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 11 - 욥 14장
2013. 8. 18. 08:41욥 14장
욥이 당한 까닭없는 고난
사단과의 내기에서 하나님의 멍예를 욥에게 거셨다는 것
세 친구는 하나 같이 인과응보의 원리대로 그의 현실을 분석하고 해답을 제시
욥은 친구들의 모든 제안에 반대. 이것은 인과응보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다.
이 점에서 정면충돌
1-6절. 나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내가 좀 잘못했더라도 하나님이 화를 내시겠습니까?
7-12.
13-17. 하나님 그냥 넘어가게 해 주세요. 하찮은 인생인데. 뭐하러 일일이 찾으시고 확인하시고 짚으십니까.
이런 것들 외에는 할 말이 없는 넋두리, 비명.
18-22. 저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자폭 직전에 와있습니다라는 절규
이런 표현은 우리에게 낯설다. 성경은 규범적이고 명확한 가르침과 내용으로 되어 있을거라 믿고 있지, 이런 비명, 넋두리, 자폭 같은 얘기들이 등장할거라고는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둘러 세 친구와 같은 입장, 방법을 취하게 된다. 빠른 결론이 나와야 하고 내가 뭔가를 하려고 전전긍긍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서둘러 정답을 외친다. 울 시간을 안 준다. 그늘이 있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신앙을 떠나서 보편적으로, 예술작품에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 실존적인 한계와 나약함, 허망함을 깨닫고 인생의 버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경외감을 느낀다고 한다.
권총 자살한 고흐가 그린 그림에서 너무나 열정을 느낄 수 있다는, 그림과 그 인생의 대조적인 모습. 그런 고뇌가 자폭적 광기로 가지 않고 예술작품이 되는 그 신비를 경이롭게 느낀다는 거다. 무엇이 그 사람이 가졌던 한계, 눈물이라는 것. 눈물은 기쁨이든 슬픔이든 벅찰 때 나온다. 너무 기뻐서 울고 너무 슬퍼서 운다. 패배자라거나 연약함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것들이 자기 이상의 것들을 누리고 있다는 표시.
욥이 만나고 있는 이 비명들은 모두 가장 중요하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경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여 터뜨리는 감탄사인 것이다. 절망이든 감동이든 그렇다. 우리의 한계를 벗어난 무엇과의 만남.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우회적이라서. 인간이 인간에 불과하지만 인간이 인간 이상이라는 것을 누리게 해주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정답을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회적이지 않고 언제나 직설적이라고 한다. 지옥 가도 괜찮겠습니까? 라고 들이대는 바람에 오해를 사고 있다. 성경이 이 긴 장을 할애 해서 이 넋두리를 성경으로 담고 있다.
정호승의 시에서 그늘을 말한 것처럼, 햇볕이 무엇을 가로 막고 생기는 이 그늘은 식물을 말한다. 잎새 사이로 한 그루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은 그 큰 나무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해의 놀라움은 자신의 광명 정대함을 넘어 짙푸른 녹음을 만들어 해의 영광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름 받은 영광은 늘 밝고 확실하고 정답이 있는 것보다 더 깊이, 고뇌하게 하고 자신의 한계 밖으로 떠 밀리는 위기와 고난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다루어 내고 있다.
고흐가 그의 광기를, 귀를 자르고 권총 자살을 하는 자폭적 광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에너지로 전환했다는 것. 그 광기적 인물과 그림이 연결될 때 그 놀라운 존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욥기의 이야기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로, 믿음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는 것이다. 욥의 비명의 놀라운 점은, 나는 나의 한계를 보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채울 수 없고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 가진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반대로 필요한 것을 다 채운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 자체가 물질적이지 않고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물질을 통해 잠깐의 기만, 스스로를 속인다. 자신의 존재를 끌어안아야 할 깊은 질문을 방해하거나 우회하게 한다.
해외 도피, 업적, 상대방 교훈 등은 자신의 질문을 우회하려는 수작에 불과하다. 나 또한 여러분 성도를 데려다 놓고 우회하고 있다. 하나님 외에는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으로 가는 길목이다. 하나님은 우리 필요와 행복, 구원을 주시는 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욥이 그 인간의 한계를 보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 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일 수 없다는 고백은,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성경이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정보와 지식이 아닌, 영적인 관계를 말한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 뉴스 앵커를 맡고 싶어하는지 지방 방송 담당 짐캐리. 내가 널 만들어서 잘 알지. 작은 자로 즐겁게 사는 자로 해피엔딩.
하나님은 실제로, 위대하고 짙푸른 녹음 안에 다만 햇볕이 차단된 것이 아니라 무성함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이 그 한계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의 그 부르심, 하나님이 하나님 다우심을 만나는 그 경이, 그리고 그 고통. 왜 고통인가. 벅차니까.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 일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대강 만들고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욥기다. 우리는 모두 이 부르심 앞에 서 있다.
벧후1장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후서 1:2, 3 KRV)
분명한 것, 확인되는 것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제한하고 있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의 틀이 깨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이 못 박고 나서야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창조와 구원의 문제가 얼마나 큰 것이며 당신의 피와 살을 내주시는 방법을 택했다. 그걸 기억하는 우리의 삶과 현실 속에서, 우리의 힘듦을 하나님이 우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삶에서 끊임없이 발견하는 인생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