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8 장 - 강해 27

2013. 10. 28. 16:08

드디어 하나님이 등장하심. 그러나 만만치 않다. 하나님의 의도와 결과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욥기 38:2 RNKSV)
이건 누구에게 한 말씀 같은가? 얼핏 보면 욥에게 한 말 같기도 하고, 엘리후에게 한 말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한 답은 다음주까지 미뤄놓자.

엘리후의 권면에 이어서, 엘리후의 주장의 끝을 잡고 하나님의 변론을 이어가기 때문에 엘리후의 주장의 연장선인지 대비인지 혼란스럽다. 38 장 내내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너 감히 대들지 마라는 맥락으로 읽혀지기 십상이다. 하나님은 높고 공의롭다. 욥이 틀렸지 하나님이 틀렸을리가 없다는 것은 친구들의 공통적인 흐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너 감히 내게 대드냐라는 맥락이 되어 버리면 세친구가 옳게 되어 버린다. 출3장에서 모세의 경우를 보자.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
모세 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 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출애굽기 3:11 RNKSV)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알지만, 여태껏 침묵하시다가 가라 하면 가지는 건가? 나를 설득하시던가, 갈만큼 준비시켜 주셔야지, 밑도 끝도 없이 가라고만 하시면 납득이 되는가.

욥기 7장에서 욥의 반응을 보자.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욥기 7:17 RNKSV)

욥이 하는 불평이 무언가? 내가 하나님 편을 든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내가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 일에 어떤 차질이 생기겠습니까? 라는 것이 인간의 반응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못하시겠다는 거다.

하나님이 등장하자마자 하는 말씀이, 나는 너를 대장부로 불렀다. 그러니 꼬리 내리지 마라. 라고 말씀하신다.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하는 존재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은 하나님인줄 너는 알아야 한다. 욥아 이걸 봤느냐, 이걸 아느냐. 나는 창조 세계를 만든 이다. 너는 내가 직접 삼은 주인공이다. 창조세계 안에 묶어놓지 않고 창조세계를 만든 이와의 대화자로 취급되고 있다. 욥이 당한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냐. 자연질서의 한 부분과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가 땅에 주초를 놓듯이 내가 이 자리까지 오도록 허락하고 인도한 주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다.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님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 하나님, 내가 누구이며 또 내 집안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나를 이러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주셨습니까? (사무엘기하 7:18 RNKSV)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불러들여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얍복나루 사건은 굉장히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것이 욥기에 이르러서야 풀린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너는 내게 빌고 빼앗아 가야 하는 자가 아니다. 너는 대접을 받은 이스라엘이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게 대답하라. 네 힘만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너는 그보다 크다.

결국 신앙이란 이런 싸움이다. 인생이란 인간이란 뭐냐에 대한 앎이다. 우리의 운명과 영혼이 있느냐. 우리의 이해에 따라 신앙은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현세만 보고 있으면 우리는 예수로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살아 생전에 조그만 부탁 하나 들어주십시요라는 것 밖에 넘어가지 못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보다 더 크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서 15:15 RNKSV)

엘리후가 틀린 지점이다. 아버지가 종에게 하는 것과 아들에게 하는 행동이 다르다. 종에게는 시킬 일을 알려주고 아들에게는 알아야 하는 일을 알려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욥기 42:2 RNKSV)

내가 이제 아버지를 뵈옵니다. 주인을 뵙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이 놀라운 설명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RNKSV)

자기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힘 만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것이라. 그 사람의 성격, 능력, 취향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버지이다.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모든 덕목이 그런거다. 용서해라 기다려라 믿음을 가져라. 왜? 아버지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세상이 되는거다. 고난을 당할 수 있다. 질 수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인줄 아니까. 세상이 최종 심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종 심판자라는 것을 아니까.

이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우리의 생각에서 믿음으로 우리의 생각을 깨고 나와야 한다. 우리의 존재와 삶과 형편을 우리가 하는 하나님, 그 아들을 우리 손에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