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강해10 - 욥13장

2013. 8. 13. 15:18

욥기강해10 - 욥 13장

소발의 충고를 이전에 봤다. 소발은 하나님의 신비를 일컬었다. 인생무상이 나왔다. 우리는 어떤 일도 하나님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

13장 초반.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나에게 가르치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좋은 명분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너희가 아는 것에 나를 끌어들여서 나를 잠잠하게 만들고 너희를 좋게 만들어 하나님 아는 일을 그치게 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이건 하나님께 물어야 되는문젠데 너희가 이 일을 덮으려 하고 있다고 주장.

20세기의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복음 교회의 부흥이다.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장로교회가 강하고 이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갑자기 순복음교회가 나타나서 잘 되자, 순복음을 이단으로 몰았다. 이단 논쟁이 한참 붙었다. 그러고 여러해가 지나서 비로소 인정했다. 한국 교회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인정이었는데 뭘 배웠냐면, 하나님은 장로교보다 크다. 이거 배우는데 한 세기 걸렸다.

로이드존스 목사가 성령사역에 대해 쓴 글이 있다. 그는 극보수파 중에 한 사람으로서 이런 신비주의에 대해 반대 입장에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말했다. "우리 장로교는 생명력이 없어지지 않았냐, 재미없는 교리만 남지 않았냐. 사실 순복음 너희는 내용이 없지 않느냐. 서로 싸우지 말고 도움을 서로 얻자." 솔직하고 겸손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 장로교가 순복음 교회를 용서(?)하고 용인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한게 무엇이 있는가. 그 동안 성령세례를 장로교 교인들이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또 하나의 신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욥이 하는 얘기가 이거다. 너희가 아는 것보다 크다. 하나님이 나에게 듣도보도 못한 일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이 어찌하시려는 건지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을 수 밖에 없다고 된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동안 많은 신앙의 도움을 받을 무기들이 있다. 성경, 기도, 교회, 유산이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각 개인은 자기가 겪는 경험이 유일한 것이다. 내용으로 따져들어가면 공통된 것이겠지만 나타나는 현상과 모습, 경험은 세상 역사 온 인류를 통틀어 나라는 독특한 개인에게 독특한 경우 속에서 독특한 모습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옆에서 나도 알아 라는이야기를 듣는 게 제일 싫을 것이다. 그러나 듣고 보면 공통된 하나님에 대한 앎이겠지만 그 독특성은 각각 다르다.

겪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위기감을 느끼고 낙담하고 초조하고 두렵다. 답을 내는 사람은 내가 울부짖기 싫어서 자기가 울부짖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윽박지르고 남에게 강요한다. 나쁜 신앙이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다. 스스로 먹어서 소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모든 것이 그렇다. 교회 안에서 제일 골치 아픈 사람들이 이 세 친구다.

기다려 주지 못한다.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고통은 잘못을 기다리는게 아니다. 한 사람이 완전해 지기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욥은 지금 뭔지 알 수 없어 한다.

세 친구는 자기의 일이 아니니 자기가 아는 이야기 밖에 할 수 없다. 욥은 자신의 문제이므로 죽음을 무릎쓰고 주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좀 입을 다물고, 내가 말할 기회를 좀 주어라. 결과가 어찌 되든지, 그것은 내가 책임 지겠다. 나라고 해서 어찌 이를 악물고서라도 내 생명을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셔도, 나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내 사정만은 그분께 아뢰겠다. (욥기 13:13-15 RNKSV)

모든 사건의 주권자라는 거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나아가 물어보겠다. 세 친구는 목숨을 걸 일을 할 이유가 없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욥은 살아있어도 죽을 것 같다.

하나님은 누구시며 나는 하나님에게 누구입니까를 물어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욥의 시작에서 사탄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까닭없이 욥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욥을 놓고 사탄과 하나님이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명예를 하나님이 방어하지 않고 그것을 인간에게 넘겼다. 하나님 앞에 그의 자녀라 불리는 성도의 지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싸움을 욥에게 넘겼다. 인간의 가치가 그 싸움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저는 썩은 물건과도 같고, 좀먹은 의복과도 같습니다. (욥기 13:28 RNKSV)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다. 나 같은 건 별 거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이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쇠퇴해 갈 소진될 존재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쇠퇴하거나 낡아가는 하나님일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만나자는 거다. 날 살려 달라는 것 아니고 회복시켜 달라는 것 아니다. 만나자는 거다. 내 경험과 이해가 크다는 도전을 받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다만 내가 안전을 위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하나님도 하나님이 아니고 나도 내가 아니라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냐의 문제로 들어오자 고통을 잊고 잘 되는 것이 문제의 답이 아니라는 거다. 인간이 스스로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거다. 문제의 해결 능력보다, 갈증이 더 크다. 이 갈증을 해결하는 하나님이 있지 아니하면 우리의 존재가 무가치 하다.

하박국 2장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박국서 2:4 RNKSV)

기독교를 대표하는 두 단어를 알고 있다. 믿음과 사랑. 인격적이라고 누누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안전에 목을 맨다.

김혜자씨가 늙어 아프리카에 가서 돕는 일을 한다. 이것에 대한 동영상 나온다. 후렴구에 인생 별 거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계속 그런 말을 하는게 나온다.

사람이 늙으면 건강할 수 없다. 늙었는데 건강하란 말은 정신없는 말이다. 늙으면 건강하지 않다. 내 앞에서 빌빌 거리지 말라는 말로 들어야지. 늙으면 외롭다. 싱싱하지 않다. 잔소리를 하게 된다. 나이든 사람끼리는 지혜라 하지만.. 입다물고 어떻게 있겠는가.

그 때쯤 되면 이말을 알게 된다. 인생 별 거 아니라는 것. 하나님이 인생에게 준 이 한 80년이라는게 정말 짧은데 뭘 배우게 되냐면 인간에게는 깊은 욕구가 있는데 이걸 인간이 스스로 채우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뭘 덧붙여야 하냐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다.

하나님 외에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해결 방법이 우리 인간에게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명예를 우리 어깨에 얹어놓으셨듯이 우리 가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건 죽음 만도 못하다. 하나님 나를 놓아두시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답한다. 그래 나는 안전체계, 보상이 아니라 너희는 내 자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원칙으로 살거나 이해관계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 생활 하다보면 가장 급한게 뭐냐 학연, 지연이다. 그걸로라도 묶어서 의지할 데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관계를 요구하신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예수 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복음서 17:1 RNKSV)

십자가를 말한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인데 그 얘기가 이렇게 연결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7:2 RNKSV)

다스리는 권세를 십자가로 집행한다. 그리고 영생은,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7:3 RNKSV)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욥의 고난은 무엇일까. 고난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 부정 속에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상대를 잡아먹지 않고 나를 위하여 나를 내어주는 방식, 방법이자 성품인 것.

나는 섬기러 왔노라. 나는 종으로 왔노라. 나는 죽으러 왔노라이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고난속에서 드디어 밝혀지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 나를 위하여 이웃을 잡아 먹지 않는 것.

십계명에 나오지 않는가. 이웃을 잡아 나를 채우지 않는 것.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고난이 싫지만 고난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이 일을 훈련할 수 없다. 고난의 영광과 위대함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핵심된, 주인이신 하나님이 예수가 주인이 되어 내가 죽는 걸 경험해야 한다. 세친구가 뭐라고 하는가, 나 편하게 너 입다물라 아닌가. 교회에서는 신앙이란 이름으로 갖다 건다. 자기가 죽어야는데 말이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 현실은 왜 고단한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영광을 채우시기 위해 유일한 길로 인도하시는 거다.

죽어 나가면 인생 별 거 아니예요와 예수 믿는게 정말 복이구나가 한 쌍으로 다닌다는 것을 증언한다. 이것이 힘이 되면 겁날 것이 없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