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4장 - 강해 25

2013. 10. 14. 22:36

욥기 34장 - 강해 25


엘리후의 지적, 비평, 권고, 책망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네가 당하는 벌은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빨리 용서를 빌어라.


우리에게는 익숙한 사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시다. 엘리후의 책망과 권면에 배경을 이루는 판단, 잣대는 너무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너무나 분명한 분인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심 중에 어느 하나다. 우리가 이해하고 아는 것보다 하나님은 더 크신데, 분명하면 자꾸 아는 것 하나로 제한을 하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이런 내용 살폈다. 진심, 의로운 분노. 기독교는 내가 얼마나 순결하고 사심없는 열정을 가졌는가에 관한 종교가 아니라 사랑의 종교다. 상대방을 끌어안는 거다. 상대방을 기다리는 거다. 진심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 둘의 차이를 알겠는가? 진심이란 것은 자기 하나에 묶이는 것이다. 기독교는 죄인을 위하여 찾아오신 하나님, 하나님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다. 진심을 넘어서기가 대단히 어렵다. 진심이란 말 속에는, 상대방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욕심껏 움켜쥐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심이 없는 것보다 훨씬 크다.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엘리후의 사고는 옳고 그름으로 나뉘어 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실패와 성공, 회개와 고집, 이것들이 둘로 나뉘어 있다. 

엡1장 7절~

7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8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9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10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창22장 - 아브라함이 아들을 잡는 장면

 12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낳을 수 없는 아들을 낳게 해 놓고 잡으라고 하시는 건 무언가? 이 사건을 아브라함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로 끌고 가지 말고 하나님으로 시선을 옮겨보라. 아들을 낳을것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웃었다. 그렇게 낳은 아들을 잡으라는 거다. 우리에게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이 결코 묶일 수 없는데, 사망과 생명은 분명히 이분법으로 나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용서와 회복, 부활이 예수 안에 있다. 엘리후는 끊임없이 이분법으로 나누는 일을 하고 있다. 욥은 모르고 있었다. 욥은 자신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회개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주고 잡으라해서 이 문제의 해결 열쇠가 된다. 그런데 욥은, 없는 아들 잡으라고 하는 격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시는 줄 알게 하려는 거다. 우리는 이삭이 없을 때 아들 잡아라 하면 웃을 거다. 주고 나서 잡으라고 해야지. 준 다음에 잡으라고 하면 이번엔 너무 한다고 할 거다. 왜 줬냐고 할 거다. 이런 싸움이다.


마16장

15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17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18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 난 죽을 것이다.. 이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22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교회 권세의 주인인 예수가 죽을 것이다라고 한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게 하겠다는 베드로에게 사탄아라고 말씀하신다. 정신이 없다. 예수님의 사역이 얼마나 큰 일인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24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엘리후에게 있어서 나뉘었던 성공과 실패, 생명과 사망이 예수 안에서 묶여 있다. 어느게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걸 묶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걸 통일되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고 하신다.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자신을 위해서 이 말을 기억하라. 우리는 자책감이 들 때, 제일 불안하다. 지금 그 얘기 하는 거다. 베드로가 사탄이 되는 거다. 


그러나 그 이름,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는 약속이 유효하다. 어떡할 것인가? 우리가 믿는 기독교라는 건 정말 위대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빌2장 - 예수그리스도 찬가

 6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건강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 무서워서이다. 뭐가 무섭나? 밀린다. 부끄러워지고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에게 중요한 고통은 스스로가 가지는 것 아닌가? 인생, 인간됨 자체에 대하여 깊은 허탈감이 드는게 가장 무섭다. 세상과 사람들에 의해 지적받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가 스스로의 존재감과 가치에 대하여 잡을 게 없는거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우리를 죽음의 자리까지 좇아 들어오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하신다. 여길 놓치고 있다. 여길 놓치고 있으니까 우리가 하는 기도가 끝없이, 하나님을 다시 찾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 


이삭을 낳게 하는 하나님, 이삭을 잡게 하는 하나님, 그것을 통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걱정 마라고 하시는 하나님, 언제든지 너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도 있고 거둘 수도 있는데 주는 것만큼이나 거두는 것도 복이다. 예수를 보라.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이게 말이나 되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 모두가 무릎을 꿇게 하시고.. 비난, 절망, 실패, 용서할 수 없는 최고의 죄가 예수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우린 좀 더 나은 사람들 아니다. 모든 무릎을 예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주라 시인하여 영광을 돌리게 하셨는니라. 이 부분이 엘리후에 의해서 닫혀 있는 거다. 그걸 여는 거다. 욥기가.


로마서 4장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4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15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율법은 잘잘못을 나누는 경계선. 믿음과 사랑은 그런 경계가 없다. 다 끌어안는 거다. 내가 왜 손녀딸을 사랑하는가? 나도 모른다. 사랑이, 믿음이 뭔지 아는가? 이 경계를 넘어서는거다. 경계와 조건 없이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거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세운 거다. 아브라함을 세우자 아무도 할 말이 없어진거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거다. 그 영역 밖에 나가있는 사람이 있나? 우리 중에? 없다. 이 안에 안 걸릴 사람이 없다. 난 잘 했어. 잘 한게 뭐야? 그런 사람까지. 잘못한, 그래 나는 베짱이다 까지. 무에서 유를 만들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서 아브라함이 누구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증거로 삼으시는거다. 이거 아니면 예수 믿는거 헛거다. 우리가 우리에게 만족하는 그런 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 아니다. 살려달라고 부르는거다. 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하나님이다. 옛날에 아브라함을 세워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로도 부를 수 있는 거다 하나님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나? 다 해보라. 누구라고 부르라 했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그럼 끝이다. 


욥기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는가? 신앙의 고백, 예수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얼굴 펴고 돌아가길 바란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