이에 대해 답하시는 거다.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것이 유일한 명예요, 자랑이 아니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