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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9장 - 강해 29

뚤뭇 2013. 11. 6. 21:50

욥기 39장 - 강해 29

38장부터 하나님의 등장. 땅과 하늘, 음부 같은 우주 전체의 영역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살폈다.

39장에 이르러, 들나귀, 들소, 산염소, 말, 매, 독수리가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이 등장하시면 논쟁의 종식과 답을 제시할 줄로 기대했으나 뜻밖에 성경은, 무슨 말일지 모르는 많은 내용의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듯 하다. 딴 길로 들어가신것 같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 현상들이 그들의 고유의 법칙 혹은 우연에 의해서 질서와 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눈, 우박, 폭우, 비를 하나님이 끌어오시고 제시하는 핵심들이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사야서 55:6-11 RNKSV)

자연현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자의 생각과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나이가 드니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후다. 1도 차이가 몸의 컨디션을 다르게 한다. 비가 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며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지혜 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부분이 없다는 거다.

욥이 죽을 것 같고 답이 없는 절망과 비명을 넘어오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답이다. 욥은 하나님이 없고 생각을 안 했다고 하는데 그 이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며 손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은 특별한 종교를 가지지 않으면 자연주의에 빠지기 마련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하기 힘든 짙은 허무감이 자연주의다. 산이나 바다에 가보라. 자연의 크기에 놀란다. 자연을 벗하는 것이 큰 기쁨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자연의 가장 큰 본질은 무심함이다. 내가 슬픈 날도 해는 뜬다. 내가 배고픈 날도 달은 뜬다. 생각이 없다. 그게 자연의 무시무시함이다. 의인화해서 자신들의 호불호, 기쁨과 슬픔에 관계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자연의 위대함을 보게 된다. 그 크기와 말없는 감수가 우리를 놀래키는 거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원대하심과 궁극적인 승리가 우리의 밀당과 감격과 거부와 감사를 뛰어넘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성실함을 증거하고 있다.

알듯 모르듯 보고 있고 확인했다 놓쳤다를 반복하며 철이 드는 거다. 그 속에 우리 엘리후가 법칙과 인과보상으로 붙들어 매는 세계의 끝자락을 잡는 모습을 뭘로 묘사했는가. 폭풍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셨다.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역동성, 열정을보여주고 있다. 무정하고 비정하지 않다. 말없는 심판관이 아니다. 뛰어들어 오신다.

오늘 읽은 장에서 보다시피 여러 동물, 길들여진 것을 말하지 않고 창조된 모든 것들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유익한 것, 필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생명을 뽐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이사야서 11:5, 6 RNKSV)

공의, 성실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복으로 주어질 것이라. 그 때에 모든 자연이 궁극적으로 완성된다. 하나님 통치의 궁극적 영광이다. 모두가 다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에 축복을 누릴 거다.

욥의 고난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승리와 영광, 그것을 약속하시고 증거를 삼으시는 모든 생명체를 보라는 얘기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창세기 1:28 RNKSV)

욥은 하나님의 동반자의 위치에 서 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욥기 38:3 RNKSV)

예수 믿으며 신앙이 싶어지면 짐도 같이 커진다. 그래서 하나님을 몰랐을면 하는 때가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까지 주셨다. 우리도 그냥은 안 된다. 우리도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거다. 역사 속에서 자기 시대를 직면하는 책임에서 면제 받는 사람은 없다. 자기 시대의 도전들을, 그 도전 앞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에 대답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에 대해 책임있게 대하시듯이.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외면하지 말라 하신다. 세상의 상품 가치는 희소 가치에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건 모두에게 주신다. 꼭 필요한, 성실함, 순종, 감추어진대로 있는 것, 그것이 자연의 경이, 위엄, 무심함, 자신의 생각대로 뒤집지 않는 것. 그러니 욥에게 하나님이 이 답을 주신 거다.

예수 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 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7-10 RNKSV)

예수님 생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거다. 제한된 자기의 모습을 지키는 것. 그 조건에 감수하는 것. 아무도 몰랐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지, 한 육체가 되어 시공간에 묶여 순종하시는 모습을 못 알아본거다. 모든 사람이 겪는 하나의 방식을 감내하신거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능력, 해결자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말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육체에 있는 것 자체가 구원의 길.

거슬림을 받는 길에 자신을 걸으신 거다. 욥도 이러한 위치다. 영광의 길을 가는데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데 우리는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수준을 포기하지 않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