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9 - 욥12장

2013. 8. 12. 14:57


세 친구들에 대한 전체적인 반론
너희가 하는 말, 나도 안다. 착하게 살면 복받고 죄지으면 벌받는다. 하나님을 욕하지 말라. 나도 다 아는 내용이다. 다 아는데 그것으로 답이 안 되는 길로 붙들려 가고 있다. 이 상황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내가 어려움을 당해보니 답이 없더라. 세 친구와 욥의 입장 차인거다. 자신이 기대한 답을 안 주신다. 욥의 경험,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하나님이 우리의 이해보다 크다. 다만 성공, 다만 평안이 기독교의 가치가 아니다.

강도들은 제 집에서 안일하게 지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도 평안히 산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까지 자기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다. (욥기 12:6 RNKSV)
친구들이 추궁하는대로 답하자면 여우보다는 곰이 항상 옳아야 하는데 도둑 같은 여우가 더 평안하지 않냐는 말로, 즉, 세상의 만물도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

이와 더불어 만물의 동물도 보라고 한다. 간교한 동물이 더 잘 살지 않느냐.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아니냐고 말한다.

가뭄 때문에 먹을 풀을 찾아 이동을 하는 누떼와 얼룩말 떼 등이 있는데 악어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약한 것을 덮치지 않는가. 하나님의 허락없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없는데 정직하고 순진한 것이 보상을 받더냐.

귀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혀가 음식맛을 알지 못하겠느냐? (욥기 12:11 RNKSV)
산지 사방에 깔려 있는 증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틀을 허문다.

노인에게 지혜가 있느냐? 오래 산 사람이 이해력이 깊으냐? (욥기 12:12 RNKSV)
그래서 오래 살아도 뭐가 뭔지 모르게 된다고 한다.

능력과 지혜가 그분의 것이니, 속는 자와 속이는 자도 다 그분의 통치 아래에 있다. (욥기 12:16 RNKSV)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옳은 길로 이끌어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때에 왔다. 기도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결과를 뒤집어 쓰는게 우리 인생이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손해보도록 하지 않는게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어둠 가운데서도 은밀한 것들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조차도 대낮처럼 밝히신다. (욥기 12:22 RNKSV)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을 몇 가지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다만 능력에 묶여 있고 잘잘못에만 묶여 있다면 우리는 항상 불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살아남았느냐, 비참하게 죽었느냐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다. 대평원을 비틀거리며 걷는자와 같다. 일직선으로 걷는게 아닌, 비틀거리며 걸은 자에게 밟은 그 모든 땅을 주는 것과 같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할 수 없어 고단해진 욥은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말하지만, 그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모든 일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법칙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인격과 인격에 대한 관계이다. 대등한 인격적 관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과 그 관계의 대상인 성도를 말하는 것이다. 잘잘못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큰 하나님을 보자는 것이다.

사탄은 2장까지 등장하고 끝. 사탄이 할 수 있는 것은 부정과 거부이다. 욥의 가치는 자신이 겪는 일로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 묻는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해결의 일로 아우성, 변화, 신비로의 내몰림에 대한 이야기다. 욥의 분노 속에 세 친구를 향하여 이것이 있다. 너희가 친구라면 나와 대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해 줘야 하는데 너희는 나를 판단하며 지배적인 입장에 있으려고 한다.

신앙 생활에 아무런 갈등과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다. 고통이 없고 형통이 없고 자존심세우는 것. 그러면 있으나 마나이다. 인생에 있어서의 고통은 자기만의 고통이 아니다. 관계 맺은 사라들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한 고통이란 것이 존재한다. 사탄은 고통이 없다. 세친구들도 욥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해관계와 잘잘못을 떠나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써 욥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주인이 되지 않고 옳은 것이 주인이 되어 잘잘못을 따지고 있다.

교파가 왜 갈리나. 끌어안는 싸움을 하지 않고 잘잘못을 따지는 싸움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른이다. 젊을 때에는 내가 다른 주장을 해도 그 위에 어른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끼리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데 늙어서 내가 다른 주장을 하면 파가 갈려버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 주장이 없다. 애매한 편을 선택하게 된다.

모든 일에 맞고 틀리는 것이 최우선이라서 잘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깨뜨리는 일이 종종 있다. 너희는 그것이 친구 사이에 가지는 신의냐라고 욥이 되묻고 있다. 인격과 인격 사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말한다. 그게 욥기다. 세상에서 가장 비난 받고 천대 받는 조폭들도 이 덕목하나 만은 지켜야 한다고 한다. 신의. 최소한의 덕목이 없으면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 때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선호가 다르기 때문이다. 신의가 없으면 인격이 가지는 최소한의 이해관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늘 두려운 이유는 잘잘못이 늘 주인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잘잘못에 대한 것도, 유능함에 대한 것도 아니다. 떼 쓰는 것이다. 우리는 멋대가리 없이 피도 눈물도 없이 옳은 말만 지껄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겪는 고난과 막막함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겁날 게 없을 수 있다. 어떤 걸 갖다대든, 신앙, 헌신, 진심을 갖다대든, 그것이 인격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지, 인격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을 다 죽이게 된다.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집중하고 매달린다. 세 친구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해를 세 친구 속에 가두려고 한다.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게 뭐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거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거라 믿고 기다리는 거다. 왜 그러신가, 어떻게 하시는가는 사실, 2차적인 내용이고,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선하시다는 것이 우선이다. 하나님이 믿을만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믿지 못하고 방법, 환경, 조건, 그리고 주인 없는 말들 - 사랑, 헌신 등등을 내세워 판단하기 시작한다.

세상에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들을 바치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이 아들을 바치라는데 멘붕이 오지 않았겠는가. 거기에는 욥기를 읽어야만 단서가 있다.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틀, 죽음을 넘어 와라는 그 도전에 응한 거다. 아브라함은 욥이 가졌던 이 고뇌를 얼마의 기간 동안 했을 것이다. 거기를 넘어 나와 드디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큼을 그의 생애와 현실에서 경험한 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했을 것이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