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2장 - 강해 32
욥기 42장 - 강해32
욥기의 어려움은, 마지막 결론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는데 있다. 시원하지도 않고 분명하지도 않은 답이다. 이것이 어떻게 결론이 되는지를 알기가 만만치 않다. 이 답이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거나, 물리치거나 해결하는 것이 답이라고 기대를 한다. 욥이 당한 억울함이 시원하게 해결되고 욥에게서나 독자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답으로 가지 않고 매우 애매하고 모호한 식으로 답이 이루어져 있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왜 시원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냐. 우리 여태껏 살펴본 대로 욥이나 세 친구가 인과응보의 법칙 아래에 묶여 있는 신앙의 이해였는데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우리가 볼 때 필요없고 잘못되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일들, 하나님이 실패를 조장하신단 말인가? 하나님이 불의를 방관하신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는 말이 베헤못과 리워야단이었다. 그것을 난폭하고 길들여지지 않고 두렵다고 해서 제거해버리는 것이 답이냐, 이렇게 물은 것이다. 동물의 왕국 보면, 누가 나오는게 제일 좋은가? 평소에 가까이 할 수 없는 동물이 나오는게 가장 좋다. 하마가 악어와 같은 동물에 있으면서 새끼를 악어떼 속에 밀어넣는 걸 보고 제일 놀랬는데 악어가 슬슬슬 피하더라. 하마한텐 못 덤비더라. 평소엔 옆에 가서 볼 수 있겠는가? 티비에 나오니까 재미있게 봤지.
하나님은 이미 답에서 욥에게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네 생각이 얼마나 닫혀 있는가, 작은가를 지적하신거다.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일이든지 못 이루실 일이 없는 줄 아오니.
안 계신 곳이 없으며 못 하실 일이 없다.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고백이다. 거기에는 지금 욥기 내내 싸웠던, 이것은 쓸데 없는 일 아닌가. 이것은 억울하지 않은가? 이것은 있어서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하나님이 못 다루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하여 그 능력으로 모든 것을 만들었고 제어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생기는 고난이나 어려움이나 한계가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뛰어넘게 하신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욥은, 아 그렇군요가 아니라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을 받아낸다. 하나님은 이 답변에 대해서 욥이 비로소 자신의 확인에 대한 닫힌 방을 열어 젖히게 되는 것이다. 그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에 신약에서 반복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거라 말씀하고 있고,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주를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 바다에 다시 나타나시고 다들 주를 알아보고 모이자 베드로에게 묻는다. 저녁식사를 하시고, 시몬아 네가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말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제 진심을 아시지 않습니까? 진심은 있으나 능력이 있는 것까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고백한 자리까지 가는 것을 주께서 붙들어주시는 줄 내가 아시나이다. 욥이 바로 그 얘기를 하는거다. 다시 읽어볼까.
이제 터져나오는 거다. 내가 이해했던 내가 확인했던 그런 세계, 나만큼 큰 세계, 내가 상상하고 이해하고 할 수 있는 세계를 하나님을 만나 넘어서게 된다. 뭘 보고? 하나님이 갖다 들이댄 증거는 뭐였는가? 자연이었다. 창조 세계 속에 내가 다 다루고 내가 다 조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더냐? 얼마나 큰 가 봐라. 공중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보라.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말하자면, 자신의 이해와 한계를 벗어나 고백적으로 하나님을 붙잡는다.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이야기한 것 같이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시다. 그러니 나를 붙잡아 내가 겪은 한계와 무지했던 모든 것을 주께서 합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답이 없다고 자신을 갖다 바친다. 자신의 한계를 이렇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갖다 묶는 것이 어디에 가장 극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인시키냐면,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 - 네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욥의 억울함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 부당한 어려움을 당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살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고 하고, 아브라함은 순종한다. 욥기를 이해하는 시각에서 보며, 어쩔 수 없는 자리에 간 거다. 이삭을 잡거나 자신이 죽거나의 자리까지 몰려갔다고 볼 수 있다. 욥은 이해가 가든 안 가든, 재난은 현실이다. 네가 재난을 당하는 걸 보니 분명히 내가 죄를 지었다. 재난은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 서로 말이 다르지만 고난을 받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욥은 그 원망을 누구에게 돌릴 수 밖에 없는가? 고난이 현실인데, 하나님한테 항의할 수 밖에. 아브라함이 동일하게 몰리고 있는거다. 그걸 통과해서 약속의 자리로 가게 된다. 네가 순종했음으로가 아니라, 네가 이 어려움을 넘어와 네 한계를 넘어왔으니 이제 분명히 하자.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 일을 이룰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노라이다. 욥이 깨달은거다. 하나님은 제 생각보다 크십니다. 제가 당한 고난이 손해가 아닙니다.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 하마와 악어를 만드셨고 저들의 삶을 기뻐하시고 온 창조물을 좋게 여기시듯이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나에게 선하심과 궁극적인 복임을 압니다. 이게 욥의 답이다.
하나님은 뭐라 그랬나. 무소부재, 전지전능하시다. 우리로서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이 한데 묶이는 거다. 우리가 글을 읽으면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물로 고기를 잡으면 그물보다 빈자리의 역할이 크다. 그물로 잡는 건지 빈자리로 잡는건지 모르게 되는 거다. 빽빽하게 되면 못 잡는다. 행간을 잇듯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를 다만 물리적 개념에서 큰 것이 아니라 깊고 무한하시고 측량할 수 없다고 성경이 거듭확인하고 강조하는 이유이다. 이 중요한 고백, 욥 42장 6절.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이 낮아진 자리, 이 고난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선다. 하나님의 통치와 선하신 뜻 아래서 어느 것도 헛된 것도 몹쓸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가치있다. 티끌과 재도 가치있다.
내가 티끌이나 재에 불과해도 상관없습니다. 일어서겠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니깐. 이것으로써 일하는 것을 인정합니다까지이다. 우리는 신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뭘 했길래?
주께서 일하시는 십자가의 길이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부활이라는 영광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으니깐. 십자가와 죽음은 말이 안되는 거다. 창조주가 피조물들에 의하여 모욕을 당하고 저들의 결정대로 자신을 맡겨 저들의 손에 넘겨져 죽는거다. 그것으로 부활을 만들어 냈으므로 기독교인들에게 겁날 것은 없는거다.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공통된 강조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겁을 낸다. 내가 아는 조건을 갖고 있어야, 내가 아는 방법을 사용해야만 된다고 믿으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이 늘 부족하게 여겨지는 거다. 더 많이 울어야 답을 주시는 건지, 뭔가 더 많은 조건을 만족 시켜야 해결이 되는지, 그 깊은 골을 메우지 못하고 많이 표현하듯이, 체념과 불안 속에 신자의 인생을 보내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고 있다.
내게 억울한 일이 생긴 것만 문제가 아니라 나의 부족한 것까지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는데 쓰신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는 거니까 죽을 수 있는 연약한 자리에 오는 거니까 티끌과 재 가운데 일어날 수 있다. 티끌과 재로 살 수 있다고 고백하는 거다.
시편8편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시며...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팔로 하실 거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실 거다. 반복해서 선언되는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 앞에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26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으며,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하여 주려고 하는 사람 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전부인 세계와, 어린아이 즉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자를 대조하고 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딱 욥과 세 친구들이다. 티끌과 재를 뒤집어 써도 좋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의 고난과 죽으심과 그가 받은 모욕과 수치와 고난을 생각해보라.
욥이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통치 세계로 넘겨지는 시점은, 하나님의 동반자로 부름받은 자임을 깨우치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등장하여 욥에게 한 것이 무엇인가? 네가 산염소와 여러 가지 동물을 보았느냐. 이 창조세계에서 욥은 하나님 옆에 서 있는 손님 같았다. 대접을 받고 있는 입장을 말한다. 너는 피조물이지만 너는 내 자식으로 세움을 받았고 너는 나와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은 자다. 하나님의 통치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준다. 이분법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과 능력의 통치를 보여주신다. 함께 통치자의 자리로 부르고 계시고 욥이 고백함으로써 주께서는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니 주께서 못하실 일이 없나이다. 나를 붙드소서. 이 고백을 자유라고 한다. 자신의 선택이란 말이다.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납득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원하는 것이다. 그걸 하나님이 욥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제럴드 젠슨이라는 욥기의 주석서를 쓴 사람의 이 부분에 관한 좋은 글을 결론으로 발췌한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고난 당함과 고난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고난으로 온전해 지는 것을 욥기는 증언한다. 고난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고난으로 온전해지는, 이 말씀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받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해 진 것을 욥도 실제적 삶에서 확인하고 있다. 다른 개념, 주장, 권면이 아니라 실제, 구체적인 한 개인의 인생 속에서 실체로 경험이 주어지고 한 실제 인격이 항복을 하는 자리로 증언대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예수께서 실제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끌어안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역사적 실존 속에 벗어날 자가 없다는 넓은 포옹을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에서 보듯이 욥의 생애에서 그런 것이다.
자유, 하나님이 강요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욥을 불러 단련하여 인간의 가치가 뭐냐,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무슨 뜻이냐 하나님을 안다는게 무슨 뜻이냐를 다그쳐 물으셨다. 이 답을 물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신자의 인생은 고단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그의 사랑을 받는 자로 두 발로 불끈 일어설 때까지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며 우리 인생의 가치도 현실에서 쉽게 타협될 수 없다는 것을 욥기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와 권능에 의한 자리가 지금 내 자리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하여 항복하는 것, 욥기의 증언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우리를 한 독립된 인격으로 지으사 하나님의 명예를 부여하시고 그의 통치의 동반자로 불렀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하나님의 간섭, 신자들의 확인, 실제적인 성숙,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기쁜 책임 그것이 욥기의 결론이요, 증언이다.
우리의 신앙 고백과 믿음을 더욱 깊이 말씀에 비추어서 확인하시고 위대한 신앙인이 되는 말씀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