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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6장- 강해 26

뚤뭇 2013. 10. 22. 06:59

욥기 36장- 강해 26

엘리후의 마지막 권면, 꾸중, 변론

38장 이후에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하시는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봐야 한다. 비 이야기, 눈 이야기, 바람 이야기가 나온다. 창조 세계의 엄위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크심을 변론하고 욥의 반대와 고소, 고집을 꺾으려고 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욥기 전체의 큰 전제 조건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하늘 회의에서 하나님이 사단을 꾸짖었다. 욥의 성실한 인생을 자랑하며 사단을 꾸중함. 그러자 사단이 반론을 제기하는데, 하나님이 그가 하는 일에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 말은 편애를 해서 그렇단 말이냐. 그럼 보상을 한 번 끊어볼까?

욥의 성실하심에 대한 보상을 안하기 시작했다. 욥에게 일어난 재난에 대해 친구들이 와서 말한다. 네가 잘못한 것이 있어 잘못되게 되었다.

하나님과 사단의 논쟁은 욥의 성실함에 대한 하나님이 보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의 잘잘못이 아니라 욥이 한 일에 보상을 안 하기로 하자, 친구들이 와서 욥의 잘못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욥이 답답하고 억울하다는게 이해가 되나? 욥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할 일을 다 했는데 하나님이 보상을 안 하신거다.

이렇게 시작된 긴 논쟁 끝에 세 친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여기서 엘리후가 등장. 그의 역할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재확인. 창조 세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 질서와 경이로움을 보라. 천둥 소리, 번갯불, 폭풍우를 보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과 질서를 보라. 이것이 엘리후다. 욥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앞의 세 친구에게 대답을 했기 때문에 그들도 이미 욥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엘리후의 발언은 하나님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답변 속에서 다른 점을 앞으로 찾아볼 것이다.

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보상이 없을 때에도 욥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것인가 였다.
욥의 입장에서 보면, 죽자였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욥을 죽일 수는 없다 였다.

우리는 늘 자책과 회개로 돌아가서 문제를 쉽게 해결하거나 아니면 죽어버리려고 한다. 우리는 시작할 때 내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기억난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예를 욥에게 맡겼다. 단지 한 사람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사단 앞에서 하나님이 공정하게 꺼내놓은 하나의 내기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겪는 신앙의 현실 속에서 하나의 만족이 아니라 명예를 위탁 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왔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죄를 감추려고 하지만, 그러나 나는 내 허물을 아주 감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슨 말로 나를 헐뜯든지, 나는 그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에게서 비웃음을 받을까 하여, 입을 다물거나 집 안에서만 머무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내가 한 이 변명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까? 맹세코 나는 사실대로만 말하였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다. 내 원수가 나를 고발하면서, 뭐라고 말하였지? 내가 저지른 죄과를 기록한 소송장이라도 있어서, 내가 읽어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어깨에 메고 다니고, 그것을 왕관처럼 머리에 얹고 다니겠다.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그분께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 앞에 떳떳이 서겠다. 내가 가꾼 땅이 훔친 것이라면, 땅 주인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라면, 땅에서 나는 소산을 공짜로 먹으면서 곡식을 기른 농부를 굶겨 죽였다면, 내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거나 보리 대신 잡초가 돋아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겠다. 이것으로 욥 의 말이 모두 끝났다. (욥기 31:33-40 RNKSV)

내가 잘못했다고 얼버무리고 싶지 않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심판을 받겠다. 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욥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다. 창조로 엘리후가 욥을 마지막으로 무릎 꿇리게 하는 그의 논리, 이해, 확신 위에 있는데 그 속에 한 인간에 불과한 네가 어떻게 옳겠는가. 이 지점이 답이 풀리는 지점이다. 창조 세계.

그러나 한 달란트 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 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 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서 25:24-30 RNKSV)

37장의 창조 세계를 엘리후가 이야기하면서 범한 치명적인 오류는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인과율이 전부인 하나님으로 결정해 버렸다는 점이다. 기독교가 선하고 옳아서 신앙 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인생의 중간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은 100% 회개의 단계를 거쳤다. 내가 몰랐던 죄를 알았다가 용서를 받은 것에 대한 감격이다. 구원은 누가 와서 꺼내 준 것이다. 구원은 보상과 심사가 아니다. 예수 믿고 나서는 잘 해야 한다는게 아니라 예수는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죽으러 오신 것이다. 엘리후는 옳고 그른 것으로 닫아 버렸다. 하나님은 당신을 아브라함을 부르시는데서 나타내신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고 먼저 결정하시고 약속하신다. 갈대아 우르의 한 이름 없는 사람을 세워 약속하신다. 예수 또한 죄인과 가난한 자를 위하여 섬기러 오셨다. 심판으로 오시지 않고 구원을 하러 오신다. 이 높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자비와 긍휼과 용서와 능력으로 얼마든지 부르신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

인과율의 차원에서도 하나님은 풍족하시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나갔다 들어와서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형은 아마 진정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지 않았을 수 있다. 창조 세계는 이런 인과관계, 성실한 조건과 그것을 만족시키는 보상 관계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험과 선택이 허락되어 있는 열린 세계란 말이다. 나가겠다는데 그것마저 허락해주시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이다.

비열한 사람의 돌이킴, 회복과 기적이 있다. 다시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옳고 그런 것이 명백하게 이분법으로 나뉘는, 규칙적으로 보응하는 이런 큰 깊고 풍요로운 내용들이, 자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창조라는 것은 이런, 인과관계의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요.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초대다. 우리 인생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사실 생각해보면 기도를 할 때 마다 이것으로 돌아와서 안심을 한다.

우리는 도전마저 할 수 없는 패배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에까지 이끌어 가신다. 답답하고, 스스로 자책 거리 밖에 없고 내세울 것이 없는 보편적인 삶 말이다. 선택의 여지나 도망갈 곳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정답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더 많이 배워야 한다.

간구에 답하는 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우리의 유한함과 무지와 나태함, 무력함으로 살아가야 하는 나날들에 대한 회한에 무언가가 생기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생겨야 한다. 우리는 1차적으로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어두움인가. 실패인가. 잘못인가. 이런 인생이 더 많고 특별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 아브라함하고 아브라함 링컨 밖에 없는데, 그럼 실패자들은 다 죽으란 말인가. 세상을 위하여 그 아들을 위하여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이란 말은 그럼 우리에게 꽝이란 말인가.

우리의 범상하고 평범하고 내세울 것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예수의 보혈을 필요로 하는 존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예수 외에는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리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 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서 22:36-40 RNKSV)

그 율법의 요구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으로 증거된 사실이다. 우리가 늘 조마조마해 하고 민망해 하면서 하는 기도의 대상이다. 자신을 가지라.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