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6-7장

2013. 8. 6. 22:23

욥 6-7


나귀가 울고 소가 우는 것은 배 고파서 우는 것이지 그냥 우는 것이겠느냐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3:20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느냐


마음의 맛이 쓴 자에게. 맛을 주심.

욥이 하는 말은 모두 감당할 수 없는 고난, 고통을 말함.

6: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겠는가.

나를 빨리 죽여달라는 말이 된다.


욥이 그가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여 당하는 고통은 아니라고 끝까지 그 부분은 욥이 자신있게 주장을 한다. 친구들은 네가 고난을 당하는 걸 보면 그것은 하나의 형벌이다. 잘못해서 당하는 벌이라고 하는 것이고 욥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친구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가 저들의 질서 체계는 인과 응보의 체계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것이다.


욥은 시작부터 무흠한 자, 완벽한 자로 애초부터 설정되었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이 부분이 욥기의 핵심이다. 그가 당하는 핵심은 무엇이며 왜 그렇게 되었는가. 친구들은 자꾸 잘못 짚는 것이다. 도덕질서의 견고함이라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1차 틀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 욥기다.


엘리바스는 계속 욥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 있다.

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죽이느니라.

니가 어렵고 화가 나니까 생각없이 지껄이면 안된다.

4:3 보라 네가 전에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진 자를 강하게 붙들어주었고..

너도 옛날 이 도덕 질서 속에 있지 않았느냐 니가 그것을 경계하지 않았느냐.에 대한 답이다. 

5:17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


도덕질서의 체계 속에서 계속해서 욥을 교훈하고 책망하는 중, 그러나 욥은 끊임없이 그 문제가 아니라고 답하는 부분이다. 내가 죽겠다고 하는 것은 자폭이 아니고 내 잘못을 끌어안고 회개하지 않고 죽어버리겠다는 고집이 아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데, 이해하는게 급선무가 아니라, 참을 수 없어서 그런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내가 예전에 했던 신앙의 도덕질서 체계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법은 외적 강제력이다. 도덕은 내적 강제력이다. 인간이 가지는 인간의 가치와 명예에 대한 내적 동기이다. 도덕은 강요할 수 없다. 도덕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강요하지 않는 한 동력을 받을 길이 없다. 욥이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내 속에 동력을 받을 길이 없다. 그러니 내가 죽겠다고 하는 것을 너희는 탓하지 말라.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저버리지 않고..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는 구나. 얼음이 녹으면.. 더우면 없어지나니.. 


물은 마르더라. 

너희는 내가 낙심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고 나에게 답하지 않아서 쩔쩔매고 있었더니 너희는 친구였던 최소한의 책임을 버리고 잘도 와서 정죄하는구나. 말라버린 물 같구나. 얼음이 녹아서 말라버린 것 같고 그 자리도 없어져서, 대상들, 사막의 길을 가는 큰 장사하는 자들이 물을 찾는다. 물을 찾아 헤매다가 못 찾아서 죽어가는 것 같고 대마의 떼들, 대마는 지명인데, 위에 있는 대상들인 것 같고, 스바의 행인들도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물 찾아 헤메다가, 바라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한다. 너희는 꼭 그 꼴이구나. 라고 친구들을 나무라는 장면이다. 이제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내가 언제 무엇을 달라고 했느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라 했느냐. 너희가 어쩌면 그러냐. 니들이 나를 동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예수 믿으면서 보는 가슴 아픈 일이 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보면 불쌍하다. 욕할 필요 없고 정죄할 필요 없다. 우리는 예수 믿은 것을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자랑할 게 없으니까 부정적으로 확인하기 시작한다. 신앙 생활을 잘 못하는 자를 꾸짖어서 확인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교회가 재미가 없다. 


내가 하나님한테 쫓겨났다고 하자. 그럼 끝장난 건데 왜 나한테 난리를 치냐. 예수를 믿으면 왜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가? 왜 그렇게 사납고 못 살게 구는가? 욥의 친구들의 말들이 틀린 것도 없지만 맞지도 않다. 욥이 당하는 억울함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 생활 하면 욥의 말에 대해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의 신앙은 무엇으로 내용하고 있고 스스로 확인하고 있는가. 내 신앙의 동력, 내 안의 자랑이 무엇인가 확인해야 한다. 나를 가르쳐서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해보라. 너희는 고하를 논하고 친구를 팔아먹는구나.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는가. 


나 좀 봐다오. 내가 비명을 지르고 절규를 하는데 와서 말이, 어법이 맞느니, 맞춤법이 맞느니 할게 무어가 있느냐. 게다가 내가 틀리지 않았다. 너희가 틀렸다. 도덕질서에서 내가 벗어나지 않았다. 이 고통이 왜 왔는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사실 나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 보다는 내가 더 많이 안다. 


잘못하다간 기본틀만 깨놓고 고급한 틀로 못가는 수가 있다. 도덕질서라는 분명한 1차 틀이 있는데 이보다 더 나가야 하는거다. 


7장.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날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나의 눈이 다시는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간 자는 다시 오지 못할 지니, 자기 처소를 다시는 알지 못하리이다.. 지금 욥은 친구들의 힐문에 답하다가 돌아선다. 저들에게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한다. 


하나님, 인생은 고달픕니다. 하나님이 고달프게 하셨습니다. 전쟁 때와 같고 품꾼이 일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빨리 끝내주십시오.


넌무 힘들어서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라는 내용이다. 진전된 내용은 없다. 알게 된 건 없는데, 일단 고통이 너무 심해서 입 다물고 참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가 참을 수 있었다면 1단계 틀을 깨고 2단계로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괴롭지만 복된 일이고 이것이 욥기의 가치이다.


신앙 생활은 다만 죄짓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다만 유능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욥기가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바다괴물 - 세상의 혼돈과 재앙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뜻,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내가 무슨 사고를 칠까봐 걱정을 하십니까? 잠을 자면 고통의 시간이라도 잊어질 텐데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한다.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길 원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고달픕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면제 시켜 주려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건 욥기에서만의 주제가 아니다. 


로마서 5장을 찾아가 보면, 5:1 이하에 중요한 주제들이 있다.

1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2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면제 시키는 것에 관심이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정했느니라. 우리는 현실적 보상을 성급히 기대한다. 우리를 위하여 보내시고 죽이실 수 있다면 현실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 그 아들을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으로 구원을 받으리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구원을 받을 것이라.


환란을, 예수의 죽음으로 시작한 구원과 영광된 약속의 사이를 우리를 승리케 하기 위하여 부활하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의 개입으로 이기느니라라고 말을 해야될 만큼 신앙의 현실은 어렵다는 것이다.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 신앙이 뭐냐는 문제는 최고의 관심사였다. 가장 크게 강조된 것은 어느 때나 내세적인 것이었다. 죽어천국, 지금은? 전도하자 믿음을 지키자. 전도하자는 부흥 시대에 나온 것이고 믿음 지켜 죄짓지 말고 잘 버티다가 잘 죽자는 때도 있었다. 미국의 부흥 시대에 천막을 치고 말씀을 듣던 때가 있었다. 천막 안에 쭉 의자를 놓고 가운데에 톱밥을 뿌려놓는다. 질척거리지 말라고.


말씀 끝에 예수를 영접할 사람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톱밥길을 걸어 나간다고 한다. 그렇게 영접받고 천막 밖으로 나가다가 트럭에 치어죽는게 가장 큰 복이라고 했다. 살아 생전에 신앙이 무슨 복인가. 그게 욥기다. 욥은 계속, 나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죄 지은 것 없다. 그러니 빨리 죽여주시옵소서가 다다. 그런데 안 죽이시는 거다. 살아서 두 배의 복을 누려야 한다. 그럴려면 고통의 과정을 지나가야 한다. 그게 이 싸움이다. 


7:16

17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18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19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20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21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숨져 흙 속에 누우면,

주님께서 아무리 저를 찾으신다 해도,

나는 이미 없는 몸이 아닙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두사. 중요한 구절이다. 시편 8편에 가보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며 원수자들과 권능자들로.. 이 구절을 반어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인간의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 찬송한다. 얼마나 높고 귀하게 만드셨는가를 감탄하고 있다. 욥기 7장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순간마다 단련하시는가...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둘이 묶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짐이 되는 때가 있다. 쉽게 살게 해 주십시오. 해 끼치지 않고 손가락질 받지 않고 착하고 명예롭게 살다가 죽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렇게는 못한다가 욥기다. 


그 정도로 내가 너희를 만들지 않았다. 그 내용이 우리의 것이 되기 까지는 우리가 도덕적 질서 체계에서는 공감했던 것.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이제는 욥기를 따라가면서, 그 이상의 하나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까라는 공감과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가 아는 상상과 소원의 최고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적 기뻐하시는 자리, 거기를 가려면 우리는 환골탈태해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말과 법칙으로 되지 않고 성자 하나님이 와서 죽으셔야 했던 방법으로 이뤄지고 있다. 극심한 희생과 헌신이었는가를 놓치면 우리 기독교는 다만 도덕성, 다만 잘잘못, 다만 자랑과 성공에 불과해 진다. 기독교는 그것보다 크다. 이 길을 가는 것은 환희와 기쁨으로 웃으며 갈 수는 도저히 없다. 울며 비명지르며 공포에 떠는 두려움과 간청과 비명과 얼룩질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 상에서 정확히 예수님께서 하신 그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도 쉽지 않았던 길인데 우리는 쉬워야 한다고 욕심을 낼 수 있는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나이가 들면, 없는 커다란 지혜가 있다. 겁날 게 없는거다. 왜냐면 이미 다 빼앗겼기 때문이다. 건강, 영화, 성공, 능력도 다 지나가고 죽음 앞에 서면 인생이 짧다는 것, 인간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천국일지 모른다. 그러니 오늘 내가 겁낼 것이 없다. 이걸 치열하게 각오하고 힘을 다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 하신다. 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기도를 기억하라.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잔을 내게서 비키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의 신앙의 현실이다. 하나님이 외면하셔서가 아니라 우리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값싼 구원으로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고단한 인생으로 살 수 밖에 없고, 이것이 우리의 명예요 자랑이라는 것을 예수의 부활로 증언하고 있다. 초대교회로 시작한 예수의 부활, 성령 강림이 모든 신자들의 생애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눈물과 한탄, 그리고 반전된 놀라운 탄성과 기적이 없다면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 믿는 영광을 성경대로 결단하도록 기도하라.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