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32장 - 강해24
욥32장 - 강해24
세 친구가 욥에게 충고, 지적, 자기들의 이해로 욥을 납득, 회개시키길 원했지만 실패.
욥은 자신을 억울하게 하신 하나님이 답하지 않으면 이 문제를 알 길이 없다.
이 시점에 이르러 엘리후가 지금부터 여섯 장 동안 마지막 참가자로 욥을 꾸짖는다.
엘리후의 지적, 깨우침, 권면들은 앞에 나온 세 친구들과 내용 면에서는 대동소이. 하나님의 높으심, 정의로우심, 오래 기다리심, 권면 같은 것들을 무시하지 마라, 순종하라는 내용. 동일한 내용이지만, 엘리후의 등장, 위치는 무엇을 맡고 있나? 앞에 있었던 세 친구들이 신앙에 있어서 원칙, 인과응보를 가지고 신앙을 변명하고 욥을 권면하려고 했던 것과 달리 엘리후는 진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나온다. 내용은 같지만 진심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욥에게 세 친구를 위하여 제물을 드려 용서 받게 된다는 결론인데, 거기에 엘리후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엘리후의 맡은 배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더러는 엘리후의 발언에 이어서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 사람이라는 의견도 있고 반대로, 사단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가치가 없어서 배제된다는 극단적인 견해가 있다.
엘리후가 사단처럼 취급될 이유는 없는데 세 친구와 동일한 취급을 받은 적은 없다. 그리고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지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긴 하다. 엘리후가 내세운 진심, 진정성은 욥기에서 부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진심이란? 거짓되지 않는 참된 마음. 이게 무어 문제인가? 한 번 더 깊은 이해를 나누어 보자.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 맞는가 틀린가?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 맞다. 간절히 기도한 것 다 응답받았나? 아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그러나 다 받아주시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이 안 들어주셨다. 간절한 것이 조건인가? 간절하면 무조건 답이 오는 조건인가? 그게 맞다면 하나님은 필요 없어진다. 대상과 상관없이 내 간절함의 유무와 상관없어 진다. 간절히 기도하면 받는 것은 그 기도가 들어줄만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척은히 여겨 주시는 분이란 뜻이다. 간절히 기도하면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다. 무리한 것도 아마 들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간절한 것으로 조건이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신다는 거다.
au dedans de moi, c’est comme du vin sous pression, comme des outres neuves qui vont éclater. (Job 32:19 NBS)
내가 얼마나 정결해야 하는가가 기독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접속되야 한다는 거다.
C’est moi qui suis la vraie vigne, et c’est mon Père qui est le vigneron. Tout sarment qui, en moi, ne porte pas de fruit, il l’enlève; tout sarment qui porte du fruit, il le purifie en le taillant, pour qu’il porte encore plus de fruit. Vous, vous êtes déjà purs, à cause de la parole que je vous ai dite. Demeurez en moi, comme moi en vous. Tout comme le sarment ne peut de lui-même porter du fruit, s’il ne demeure dans la vigne, vous non plus, si vous ne demeurez en moi. (Selon Jean 15:1-4 NBS)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이름을 꺼내지만 스스로 자신을 정결케 하고 흠없게 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부분을 배제해 버린다. 이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기독교는 옳고 그른 것이 원칙이다. 기독교는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게 아니라 옳게 하려는 종교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주신 주인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종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판단하려고 한다. 내 마음 시원하게 내 잘못을 씻어 정결하고 흠없게 하려고 자꾸 급박하게 군다. 지금 엘리후가 그런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다시 이 땅에 보내시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기다리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 기독교의 의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엘리후는 빗나간 사람이다. 예수를 믿으면, 스스로에게나 같이 믿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무슨 덕목이 있기를 바라나. 한 점 흠이 없기를 바라나? 기독교는 용서하고 기다려주시를 바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려나? 엘리후의 등장으로 자기 맡은 배역을 통해 욥기가 위치하는 여섯 장이다.
칼슨이라는 사람의 책에서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모든 것을 단일 시스템에 넣으려는 것은 다양성을 단일성으로, 역동성을 수동성으로 가게 만든다. 욥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벗어난 하나님을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에 대해서 열어놓아야 한다. 세친구를 본받지 말고 욥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욥을 하나님이 기다리고 용서하기 위해서 지금도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런것을 생각해보라.
국가, 사회, 정의, 도덕 같은 말을 하면 옳고 그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옳든 그르든, 우리가 당연히 존재하는 의무와 책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 못났음, 아우성, 남을 미워하는 것, 하나님이 존재케 하셨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억울하고 답답, 불편하다. 사회가 몰라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서 일어난 어려움이다. 그걸 감수하라는 것이다. 욥기가 42장까지 간다니까.
고생하고 욕 먹는 욥이 옳았다고 한다니까. 욥이라는 존재가 당하는 현실이 사실이지 않냐는 것이다. 이 말이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에 대해 견딜 수 있는 방법이 가장 좋다. 누구를 내 마음에 들려고 꺾는 것은 하나님을 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살아있고 당하는 일, 고립된 자기는 없다. 사회적이다. 내가 태어난 나라, 관계된 이웃, 가족, 시대를 도망갈 수 없다. 모두에 얽히고 설킨 문제로 인한고통이고 억울함이다. 그 문제를 내 마음에 들게 판을 짜자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불만이다.
Quand je parlerais les langues des humains et des anges, si je n’ai pas l’amour, je suis une pièce de bronze qui résonne ou une cymbale qui retentit. Quand j’aurais la capacité de parler en prophète, la science de tous les mystères et toute la connaissance, quand j’aurais même toute la foi qui transporte des montagnes, si je n’ai pas l’amour, je ne suis rien. Quand je distribuerais tous mes biens, quand même je livrerais mon corps pour en tirer fierté, si je n’ai pas l’amour, cela ne me sert à rien. (Première aux Corinthiens 13:1-3 NBS)
똑똑하면 옆 사람을 유익하게 하라. 건강하면 옆 사람의 짐을 들라. 은사를 가지고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고 하지 말라. 사랑이 은사라는 얘기가 아니라 모든 은사를 사랑의 관점으로 써야 한다는 거다. 오래 참음은 오랜 고통이다. 결혼해 보면 모두 겪는다. 사랑은 가슴 뛰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거다. 정열이나 소원에 불타서가 아니라 사랑이 뭔가 싶은거다. 사랑은 상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지는 거다. 사랑은 내 마음 같으라고 하는 것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지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
내 맘에 들게 하고 싶다. 엘리후가 화를 냈다. 진심이거든. 사심을 갖지 않고 자기 편하자고 그런거 아닌데. 그러는 바람에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일에서부터 신앙을 끊어버렸다. 이 문제를 싶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얼마나 많이 참고 웃을 수 있느냐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