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시작 -
2013. 7. 28. 16:29남포교회 수요 예배 말씀, 욥기를 시작한다.
본문 전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뜻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 항상 읽고 나면, 그래서 욥이 잘했나? 못했나? 혼동된다.
잘했다고 하기엔 뭔가 찜찜하고, 못했다고 하자니 그럼 사탄이 이겼나? 하는 불안함이 따라온다. ㅋㅋ
1장 첫 설교를 들어보니 이건 인간을 놓고 사탄과 하나님이 대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의 범주'와 '하나님의 이해의 범주'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차이 만큼이 우리에게 허락된 재난이자 삶의 핍절함이다. 그렇다고 이 고난이 허망함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환란이 인내와 연단을 거쳐 소망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을 삶으로 살아내는게 성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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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없이, 이유없이
그 조건을 제거해보아라. 그 조건이 뭐냐면 사탄이 불만인 것이다. 사탄에게도 그 조건을 주었으면 만족했을 조건이었겠지. 하나님이 볼 때는 조건이 아닌 것이고, 사탄이나 닥칠 재난 속에서 욥의 반응 속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것은 조건이었겠다. 하나님은 조건으로 삼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조건으로 삼는 것이 재난이었다.
재난을 통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다른 조건에 의해서 성립되고 만족스러운 것이라는 깨우침으로 인도될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의 조건을 채우기 바빠진다.
주께서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말하자면 그의 이해의 범주를 가리킨다. 욥이 가리키는 이해의 범주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욥기를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의 이해의 범주가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불평을 사탄같이 할 수도 있고, 욥 같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이해의 범주, 통치의 깊이를 깨우치는 과정이 될 것이요, 그것이 본인의 욕심을 채우지 못한 자의 불평에 불과하다면 그는 사탄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롬 5장.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이룬자로 서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약속, 소망 속에 있다. 이미 일어난 것과 장차 우리가 받을 것 사이가 현재인데, 그 현재를 3절에서 환란 중에서 즐거워한다라고 성경이 선언함으로써 얻은 구원과 얻은 구원의 영광된 성취 사이에는 환란이라라고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왜 환란이냐, 환란을 통해서만 인내, 연단, 소망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소망은 당연히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환란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가 연단을 만드는 속에서 우리의 이해의 범주를 깨고, 까닭없이라고 말한 사탄이 말한 조건을 깨고, 하나님의 뜻과 넘치는 지혜 안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이걸 싫어한다. 그지? 하나님이 마지막에 욥을 데리고 다니면서 너, 우박 창고 봤냐? 라는 장면이 있다. 내가 창조한 창조 세계를 보아라. 우리 인간은 분명히 창조물 중에 하나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창조물과 구별되는, 다스리는, 대리자로 명령받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을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고 있다. 통치와 결정, 선택의 자유까지 허락하셔서 우리를 어떤 목적물로 지으셨는지를 다른 피조물과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지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지위를 버리고 그냥 편안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편안한 이해의 범주 내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결과 내에서만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의 불만, 자신의 거역함에 대한 이유로, 하나님을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수 없다는 답을 하나님이 욥에게 걸어서 욥의 인생 속에서 사탄이 맞는가 하나님이 맞는가를 증명하는 내기가 된 셈이다.
우리는 약간 억울할 수 있다. 우리가 잘못하면 사탄이 이기고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이 이기는 이상한 싸움이 되버렸다. 사탄이 자신의 잘못을, 짐을 덜려고 핑계를 대려고 우리를 끌어들인 것과 다르게,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욥이라는 한 인간의 한계와 변덕과 연약함에도 걸더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유없이는 안된다라는 사탄의 도전과 욥의 재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 가진 이해의 범주가 우리의 이해의 범주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가 깨기 싫어하는 이해의 범주 속에 하나님이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 이해의 범주를 깸으로써 당사자인 욥은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 속에서만이 자신이 가진 이해의 범주를 깨고 하나님의 범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기로 하시는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로써 가장 노여운게 뭐냐면 자식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그 앞에서 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걸 참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면서 심판하기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범주를 드러내고 항복시키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시는 그 아픔으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난이다. 그 아들을 보내신, 아들이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이 씩 웃고 있었겠나. 아들이 십자가상에 달렸을 때 온 하늘이 어두워지지 않았나.
똑같은 그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는 마음으로 욥의 고난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을 통해 그 까닭없음을 깨고 있다. 재난을 고하러 오는 종들의 보고가 '갑자기'로 시작한다. 이유가 없다. 우리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유없이, 갑자기,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탄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을 하고 있다.
마6장.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도둑이 땅에 쌓아놓은 것은 녹이 슬기도 하고 썩기도 하는, 하늘의 보물에 비유하면 하찮은 것이다.
22“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눈이 어두우면, 허망한 일에 소진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24“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내 이해의 범주와 하나님의 이해의 범주를 섞어서 사용할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을 초월자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그의 목적에는 순종하지 않고 방법으로 하나님을 요구하면 너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것이니라.
욥이 왜 고난을 받았냐면, 잘못해서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틀렸다고 할 수 없지만 틀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 사이에 관한 것이다. 자기 것을 고집하는 것을 놓지 않는 한, 큰 것에 나아갈 수 없다. 큰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재난이라, 환란이라고 한다. 싫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참여하기 위하여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깊은 데 노 저어 가라, 망망대해로 나아가라.' 내가 장악하고 조작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는 것으로써 두렵다. 그것이 깨질 때 우리는 누구나 그것을 재앙이라고 한다. 이것이 싫다, 이것이 두렵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의복을 사기 위해서 죽을 사람 없다. 음식을 위해서 죽을 사람 없다. 몸이 더 중요하고 목숨이 더 중요하고, 그것을 입기 위해서 옷을 입는 것 아니냐는 거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이 복주시는 약속을 위하여 우리를 줬는데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이해의 범주로 우리를 보장하고 안심하기 위한 것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인데,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에만 몰입하고, 우리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는 놓고 있다. 공중의 새, 들에 핀 백합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 이런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생각.
늙어서 죽음이 가까워지면, 인생의 수많은 굴곡을 거친 결과 죽음이 가까워지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망함을 느낀다. 자신이 가진 이해의 범주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통치자, 창조자로써 가졌던 목적의 위대함이 무엇인가에 대한 도전을 받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어려움에 직면하라. 살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 존재인가. 세상에서는 그것이 기껏해야 대의요, 도덕이다. 대의나 도덕은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확인을 하는 2차적 가치다.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해서 근본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미안하지만, 불교 이야기 해보자. 하나님의 도전 없이 인간이 정직하고 끈기있게 인간이 가진 모든 부족함을 자기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날 길이 뭐냐고 생각하자, 생각하지 않는것이 답이라고 한다. 몰아. 나라는 존재가 자기가 가진 이해의 범주 속에서 확인하고 유지할 방법이, 내용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정의 극에 간 것이다. 비워버리는 것이다. 무소유, 가져서 짓는 죄에서부터 도망간 것이다. 안 가진 게 무슨 적극적인 선이란 말인가? 가져서 짓는 죄를, 가진 것을 제대로 쓸 능력으로 답을 내지 못하고 안 가진다고 가는 것이 어떻게 답이 되는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무책임한가?
가족을 책임지지 못해 도망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산다는게 얼마나 힘이 드는가. 그 얘기를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고달픈 인생을 반복하여 살도록 방치하시는가. 왜 오늘도 나는 공중 나는 새를 봐야 한단 말인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스러우면 차라리, 생각할 능력이 없다면, 내가 다만 저 비둘기, 매미, 한 줌 먼지 였다면. 그러나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흔드심이다. 거기에 불려와 있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만 이 도전 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삶 속에 이 심령을 깨우는 것이다. 일어나라, 답하라, 아직도 네 생각 속에 숨어 내가 만든 답에서 도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욥은 우리 중에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이다. 우리는 애써 이것을 다른 것으로 치환한다. 전도. 기도. 성경 보기로 치환한다. 이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도망갈 수 있다. 이 고민과 이 깊은 답. 자신을 깨고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위임하고 안내를 구하고 붙잡아 달라고 싸워야 하는, 이 직면한 자의 갈등과 고민을 허울좋게 외면한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 시대적 책임, 국가적 책임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이해하고 인간과 인생을 이해하는 틀을 신앙적으로 확보하기까지는, 우리는 다만 도망가고 변명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나님,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자식들 건강하고, 남한테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살게 해주세요.
기독교를 하나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민, 애씀, 마음 아파함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한다. 고민하고, 울부짖고, 어떡하란 말입니까. 다행히 이런 말 욥기에서도 한참 나온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지금 어디쯤 있을까? 나는 지금 연단의 연에 와있다. 이제 단을 지나 소망에 갈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나이를 얻고 모든 것을 손에 놓아야 할 때에 와있는 이때, 다만 우리를 탈진시키고 소진 시킨게 윌의 인생이 아니라 우리를 정금같이 제련하셨다는 감사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인생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을 기대와 감사 속에 믿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