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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12 - 욥기 15장

뚤뭇 2013. 8. 20. 03:18

욥의 답변에 대한 친구들의 두 번째 답변 - 엘리바스부터 등장

1-16. 욥 너 교만하다.
17-20. 악인은 결국 패망으로 끝난다.

친구들의 충고가 내용상 옳다는 점이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그런데 결론에 가면 하나님이, 세 친구가 틀렸고 욥이 옳다는 판정을 한다. 옳으면 다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게 욥기이다.

욥은 자신이 당한 일을 신앙의 지식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욥의 필사적인 불평에서 보여주는 경건을 친구들은 못 보고 있다. 필사적인 불평에서 보여지는 경건. 이런 말이 있나?

나는 조금 이해가 된다. 삶의 어려움과 절망 앞에 섰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아주 믿음이 없는 행위이기도 하고 아주 믿음이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놓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믿는 행위가 있는 것이다. 치열한 불평과 응답해주시기를 바라는 필사적인 행위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

일본의 패망을 보고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결론을 내려버린다면 625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많은 순교자들과 피난민의 슬픔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세 친구의 옳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틀렸다고 결말을 보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결말이 연결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욥은 끊임없이 필사적인 불평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 갖고 나아갈 필요없이 인간의 상식으로 판단될 문제인데 틀린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자고 하는가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칙을 지켜주셨으면 좋겠는가 원칙을 지키지 않았으면 좋겠는가. 어렵다. 하나님이 원칙을 지키면 우리는 다 지옥 가야 한다. 욥이 욥기 내내 이런 공격과, 자신도 공감할 수 있는 세친구들의 공격에 대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법칙 말고 그 법칙을 만든 창조주에게 무러봐야겠다.

내가 알고 있던 경험,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 물어봐야 할 문제이다. 그것을 인간이 해결할 수 없어서 울부짖어야 한다면 신은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신이 될 자격이 없다.

인간이 얼마나 불가해하는 존재인가를 아는 것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 아무도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없고 아무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 사람은 사심이 없으면 옳다고 생각한다. 다른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에 대해 예수의 오심으로 해석하려 한다.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이 무시무시한 것은 이해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말이다. 예수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된다.

원칙에 묶여있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 원칙에 얽매여 버리면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한계.

친구들은 하나님께로 갈 필요가 없다. 원칙 이상의 하나님을 알 필요가 없다. 자신이 옳기 때문이다. 이러니 답변을 더할 수록 친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들의 진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렇게 필사적으로 붙잡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에 서 있는 욥의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엘리바스의 일관된 주장
* 인생이 무엇이기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무엇이기에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 (욥기 15:14 RNKSV)
*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욥기 4:17 RNKSV)

욥의 주장
*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욥기 7:17 RNKSV)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야곱의 인생으로 보자. 야곱은 평생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노력한 자다. 얍복나루에서 천사와의 싸움에서 축복을 요구한다. 니가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이루었고 하나님께 복을 받아냈다. 하나님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만 매달렸다.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이다.

욥도 이와 같다. 하나님을 만나자는 거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 많이 저지르고 있는 자기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쉬운 것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으로 기도가 있다. 기도를 한 것으로 우리가 끝났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기도하고 고민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피땀흘린 기도를 하고 나서 평안해졌다가 아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라고 신음하는 십자가의 자리까지 나아갔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쉬운 것으로 외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젊어서 고생하면, 노년에는 회상하며 커피나 마시는 인생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늙으니 나라 걱정을 하게 되고 날씨 걱정을 하게 된다. 젊어서는 자기의 이해의 한계가 매우 작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이가 드니까 비로소 그 간격, 그 거리 사이에 들어있는 실제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인생은 고단한 거다.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대강 끝내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시고 간섭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할 때 자신의 충심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을 저버릴 꺼라고 예언하는 동시에 그 이후에 자신이 베드로를 어느 자리까지 끌고 갈 것인지를 인도하시겠다고 말한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치욕과 부끄러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헌신, 막연한 진심, 공의, 정의, 평화, 목숨을 건 기도로 다 넘어가지지 않는 신앙의 길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미결 상태로 놓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사실일 수 있다.

나도 젊은 날은 대강 살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훌륭해진건 3년 전 부터다. 그때 죽을 것 같이 앓았다. 죽음을 대하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시작했다. 구원 이후의 여정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고 분명한 것, 나에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만 분명하다. 인자와 자비와 거룩하심이 풍성하시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를 방치하지 않기로하셨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예수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진정한 성경적 표현이다. 예수의 죽으심, 인간의 손에 의해 죽으심. 그것을 믿고 본 모든 신자의 생애가 그러하다. 적당히 됐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포기하지 말라. 우리의 비명과 아픔이 결단코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실 손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역사를 되돌아보라. 이 무시무시한 역사를 되돌아보라. 잘잘못의 문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일하심, 측량 못할 깊이를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