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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19장 - 강해15

뚤뭇 2013. 8. 31. 14:12

18장은 수하 사람 빌닷의 주장이었다. 그것 자체로 죄인인 증거다. 악인의 형벌은 지구를 떠나거라는 질타의 말이었다.

19장은 그에 대한 욥의 대답. 고통이 심하니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지 아느냐. 지구에서 떠나는 고통보다 더 심하다. 이건 관계의 단절을 말한다. 내 집에 있는 사람을 몰라본다. 나를 대적한다. 어린 아이들이 나를 업신여기고 대적한다. 관계의 단절이 갖고 오는 고통을 호소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고통을 말한다. 하나님께 무엇이 그런 문제라고, 침 삼킬 동안도 놔두지 않느냐는 계속된 논쟁을 한다.

나한테 잘못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관계를 끊고 재판장의 관계까지 갈 수 있느냐. 항복하지 않는 고집, 고통의 호소들은 다 기존의 종교에 관한 이해. 생각을 넓히기 위해서 기존의 종교 체제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 현실과 경험을, 그 전에 알았던 종교의 이해 체제 안에서 설 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의 결론에서 되돌아 봐야 하는 이 과정들은, 하나님이 이럴 것이라고 묶은 것에 대한 경고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어떤 부분으로 안심되면 곤란하다. 이 세 친구가 붙잡혀 있었던 어떤 한계, 어떤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에 대한 과오가 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세상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당신들에게 찾아와서 당신들을 따를 것입니다. 당신들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태가 복을 받아 자식을 많이 낳고, 땅이 복을 받아 열매를 풍성하게 내고, 집짐승이 복을 받아 번식할 것이니, 소도 많아지고 양도 새끼를 많이 낳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당신들에게 닥쳐올 것입니다. 당신들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고,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곡식 광주리도 반죽 그릇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몸에서 태어난 자녀와 당신들 땅의 곡식과 소 새끼와 양 새끼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신명기 28:1-4, 15-19 RNKSV)

욥기가 이 구약의 약속에 있는데, 여러분은 규칙을 지키고 복을 받는게 좋은가, 아니면 저주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가. 나는 하나님이 저주의 원칙을 안 지켰으면 좋겠다.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 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어느 것이 좋은지. 친구들이 와서 원칙의 하나님을 선언하고 네가 벌을 받았으면 틀림없이 벌을 받아라?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욥은 2회전에 와서 다른 답을 준비하고 있다. 혹은 다른 답으로까지 밀려났다.

주님께서 손수 나를 빚으시고 지으셨는데, 어찌하여 이제 와서, 나에게 등을 돌리시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진흙을 빚듯이 몸소 이 몸을 지으셨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티끌로 되돌아가게 하십니까? 주님께서 내 아버지에게 힘을 주셔서, 나를 낳게 하시고,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살과 가죽으로 나를 입히시며, 뼈와 근육을 엮어서, 내 몸을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시고, 나를 돌보셔서, 내 숨결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주님께서는 늘 나를 해치실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 (욥기 10:8-13 RNKSV)

하나님이 만드신 내가, 잘 하나 못 하나를 본 후에 잘 하면 상 주고, 못 하면 없애버릴 목적으로 지으셨는가라는 질문까지 왔다. 원칙보가 더 큰 창조의 힘,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신 이가 어떤 판정이나 선택을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질문으로까지 갔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욥기 19:25-27 RNKSV)

욥은 부활 신앙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부활이 감추어져있고 모호한 상태이다. 그러나 욥은 미래에 대해 넉넉한 예언을 한다. 욥이 가는 길은 욥이 이해하는 것으로, 그리고 25-27은 창조,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인간의 완성을 섬광처럼 만나고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앞에서 봤던 신명기적 약속에서는 잘못은 곧 죽음이었다. 불순종하면 그가 줄고 후손도 잊혀진다. 앞에 있었던 신명기 사관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신명기에서 악속한 이 한계를 벗어날 방법이 없고 지금의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고 가치를 이해할 길도 없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마음을 다하여 그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아라. 주님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모든 병을 고쳐 주시는 분,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해 주시는 분, 사랑과 자비로 단장하여 주시는 분, 평생을 좋은 것으로 흡족히 채워 주시는 분, 네 젊음을 독수리처럼 늘 새롭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시편 103:1-5 RNKSV)

이제는 주님에 대한 찬양에 조건이 없어진다.

주님은 공의를 세우시며 억눌린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변호하신다. 모세 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 주셨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님의 행적들을 알려 주셨다.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시편 103:6-10 RNKSV)

구약에서 욥기의 몫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데 있다. 법이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 28장을 통해 우리는 항상 구약의 죄와벌에 대해 배운다. 그러나 성경은 용서를 말한다. 용서하고 돌이키고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용서를 타인에게는 심판을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은혜 아래서 힘을 쓰게 해 주십시사 기도하는 것이다. 전통적 종교에 대한 이해 속서 부활은 없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인데 죽음은 곧 형벌요 심판이다. 거기에 반전은 없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은 사랑이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 RNKSV)

옳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라. 따뜻한 사람이 되라. 정죄와 심판에 조급한 우리를 반성해야 한다. 불안해서, 무서워서 그런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십자가는 갈 수 있는 최악까지 다 간거다. 선과 생명이 죽는 것까지 간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우리를 용서할 수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 어떤 두려움? 망할 것 같고 저 사람 때문에 힘들 것 같은 두려움. 그러나 오랜 고통, 인내를 알아야 한다. 겁이 나고 무서운 거다. 믿음이 없는 거다. 최악의 몇 곡을 뒤집으시는 하나님. 고난과 억울함을 통해 그 자리에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그가 원래 알았던 그 체제를 부정하고 충고를 한다고 한다. 욥이 아니라고 고함을 지르면 자기의 안심이 무너진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행하하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린도전서 13:7 RNKSV)

나의 고통과 인내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는가로 보라. 신자의 발전은 고통과 상처 속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판단한 안심, 보상에 갈 수 없다. 그것을 지나갈 때 우리는 몸부림을 친다. 우리는 하나
님께 불평을 한다. 예수 외에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선언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말을 알아야 한다 어떤 기독교 신앙도 예수의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께로 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