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0:1-14 강해 30
욥기 40:1-14 강해 30
하나님의 답변, 욥의 비명과 분노와 아우성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또는 기대하는 식으로 등장하지 않고 훨씬 우회하고 훨씬 커서 우리에게는 막막해 보인다는 것을 보고 있다. 38장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답은 사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모든 야생 동물을 동원하여 설명하시는 내용들이 우리의 눈에는 혼란스럽고 그 초점에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 보는 '네가 의롭다 하려고 나를 불의하다고 하겠느냐' 라는 하나님의 이 반문, 질문에 대해 사실 욥은 할 말이 있다. 욥은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놓지 않는다. 야고보서에도 등장하는 욥의 인내에 관한 긍정적인 성경의 증언이다. 그러나 그의 비명은 분명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불만과 그의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질문들로, 반문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어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욥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거다. 이는 신자들이 매일 겪는 현실이다.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는, 무엇으로도 실패케 할 수 없는 사랑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항상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욥처럼 하나님을 놓을 수는 없다. 우리 모든 신자들의 실제적인 신앙현실은 하나님 앞에 붙잡혀 있어 도망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결국 승리할 것을 역사 우주, 개인의 운명에서 확인하고 있다. 그 증거를 예수 안에 있지만 현실은 만족스럽지 않다. 그 얘기까지 와 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겠는가.
욥이 옳다고 한다면 네가 가서 너의 적들을 모두 싸워 이겨라, 항복시켜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건 무슨 말인가? 교회에서 믿음의 교제를 하다보면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이 있다. 항상 불만에 차 있고, 신앙 생활을 성의 없이 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거다. 그 사람도 답이 없어서 그 얼굴을 하고 살고 있는 거다. 그런데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이해 못한다.
권투 시합을 할 때 누가 맞기를 싫어하는 선수가 있는가? 해설자들은 열심히 피하라고 말하지만 선수들은 맞고 또 맞고 얼굴이 퉁퉁 붓는다. 불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서 대들어 보라. 쉽지 않다. 답이 없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옳은 게 정답이냐, 그렇지 않다는게 우리 현실에서 매일 확인하는 거다. 왜 그렇게 생겨먹었는지는 얘기를 할 수 없다. 들나귀는 왜 그렇게 생겼는지, 산염소는 왜 그렇게 생겼는지, 우리로서는 희한할 따름이다. 산염소의 뿔이 참 크고 우람한데 그걸 천적들에게 절대 쓰지 않고 지들끼리 싸울 때만 사용한다. 그 얘기다.
무슨 얘긴가? 하나님이 생각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그런 말이 안되고 답이 안되는 모순과 혼란과 모호한 것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답을 하시는 거다. 산 염소, 들나귀, 또 타조, 말, 매, 독수리 다 길들여야만 쓸모 있는 것이 아니다. 가축으로 붙들어 너희 식량으로만 쓰는것이 아니라 생명의 차이와 충만함과 기쁨이 있단다, 그 얘기를 하는거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이해가 되지 않는 모든 것, 예를 들면 밤, 예를 들면 악, 예를 들면 실패, 한계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가 답이다. 욥으로서는 뭐가 말이 안된다는 건가?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와 통치를 인정하는 것과 그 일하시는 현실, 자기가 당한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억울함, 답없는 길에 대해서 불만이었다. 욥에게서는 이 둘이 분리되기 시작하는 거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해서는 불만인 거다. 하나님을 인정했으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우리의 이해가 턱없이 모자라는 거다.
욥이 원하는대로 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대하여 주권자이며 통치자이기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법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될 뿐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열어놓는 것이 어렵다.
약 5:11
11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
이 말이 어느 맥락에서 나오냐면,
7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8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9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10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심을 믿고 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경험과 현실을 감수하라. 신학적으로 이해할 때는 신앙이 인식론에 기초하는가, 계시론에 기초하는가가 첨예한 대립각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식으로 하자면, 자유주의자란 인식론을 근거로 해서 신학과 신앙을 이해하려는 사람이고 보수주의자는 계시론을 근거로 해서 신학과 신앙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거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식을 해서 이해를 해서 존재하게 되는가. 존재했기 때문에 인식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무엇이 선후 이겠는가? 이해해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해서, 존재의 기능 중에 하나가 이해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해라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해해서 생긴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인식론을 근거로 할 때는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틀린 것이 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정의로우심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법이다가 우선이 되는 것이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애쓰는 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행위이자 본질이 된다.
그러나 인식론으로 욥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의 범주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인식론이 가진 고민의 치열함은 분명 장점이지만, 욥기는 인식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계시란 우리의 존재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해라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만든 자의 기능에 복종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고 믿는 것이 많다. 모르고 그냥 믿기 때문에 치열함에 있어서 인식론자들만큼 안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들은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관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 신앙의 핵심이 이해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에 대해 놀라게 된다. 사랑은 대단히 모호한 조건 위에 서 있다.
사랑, 자식을 사랑하는 걸 보자. 자식이 사랑할만 한가? 사랑이 만족스럽고 달콤하다고 했나? 누가 그랬나? 그건 일찍죽은 사람들이 쓴거다. 사랑은 무서운거다. 사랑만큼 무서운 것, 아무리 줘도 모자라는데, 받아서 모자라는게 아니라 줘도 모자라서 마음이 쩌릿쩌릿한게 사랑이다. 차라리 돌이 되었더라면. 누구의 시인가? 유치환이었던가.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지 차라리 한 개의 바위가 되리라는 말을 왜 했을까? 사랑이 무서워서. 이해할 수 없어서.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과 사랑이다. 관계성을 대표하는 말이다. 믿음은 책임이며 기대며 운명이지 않는가. 속은 것이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면 믿는다. 속는 것이래도 좋다. 속으면 속았지 너 가짜다라고 말할 수 없는게 사랑 아니던가. 그렇게 하나님은 답을 펼쳐 보이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하나님은 모든 이해와 만족의 최고 권위자라는데 동의하는가?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결심과 이해 위에 서있지 않다. 어떤 성실한 손에, 운명적인 손아귀에 붙잡혀 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매순간 다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는 어떤 소원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본문으로 돌아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말씀, 욥기로 돌아와서 40장 6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 말씀하시되,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대답할 지어다. 이 말은, 너는 그것도 모르냐?가 아니라 너는 알아야 한다. 우리라는 존재를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듯이, 우리가 힘으로 이기는 존재, 옳아서 그만인 존재보다 크게, 하나님의 일하심이 산염소와 들나귀를 통하여 증거되었듯이 우리의 우리됨도 다만 해결, 안심, 유능, 이런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복잡하고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후회하고 울고, 다시 하고 돌이키는 것이 있는 존재로서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하나님의 답변이다.
10절~14절
네가 모두를 이길 수 있느냐, 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겠느냐 라는 말은 다만 대적을 물리치고 본인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파묻어버리는 왕권이 아니라 창조와 역사 속에서 보인 것 같이 욥 네가 경험한 것 같이 알 수 없고 깊고 오묘한 현실의 경험에서 본 것같이 더 깊고 더 놀라운 자리로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씀이다.
공부를 하면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다. 공부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왕도가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지식을 배우는 과저에도 반복과 노력과 훈련과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공부다. 공부를 하면 훌륭해 진다는 것은 성적이 오른다거나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고급한 가치는 가만히 앉아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고통 하나 밖에는 기준이 없는, 가장 가난한 수준에서 훈련을 받는다.
톰 소오여가 제일 부러워 했던 친구는 허클베리핀이다. 이유는 학교에 안 가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어리석음인지 아는가? 영어나 수학을 잘 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깊은, 하루에 할 수 없는 전 인생에 걸쳐 배워야 하는 진리를 깨우치는 길이기 때문이다. 공짜가 없다는 걸 배운다.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배운다. 훌륭한 모든 덕목이 그렇다. 창고에 모아둘 수 없고 은행에 놔둘 수 없다. 뇌 속이나 가슴에 품는 꿈이 아니라 나에게 2차적 본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타고난 본능이 아니라 훈련하여 만든 본능이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욥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시편 105편에 가면, 많이 인용했던 요셉의 고난
17그런데 주님은 그들보다 앞서 한 사람을 보내셨으니, 그는 종으로 팔린 요셉이다. 18사람들은 그 발에 차꼬를 채우고,
그 목에는 쇠칼을 씌웠다. 19마침내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은 그의 진실을 증명해 주었다.
족쇄가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실현될 때까지이다. 그러니 징징거리지 말라. 이것이 다 되기 까지는 다른 것으로 떼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정의로움과 성실하심과 은혜로우심과 선하심을 기억하고 우리의 처한 현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우리의 길을 걸으라. 우리의 훌륭함과 믿음이 가장 막막할 때 빛을 발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