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2013. 7. 22. 18:33

이번달 열흘 남았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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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교회 화아저씨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어떤 형태의 표현이 되는 걸까.

성령을 따라 산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며 신령한 성도의 삶을 산다고 할 수 다. 어떤 모습이 신령한 성도의 삶일까?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은사에 대한 체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의 신앙 안에는 성령을 통해서 은사와 신비를 주셔서 하나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체험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한 일도 틀림 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신령한 일을 따라 산다는 것은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나를 통해서 판별되고 드러난다. 기독교는 자기가 한 어떤 신비로운 체험들을 붙들고 살아가는게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가장 중요한 표는,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를 보면 된다.


육체의 일을 따라 살 때 열다섯 가지 일을 볼 때 그것이 관계가 다 어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보면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살고 성경이 말하는 방식대로 신령하게 살아가면 관계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사교성이 있고, 인사성이 밝고, 사람들을 잘 사귄다는 말이 아닌다. 기질에 의해서 관계성이 좀 모자란다할 지라도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관계의 회복이야말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신령한 성도들에게 발견되는 신앙 생활의 모습이다.


우리가 바른 관계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본문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나온다.


먼저 부정적인 면.

헛된 영광을 위하여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여기서 주어를 넣자면, 자신의 헛된 영광이다. 헛된 영광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이나 중요성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것과 다르게 자기를 그 이상으로 칭찬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끝없이 자신을 실제보다 높이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남성들은 보통 내버려두면, 자신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다. 아내가 적당히 당기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많은 점수를 주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신의 능력이나 중요성이나 실제와 관계없이 더 높게 인정받고 칭찬 받으려는 경향을 갖는다. 


헛된 영광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 두 가지, 서로 노엽게 한다. 이것은 결투를 신청한다는 문자적인 의미다.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다. 끝없이 상대를 노엽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말이다.


두번째는, 자기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여기면 투기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상대가 가진 귀한 것들이 자기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끝없이 질투하고 입증하고 드러내고 싶어하는 경향, 이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성령을 따라 살 때는 각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게 된다. 


자기보다 더 귀하고 나은 이웃을 위해서 끝없이 섬기는 것이 기쁨이며 즐거움이며 특권이라고 여긴다. 비교나 경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며 봉사, 섬기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모습이다.


성도들끼리 내가 더 잘 믿는 사람인것처럼 여기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교회 안에서 보게 된다. 이것은 세상의 모습이다. 우리의 내면 속에 세상적인 기준이 그대로 들어와 있는, 그래서 관계가 세상적인 관계로 만들어지는 것이 더 큰 위험임을 알고 조심해야 한다. 만약에 이런 것들을 하지 않아야 한다면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교회 안에서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이 무엇인가?


2절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성도들은 관계를 서로 맺어가면서 짐을 서로 져 준다.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볼 때 그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고 나누어 진다. 타인의 짐을 나누어서 지는 것이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에서 신앙이 잘 자랐다. 성령이 충만하고 인도하는대로 사는 신령한 사람이라고 할 때 증거가 무엇인가? 그 증거는,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고 자기를 약하게(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다. 


세상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을 붙들고 자랑하려고 하지 않는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교회와 성도는 약한 자의 약점을 내가 감당해 주는 것이다. 짐을 져주고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교회 공동체이고 생명 공동체인 교회의 특징이다. 이렇게 성도가 살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인가? 예수 세상 오셔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루어주셨다. 율법의 요구를 전부 다 이루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한 법을 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옛 계명은 당신이 다 이루시고 완성시켜 주셔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네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리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종노릇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베풀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종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인간과 똑같은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사랑이 만들어낸 종노릇이다. 사랑은 누군가의 종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다. 종이 되지 않으면 타인의 짐을 질 수 없다. 짐을 지는 것은 종이다. 주인이 지지 않는다. 짐을 지라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 때문에 종노릇 하는 것이다. 그 짐을 함께 나누어 지는 것이다. 교회는 다 완성된 사람들이 모여서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아니다. 여러분이 다 경험한 것처럼 허물과 실패와 한계가 너무 많다.


나는 어지간히 나이를 먹어도, 10년, 20년 후에도 이와 비슷한 설교를 하지 않을까 한다. 완성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마음껏 사랑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허물과 실패와 한계가 여전히 있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인도를 따라서,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깨뜨려서 주님이 기대하는 그대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교회의 특징이다. 우리가 아무리 탁월한 성도라도 한계와 모순을 가지고 있는 인생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다른 사람의 짐을 져줄 뿐 아니라 자기 자신 스스로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지체들의 도움을 통해서 다른 지체들의 짐을 져주고 함께 수고를 해줌으로써만 존재한다는 것을 잘 인식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들에게 짐을 나누어 주고 자기의 짐을 남들에게 지게 해야 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질 수 없는 짐들이 있다. 그때 자신의 약함을 지체들에게 함께 나누고 짐을 나누어 질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육체의 또다른 표현이다.


윤리적으로는 지탄을 받지 않겠지만 신앙적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책임있게 살려는 자세는 중요하지만 짐을 나누어주고 함께 지면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자기 중심성의 또다른 발로요, 아주 공동체를 깨뜨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다른 잘못을 지는 사람이다.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서로 짐을 지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공동체다.


자기는 하나님께 다 맡겼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할 때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다른 지체를 통해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을 두려워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살아가고 함께 자라가는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다. 신앙 생활을 더불어 하지 않고 짐을 나누어 지지 않고 혼자 알아서 다 하려고 하는 사람은 신앙의 핵심과 중추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자신의 종교적인 체험을 붙들고 타인을 아무렇게 대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아니다. 성도들은 짐을 더불어 나누어 주고 자신의 필요를 잘 인정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짐을 나누어 주는 구체적인 사례를 두 가지 보게 된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짐을 나누어 주는가?


형제들아,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렇나 자를 바로 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신령한 너희는, 이란 말은 어떤 단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말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령한 너희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짐을 어떻게 지라는 것인가? 공동체 안에 죄를 지은 사람이 드러날 때 두 가지 잘못된 반응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내치지 말라는 것이다. 믿었던 사람들의 죄를 발견하면 실망하고 분노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게 된다. 그렇게 한 이면에 무엇이 있나? 그 사람을 신뢰하다가 실망하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잘 뜯어보면,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기 자랑, 헛된 자기 주장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의 허물을 지나치게 비난한다. 조국교회는 그냥, 유명한 사람들,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실수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그 사람의 아름다운 면을 한 순간에 짓밟아버린다. 전부다 몰살 시키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가진 얄팍함과 어리석음이다.


성도들이 짐을 나누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의 극단이 있다. 죄가 드러났을 때 그로 인한 파장을 두려워하면서 덮어주고 지나가려고 한다. 이 두가지는 모두 성경적인 자세가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 본문은 어떻게 말하고 있나? 죄가 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라는 것이다. 온유한 심령으로 밝히라는 것이다. 부드럽고 겸손하고 강인함을 말한다. 상대에게 상처가 되도록 상대의 죄를 지어서 넘어져 있는 영혼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죄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그를 정죄해서 우리로부터 분리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보존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어서 우리로부터 분리시켜서 우리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율법이라면,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가 우리의 짐을 나누어짐으로써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복음이다. 공동체의 어떤 이가 죄를 지을 때, 공동체 안에 분명히 드러나서 공동체를 심각하게 상하게 하는 죄가 드러나면 반드시 그 죄는 덮어놓고 지나가거나 비난하고 잘라내고 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인식하도록 분명하게 해서 그 사람이 회복될 수 있도록 그 짐을 나눠지는 것이다.


교회는 언제든지 사람들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 죄지은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죄가 얼마나 나쁘고 중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회복되도록 만드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교회 안에서는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비난하고 비판하거나, 사람이 죄를 지을 때 덮어놓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바르게 권면하고 징계한다. 그렇게 함으로 공동체를 수많은 불미스러운 일들로부터 보호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거룩의 핵심 중에 하나이다.


조국 교회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덮어놓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말해야 한다. 말을 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 그 짐을 개인에게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에 그 죄가 영향을 미칠 것을 알고 그 영혼에 회복할 것을 권면하고 짐을 나눠야 한다.


짐을 나눠져야 하는 중요한 방법이 두 번째로 있다. 가르침을 받는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눔으로 짐을 지라는 것이다. 아낌없이 그들을 격려하고 필요할 때 후원하고 지원하고 섬김과 귀하게 여김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그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자들이 자신의 부름 받은 일에 전념하도록 짐을 함께 져주라는 것이다.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을 끝없이 충족하며 여러분이 짐을 져줄 수 있는 부분을 져주라고 이야기하는 거이다. 목사로서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이 부담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교회 안에 권위와 질서가 너무나 무너지고 있다. 질서와 권위를 존중하지 않고, 옳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짓밟고 있다.


말씀을 연구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목회자들은 여러분의 영적인 복락에 결정적인 존재들이다. 여러분의 영적인 모든 유익과 복락은 그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적인 복락에 치명적으로 좌우되는 존재가 목회자들이다. 말씀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정말 마음을 기울여서 아낌없이 격려하는 일들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그 분들이 묵상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짐을 함께 지라는 것이다.


이번 주간 사역자 회의를 하면서 그들에게 다 요구했다. 나하고 3년 이상 5년씩 있을 생각하지 마라. 그래서 사역자들에게 다 말했다. 나하고는 3년~5년 있다가 다 떠날 생각하고 사역해라. 그렇게 되면 더 어린 사역자들이 새로 오게 된다. 아주 젊은 사역자들이 올 때 그들의 연수와 경험, 경륜의 부족함 때문에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도록 정말 짐을 져주고 함께 여러분들이 마음을 나누고 짐을 지는 것이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목사님들은 회의를 할 때 좀처럼 칭찬을 잘 안한다. 혼을 내는 경우는 자주 있어도 목회자들에게 칭찬은 잘 안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처럼 목회자들에게도 가르친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사역자들을 업수이 여기거나 비난, 무시, 얕보거나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위임받은,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성경 말씀을 선포하는 귀한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짐을 지고, 함께 수고를 하고 사역자들이 할 수 있는 그런 수고는 아니지만 짐을 서로 져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꼭 기억해서, 목회자들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대하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여러분들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실수하거나 말을 잘 못할 때, 내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이러면 얼마나 그 당사자가 상처를 받겠는가. 우리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도록 아껴주시고 여러분이 짐을 져 주시고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짐을 잘 져서 목회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업수이 여김을 받는다던지,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짐을 나누어 지기를 바란다.


짐을 잘 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3,4절에 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찌 아니하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살피는 일에 실패하는 것이다. 자기를 살피는 일에 실패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살피는 것인가? 남과 자기를 비교하는 것이 자기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학벌, 신분, 부를 가지고 남과 나를 비교하면, 자기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는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한다. 이게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역할과 부름과 은사에 적절하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신분, 학벌, 재능, 부를 가지고 비교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분깃과 부름과 은사가 다 다르다. 그 하나님의 부름과 은사와 분깃에 합당하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평가하고, 자기를 보는 너무나 중요한 기준인 줄 알고 평가하고 봐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보는 일에 실패한다.


끝없이 헛된 자랑이나 자기를 속이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짐을 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자기를 정직하게 보지 못하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기를 결정하고 교회를 세속화 시킨다. 우리 자신을 잘 봐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를 봐야 한다.


그 귀한 은혜가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그 은혜가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니, 깊은 감사와 자랑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거나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귀한 자랑거리와 하나님이 주신 많은 복 때문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자기가 기대하는 평판에 근거해서 남들이 자기에게 원하는 대로 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것이다.


5절, 자기를 잘 돌아보고 자기에게 맡겨진 짐을 잘 지라는 것이다.

2절에서는 짐을 서로 지라고 해놓고, 5절에서는 각자 자기의 짐을 지라 하니까 약간 대조되는 것 같죠? 그러나 원문을 보면 두 개가 구별이 된다. 5절 짐은 포르티온이다. 포터블이다. 쉽게 들고 다니는 짐을 말한다. 한 사람이 가볍게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짐이다. 자기에게 허물과 짐이 있을 때 잘 감당하고 짊어지고, 다른 지체가 무거운 짐,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있으면 잘 감당해주라는 것이다.


오늘 설교한 것을 문을 나설 때 다 잊어버려도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서로'란 단어다. 이것은 교회의 생명과 같은 단어이다. 우리는 서로 싸움을 걸거나 서로 질투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서로를 책임있게 대하는 만남이 있는 공동체가 교회다. 교회는 홀로는 절대로 완전하지 않는, 살아있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서로 짐을 지고 함께 서로 더불어 자라가고, 더불어가 아니면 절대로 존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사람의 삶 속에 들어온다. 4장에 가면 죄가 들어온 인생의 결과가 나온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물으신다. 가인아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신다. 가인은, 아무도 못 보는 곳에 아벨을 데려가서 죽였지만 하나님이 그 곳에 계셨다. 다 알고 계셨지만 아벨이 어디 있냐고 물으셨다. 가인이 어떻게 대답했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다. 죄가 편만한 이 세상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이 다 보고, 아시는 데도, 하나님이 찾아와서 물으시는 데도 그 하나님을 향해서 고개를 들고 대답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자신이 쳐 죽여놓고,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도 온갖 방법으로 합리화하면서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 것이 세상이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는, 서로 피 한방울 섞여 있지 않고 어떤 이해관계가 있지 않지만 서로를 세우는 것이다.


이 공동체를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개개인의 탁월함을 보자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다른 지체들의 약함과 한계를 깊이 이해하고, 짐을 나누어 지고, 아무 이해관계도 없고, 피 한방울 섞여 있지 않지만 주님 때문에 짐을 나누어 지고, 책임있게 서로를 대하려고 하고, 힘을 다해서 더불어 자라려고 하고 함께 뭔가를 해내려고 애쓰는 공동체가 성도들이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