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비밀
2013. 7. 5. 17:21에베소서 3장 / 남포교회 / 박영선 목사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는 점은, 읽은 것이 기억이 안난다는 것. 왜 그럴까? 성경을 읽으면 읽은 것이 기억이 안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우리의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3장은 매우 재미있는 부분이다. 중심 내용은 14절 이하에 있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며... 그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와...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 교인들이 지금 갖고 있는 것에서 더 필요한 것을 원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 익숙하지만 기독교 진리에 익숙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된다. 책을 읽어서 척 머리에 들어오는 것과 들어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잘 알고 있는 내용인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잘 모르는 내용은 아무리 봐도 내용을 모르면 한 번에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 매우 박학, 박식하다. 건축, 골프, 땅.. 교인들은 저들의 전문 분야에 대해 박식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 대하여는 거의 모른다. 교회와 익숙할 뿐이지 기독교의 내용과 익숙하지 않다. 성경을 읽어도 내용을 잘 모른다는 점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얄팍한 지식이여..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우리의 희박한 지식을 깨뜨려야 한다. 에베소서 강해 앞으로 3년 정도 걸릴 예정인데 이 기간을 통해 교인들의 지식이 성큼 크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1절을 시작한다.
"감옥에 갇히는 일도 그리스도의 일 때문이다."
환란과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일어나는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이러한 고통과 환란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 5:11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핍박받는 것이 복이며, 그리스도인된 유일한 표징이다." 일반적으로 목사가 당하는 고통과 환란은 일반인보다 쎄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정 떨어지게 하기 위함이고 그 환란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지금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것과 다르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이방에 갇혔다." 환란과 고통 속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목적이 있다. 빌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당시는 중죄인을 가두어 놓을 때, 한 간수가 그의 왼팔을 같이 묶어놓고, 오른팔에는 다른 간수가 그와 함께 묶어놓는다. 이렇게 하루 8시간씩 3교대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양쪽에 자신과 함께 묶여 있던 간수들과 최소 몇 년 정도 같이 지냈다.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적이었다. 유대인들의 당시 큰 자랑은 이방인과 다르다는 점이었다. 로마군인들이 뜬 눈으로 바울을 보호하면서 편안하게 관비로 로마까지 들어가서 간수들의 관심을 받는 상황이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고달팠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편안하고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진흙 갖고 만드신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권위로 찍어 누르지 않는다. 인간이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수 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데 십자가의 방법으로만 하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느냐의 여부를 볼 때, 그가 목숨을 거느냐의 여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가장 타당성있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하는 이야기에 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인도되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이 진리이며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점은 그것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그것으로 인하여 해를 당하더라도 그것을 놓지 않고 자랑하는 모습으로 복음의 복음된 모습으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1) 하나님을 믿었더니 만사 형통 했다.
2) 죽으면 죽었지 그럼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겠다.
자, 이 둘 중에 어떤 발언이 더 쎈가? 요즘 시대의 믿음은 1번으로 자꾸만 가고 있다. 축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믿어드릴테니까 주십쇼. 여기까지다.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고 만물의 찌끼가 되더라도 이것은 포기할 수 없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더 강한 표현이다.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다. 어려워질 때 믿음까지 흔들리는지 점검해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것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된 것이라도 내가 아무리 쪼다짓을 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고백이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봐야 한다.
바울은 3장의 초입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의 흔들리지 않는 비밀이 이 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믿음은 세상사와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하나님은 주로 성도들을 낮추어 쓰신다. 높여쓰시지 않는다. 성경에서 높여쓴 인물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중에 다니엘이 있다. 다니엘이 높여쓰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니엘이 잡혀간 바벨론에서 왕 다음가는 권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기 때문에 훨씬 더 힘들었다. 그의 신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신앙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유지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적국에 잡혀온 포로 주제에 자기 원수의 나라에 총리된 것이 무슨 자랑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쓰였다고 착각한다.
다윗, 다윗의 생애는 전부 시범 케이스다. 나중에 묵사발 만들기 위해서 성공을 준 것이다. 골리앗을 이긴 것, 사울의 남은 식구들을 선대한 것은 나중에 반란 당하는 일의 연속을 겪어온 것과 같다.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알고 난 이후부터 그가 당하는 환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된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적은 일에 충성하라. 내게 맡긴 삶에 충성했느냐의 여부만이 중요할 뿐이다.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줄로 생각하면 나도 그러하니 내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이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난 의라...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려 함이라." 부활은 죽은자 가운데 있는 것이다. 부활은 죽지 않은 자 가운데 있지 않다. 부활은 죽음에서 출발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동행하기 위해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죽음이다. 우리들이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감수하는 것.
우리는 삶에서 꼭 놓치지 않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 그것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정당한데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있다. 베드로가 가롯 유다를 칼로 쳐 죽였다면 잘 한 짓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이 천하의 xx야, 받아라 내 칼을, 정의의 칼을 받아라." 는 잘 못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일을 맡기지 않으신다. 모든 이에게 죽음을 요구하신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간증했던 것은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리더라도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베드로가 말을 그 따위로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겠다." 베드로는 주를 위하여 바칠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니 계획과 열심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어느 신학생이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나를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서두에 밝혔다. 자신이 선교에 뜻이 있어서 신학을 포기하고 10년 계획을 짜고 있다. 그만큼 경박하지 않고 진지하게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그래서 선교 준비의 일부로 목사 밑에서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얼마 뒤에 전화가 왔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계획과 열심이 있는 사람을 쓰지 않는다. 저는 죽어 마땅하다고 뭉그러져서, 옥상에 떨어져서 뭉그러진 메주가 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다."고 했다. 전화한 신학생은 실망과 배반감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런 면에서 잔인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분명히 걸러내야할 부분이다. 우리가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존심을 내놓으라고 하신다. 돈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다. 미치겠다.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네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한 번도 네 돈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럼 헌금은 왜 하는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내 마음에 있는 욕심을 버리는 고백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다.
나는 남포교회에서 가장 성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만큼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결심한 것은, 누구에게도 거친 말이나 분노의 말이나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생각만 한다. 결심을 한다. 현실적으로는 자꾸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사람이 어떻게 결심한대로 살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은 다르다. 그 결심을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알고 하는 자와 모르고 하는 자는 다르다. 오늘 그 결심을 해주십시요.
신자는 무엇이며 교회는 무엇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간섭하여 빛을 발하시는가에 대한 깨우침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안목으로 볼 때 어느 누구도 실패자가 없다. 아무도 무가치한 자가 없다. 괜히 쓸데없이 사람끼리 모여서 말씀 제껴놓고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쓸데없는 경쟁을 하기 때문에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있는 것이지, 성경의 눈으로 보면, 무용한자도 무능한자도 없이 깊은 감사와 보람과 기대를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