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22장 - 강해18

2013. 9. 16. 18:14

욥기22장 - 강해18

욥과 세 친구의 대화 3회전.
엘리바스의 주장

삶이 어려워보면 맨 처음 생각나는게 뭐겠나. 내가 뭘 잘못했기에?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양심 때문이다.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진리가 맞물려서 일반인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보다 더깊은 정죄감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기독교 신앙이 대한 생각 한 가지, 절대적 규칙을 지켜야 한다. 십계명. 원수 사랑, 이웃 사랑 등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서 잘했다 못했다로 자기에게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방법이다.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타인에게도 일단 지켜야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있다. 또 하나는 진실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의인이 없다. 모두가 잘못이 있고 죄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겸손해야 하고 자신의 약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에 타협점이 없다. 균형을 잡으려고 하면 틀림없이 자기에게 좋게 쓰려고 할 것이다. 타인에게는 엄격한 기준, 자신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수준.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성경 안에서 동일하게 주장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부름과 인간의 한계, 용서와 구원이 필요한 부분. 성경에서 동등하게 제시되고 동등한 현실이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리며 균형있게 잡아야 하는 것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 죄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다. 죄란, 하나님을 인격으로 이해하지 않고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죄란 형태를 가지지도 않고 규칙을 가지지도 않고,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을 말한다. 바울, 롬7장에 의하면,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고백은 스스로의 고백이다. 그가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것이다. 예수께서 그 길을 가로 막은 것이다. 빌3장에서 주장하는 자신의 과거는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를 멀어지게 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죄의 경향은 어디에나 따라들어올 수 있다.

마6장의 가르침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구제. 나에게 구제할 때 그 앞에서 나팔 불지 마라. 숨어서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로이드존스이 산상 설교에 한 일화를 들고 있다. 총회를 하는데 몇날 며칠 합숙한다. 어른 목사님 한 분이 12시가 되더니 나갔다. 다음날, 다음날도 그 시간에 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 분은 12시만 되면 은밀하게 기도하러 나간다는 것이었다. 12시가 나팔이 되었다. 목사님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정치는 가장 고급한 책임과 지위다. 가장 큰 권력을 지는 것이다. 책임을 지도록 말이다. 우매한 백성들이 깨닫지 못하는 일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다. 백성을 잘 달래서 일하도록 해야 한다. 역사상 가장 잘 한 사람은 처칠이다. 반대편 당원이 처칠을 비웃기를 내가 당신 부인이라면 당신 마시는 차에 독을 넣겠소. 처칠의 응답은, 당신이 내 아내라면 그 잔을 기꺼이 마시겠소.

독일과 싸우는데 매일 이기고 있다고 했다. 결국 이겼다. 그 과정은 처참했지만 말이다. 우매한 백성을 속여서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을 쓴다는데 정치에 대한 우리의 환멸이 있지만 그것과 진짜 실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굴 뽑으란 말인가. 나를 뽑아야지 ㅋㅋㅋ

각오, 희생, 사랑이라는 모호한 명분 위에 자신의 주장의 터를 만든다. 기독교라면 이런 정도는 넘러서야 진실된 것 아닌가, 솔직하게 고백하고 무릎 꿇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것을 주장할 뿐인데 정작 사람들은 죄를 놓치고 있다.

최고의 명분, 최고의 실천에 죄가 따라와 그것을 부패시킬 수 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수 있다. 어느 쪽 주장을 하던지,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가, 멀게 하는가를 보라. 여러분이 하는 기도를 잘 생각해보면, 다시는 하나님을 찾을 필요를 없게 해주십시요 라는 기도다. 하나님을 찾아올 필요가 없는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겠나.

세 친구들의 주장이 그거다. 하나님이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일을 도모하고 있다. 욥의 절망과 억울함이 하나님의 면전으로 인도하고 있다. 세친구는? 자신들의 정답을 도모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면전에 갈 일을 없이하고 있다.

기도할 때 너무 닦아내지 말라. 회개의 말을 너무 쉽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가지 않을 일을 만들고 있다. 세리의 말을 보라. 아버지여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죄를 낱낱이 까발리면, 기도가 중단이 되서 눈을 뜨고 쳐다보게 된다. 이 사람은 왜 공중 앞에 서서 하나님을 불러모시지 않고 피부를 뜯어내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생에서 하나도 흠잡힐 것이 없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만들려고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에게 독립을 허락하시지 않는 하나님인 것 분명히 해야 한다. 나랑 살자 이다. 나에게서 도망가지 마라 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망가려 한다. 기독교 신앙이 자기 치장에 불과해 진다니까.

또 하나의 결벽증이 있다. 원천봉쇄.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 안 하는 것이다. 무자식이 상팔자.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일을 안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신분으로 요구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자녀는 약한만큼 사랑을 쏟게 된다. 손이 많이 가는 자녀를 사랑하게 된다. 목사는 어떤 성도를 사랑하게 되겠는가.

장애아를 가진 부모를 만나 봤는가. 후회 안한다. 포기 안한다. 부모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와 같다.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모든 정황을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셔서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자신의 보호와 능력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 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 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6:1, 2, 4-11 RNKSV)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말. 각 교파들이 성화를 이해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능력, 행위, 도덕적 영적 성숙으로 설명하는데 비해서 개혁주의는 성화를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푼다. 우리 생각에 성화를 논하면서 그리스도의 연합이라 정의하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수준을 떠올리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족한 현실로 인해서 우리가 저지르는 부족과 실수를 예수님이 묶었다는 것이다. 성화는 나아지고 안 나아지고와 별개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혼자가 아니란 거다. 예수께서 어디로 붙들려 오시냐 하면, 어떤 왜곡,어떤 분노에까지, 어떤 순간 경우에도 우리를 당신에게서 분리시킨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지금 욥기 속에서 이런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 친구는 잘못했으니 분리되었고 잘해서 연합해라인데 욥기는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니까 창조를 해놓고 실패할 리가 없다. 내가 죽음을 요구하고 있는데 창조주로서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 아니냐. 어두움과 고난과 절망에서도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신비를 알고 싶다는 대주재로 부각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잠시 받는 고난이 우리의 중한 것을 만들어 낸다.

어느 때에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알고 든든히 믿음으로 이겨내라.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신비함이 승리로 종합되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때는 절대적인 규칙으로 선언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때는 진실된 고백과 믿음으로 나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여러분 주변의 누구를 향하여, 내가 사는 시대 환경 현실, 내가 처한 경우,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짐을 지게 만드는 우리의 짐들 불확실한 운명까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케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도망가지 말고 덤벼야 한다. 고함질러 쫓아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넉넉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겨내야 하는 것도 있고 감당하고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렇게 가지 못하면 늘 와서 절대적인 규칙 혹은 진실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로 싸우다 끝이 나고 말 것이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