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거 말씀 들으면서 쓰니까 아내도 좋아하고 조공용으로 딱이네.


칭찬 들을려고 자꾸 받아쓰게 된다. 


아내 보고 있나? 나 이래뵈도 영적 가장이야.




아직까지 3장 개괄이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보는 눈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인생과 차이가 있는지를 많이 보고 있다. 우리가 줄창하는 얘기는 편안하게 해달라는 거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셔서 우리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게도 이끌어 가신다.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수 믿으면 편안하다는 말은 피상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3장은 14절 이전까지는 어떻게 보면 한 메세지를 위한 발단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긴 서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꼭 시험에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말 안듣는 학생에게도 꼭 보라고 거듭 확인하지 않던가.


사도 바울이 앞에서부터 끊임없이 했던 이야기는 14-19절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는 육신의 건강, 자식의 성공적인 학업, 웰빙에 대한 비결을 없다. 심지어 십일조 축복 이야기도 들어있지 않다. 너희가 나를 믿으면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 뜻밖에도 여기에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는 말이 들어있다. 사도 바울의 가장 큰 초점은 내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가 되어 이런 감옥에까지 보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그것을 깨달은 나는 이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이야기를 하느냐, 하는 것을 증거로 삼아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너희에게 전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보낸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자신만을 증인으로 삼지 않는다. 이방인도 유대인과 함께 그리스도의 후사가 되게 하는 이 일을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가진 큰 자랑거리가 무엇인지를 오늘 이 시간에 말하려고 한다.


또 영화 이야기 하나 하려고 한다. 사람은 자기 실력 안에서 밖에 말을 못하네. 영화 광고를 하는데 이런 말이 있다. 제작비 삼천만불, 연인원 50만명, 계획 20년, 촬영 6년.. 작품 하나 만들기 위해 제작진들이 많은 생각과 고민, 연구를 한다.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원래의 영화는 예술로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 나라의 백성으로 채워서 하늘 나라를 끌고 나갈 영원한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를 죄악에서 꺼내야 했고 씻으셔야 했고 성화되게 해야 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구속 사업, 그 안에 우리가 스스로 항복하는 일이 포함되어야 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끼리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 계획, 성령 하나님 우리를 깨우치고, 성자 하나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일은 하나님끼리 한 일이다. 항복의 기간을 우리에게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일 기간, 진전이 있는 기간, 샘플이 등장하는 기간,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제대로 순종했을 때 받는 축복이 제시되고 반대했을 때 받는 저주가 제시되고, 가면 쓰고 나갔다가 가면이 벗겨지는 모습이 제시되고, 우리의 실수에 채찍을 드시며 기어코 고쳐내시고 불을 보내시고 지진이 있게 하사 죄로 못가게 하는 데도 불구하고 가는 사람이 떨어져 죽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는 모습이 있는 것이다. 이 긴 서론. 그 앞의 시행착오들의 나열, 모든 실험들과 결과와 과정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이 화면들을 열기만 하면 나레이터가 나온다. 성령님께서 간섭하사 글을 읽는 우리에게 힘있게 엑센트를 넣으시며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간섭이요 사랑인 것이다. 그 속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이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대하고 깊고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헤아릴 수 없는 진지하심과 열심이 있으심과 그 놀라움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진지함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풀무불에 들어가는 것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톱질을 당하는 것으로 부르셨고, 사도 바울은 그 중에 감옥에 들어가는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놀라지 말라. 나의 환란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가 나에게 장차 올 영광을 위하여 현재 감옥에 집어넣으셨다. 이렇게까지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이렇게라도 장차의 복을 조건으로 걸어야만 이해를 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면류관을 쓰고 말하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 것이다. "나의 환란을 걱정하지 말라 이것도 다 영광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에 나온 모든 사람들은 위인이기 보다 이 거대한 그림,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집념, 축복, 사랑, 모든 영광을 그리는 그림 가운데 얼마나 작은 엑스트라로 나오는 지 모르겠다. 그 큰 그림 안에 위인들이 얼마나 쪼다로 나오는가. 가나안에 결국 들어가지 못한 모세, 자식들에게 쫓겨다니는 다윗.. 얼마나 조그만 그림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 제로인가.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그 충만하심으로 우리가 충만해지기를 요구하고 있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를 항복시키시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우리 앞에 얼마나 많은 배우를 늘여놓고 계시는가. 우리 한 사람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자를 동원하고 있는지 아는가. 천사들마저도 엑스트라이다. 우리가 자녀이지 천사가 자녀가 아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께서 가려 뽑으시는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그의 자녀들일 뿐이다. 김일성, 모택동, 공산주의, 등등 이 세상 어떤 역사와 존재도 이 큰 사역에 필요없는데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 큰일의 목적으로 놓고 계시지 우리를 무슨 수단을 위하여 부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전문 분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딱 하나 모르는게 있는데, 하나님이 뭘 하려는지 개뿔도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부터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하나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왜 포로가 되었나, 예수님은 왜 구약 이후에 등장하셨나, 서신서에서 우리에게 약속한 것은 무엇이며 장차 일어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는 모른다. 기껏 아는 것은 "기회 있을 때 전도하자." 이거 밖에 없다. 너무 가난해서 전도 밖에 붙잡을게 없는 우리 성도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이 작품에 동원된 배우가, 주연급만 몇 명인가? 우리는 알고 누려야 할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많다. 이 거대한 흐름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고 있는 엄청난 무게, 깊음에 대한 충격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고 산다. 세상이 우리를 할퀴려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공포감이 있다. 뱀같이 지혜롭게 하지 않으면 굶어죽는가, 세상의 전략, 지지않을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탄마저 엑스트라이다. 그것을 놓고 이 구원이라는 드라마를 진전하고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계획과 추진력없이 적 앞에 노출된 공포감만 있으니까 신자들은 실패하는 것이다. 그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알아야 한다. 그 중에 몇몇 가지가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거대한 계획과 흐름에 하나님이 얼마만큼 큰 힘을 투자하셨으며 어떻게 성취시키고야 말 것인가, 그의 종들을 엘리야의 갈멜산 전투,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함락, 다윗, 드보라, 스가랴, 요나를 보내는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거기에 대한 감동은 없다. 오늘 눈치 빠르지 않으면 굶는다는 현실감 밖에 가지지 않았다. 비극인 것이다. 오늘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써야 하는 말이었다. 사탄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하신다. 시험이 너무 쎄서 하나님께 돌아가 도움을 청하지 않을 만큼만 집적거린다. 내 능력으로 이길 것 같게 해서 결국은 절망으로 끌고 가게 한다. 포기하게 만들지,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책략을 위장한다. 어떤 순간이라도 좋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뛰어가는게 최선책이다. 어떤 상황, 아무리 비참한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돌아가라. 우리는 이런 발견을 한다. 다윗이 시편에 쓴 것 같이 주께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꺼내셨다는 말을 누구나 얻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기독교의 자랑이요, 특권, 가장 힘있는 승리의 근거들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놓고 산다. 그것을 뺏기고 사는 것을 놀라워 해야 한다. 내 인생을 독립된 자리로부터 혼자 계획하고 혼자 사는가를 보고 놀라야 한다. 우리 인생을 그에게 의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놀라야 한다. 주의 계획 속에 들어가는 것을 늘 방해받는 우리라는 것을 보고 놀라야 한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내가 여기에 갇힌 것을 보라.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세상에서 타협하고 실패하는 모든 것의 근거로 존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실패하거나 비관할 수 없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의 전매 특허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땅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슬픔, 비관, 초조함이 없고 찬송과 감사의 말 외에 신자의 입에 올릴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살아계심과 그의 약속들이 오늘 우리를 위한 것임을 우리 마음에 깨달아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항복하고 귀의하고 의탁하여 기적을 보는 생이 되기를 바란다. 

Posted by 뚤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