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욥기 강해 8 - 욥 11장

뚤뭇 2013. 8. 9. 23:50

첫번째로 엘리바스 등장했었다. 도덕률로 욥을 가르치려 했으나 실패

두번째로 빌닷이 나왔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오랜 경험과 축적 속에서 나온 전통인데, 네가 어찌 잠시 살다가면서 그 틀을 깨고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려고 하느냐 라고 했다. 그러자 욥이 나도 안다. 내가 짧은 인생을 사는 깊은 지혜를 다 담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안다. 그러나 그 고정관념이 하늘로부터 결론으로 완전한 어떤 이치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오랜 세월에 걸친 시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 아니냐. 그것이 어떤 식으로 그런 결론에 이르러서 우리의 고정관념이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우리가 그것을 더 발전시키고 깊이를 파야 하는 일에 쓰일 수 있지 않느냐고 답을 냈다.


이제 소발 등장. 하나님이 더 크시지 않느냐. 네가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겠느냐가 이 친구의 주요 주장. 


하나님이 우리보다 지혜가 크시며 생각이 깊으시지 않겠느냐. 이미 있었던 틀을 깨려고 하지 말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아보아라. 왜냐면 하나님이 틀렸을 가능성보다 니가 틀렸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느냐.


2~12절: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 광대하신 주님

13~끝절: 그러니 회개하라. 복을 받을 것이다는 내용


세 사람이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모두 진리의 한 부분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잘못되지는 않았다. 다만 욥이 겪고 있는 경험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중요한 주제이다. 도덕으로도 담아내지 못하고 경험으로도 담아내지 못하고 신비라는 것으로도 담아내지 못하는 그것을 욥이 경험하고 있다.


우리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 역시 이 세친구가 가진 것 중에 하나거나, 이 세 가지를 적당히 섞어놓은 것이다. 우리는 이 세 친구들의 주장의 공통에 나오는 것처럼, 회개하라는 말을 섣불리 쓰면 안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증명하시는 분이며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다. 그런데 우리를 이 사실을 어디에 갖다쓰냐면, 나 편하자는데 갖다 쓴다. 괴로워하고 의심하고 고통하고 불만하는 것을 옆에서 못 견디는 것이다. 왜냐면 나도 불안하니까.


내가 완전하고 충만하면 옆에서 누가 불만을 토하거나 비명을 질러도 괜찮은데, 내가 아슬아슬한데, 옆에서 넘어가면 붙드는 거다. 잠잠해라. 비명 좀 그만 질러라. 안그래도 내가 불안한데 너는 왜 그러냐는 것이다. 


13절부터 마지막까지는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회개는 안심하고 안전해 하는게 아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로 인한 구원에서 회개라는 것이 요구될 때, 길을 돌이킨다는 개념으로 갖고 있다. 길을 돌이킨다는 것이 하나님 모르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순종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돌이킴은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가장 많이 이해되고 있다. 거짓말 하던 것 안한다. 이게 더 큰 이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이해는 더 깊이 안 들어온다. 하나님은 거룩, 사랑 이렇게만 들어와있고 그 이후에는 모호하다. 그것만으로 안심이 안 되는 불안에 대해 애써 외면하는게 우리다. 


옆 사람이 으악 하는데, 나가 떨어지는 것이 우리다. 우리 기독교가 한참 부흥했을 때 우리는 사실 자신감을 가졌다. 그리고 지금 어려운 형편을 맞았다. 그래서 다 같이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문제다. 우리가 부흥했을 때 넉넉했던 것도 아니고, 지금 배척을 받거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해서 불안할 것도 없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론이나 대세, 힘에 의해서 흔들리거나 타협을 해야 할 분이 아니며 우리가 하나님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분도 아니다. 그 분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 선하심에 대하여 우리가 굳은 고백을 했는데 우리는 사실 본질적인 것으로 우리의 위안이 되거나 힘이 되기보다 밖에 있는 환경에 의해서 더 많이 흔들린다. 그리고 비명을 질러댄다. 많이 드는 예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무엇을 구하는가. 내 불안, 의심, 내 모호함을 없애달라는 것이지,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오래 믿은 시간은 있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아느냐고 하면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신앙을 갖고 있다. 그것에 대한 도전이 욥기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다 이해하고 측량할 수 없다는 데에 초점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몇 가지 따져보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어느날 우리 집에 와서 하소연했다고 해보자. 이삭 바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겠나? 이런 질문에 우리는, 아니 하나님이 그러실 분이 아닌데 왜 그러나. 그건 이방신들이나 하는 짓인데 설마 하나님이! 내가 아는 하나님은 그럴 분이 아니네! 라고 말할 것 아닌가.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알기 때문에 그렇지, 실제로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반응을 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은 그것보다 훨씬 큰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더 깊고 무궁한 지혜의 차원에서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 우리의 이해 저편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삭을 바치라는 대목에서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그 한계 - 아들 - 를 벗어난다. 우리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한 번에 날려버리시면서 그 속에서 나오라고 하신다.


우리는 롬5장에서도 이 말씀을 보지 않았는가. 

1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2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환란이 소망을 만들어 내는가? 환란은 망하는 길, 막히는 길, 꺾이는 길 아닌가? 죽어 나가는 길이 어떻게 영광의 소망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는 거다. 


동으로 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끌고 가서 동의 끝에 다다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거다. 우리는 쉽게 믿는다. 기독교 신앙이 나 좋은 신앙이 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 생전에 안심할 장치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으니 안전 장치로 믿는 정도만 된다. 


우리는 더 고민에 휩싸이고 갈등을 겪게 될까봐 예방접종을 맡는다. 밀렸던 십일조를 내고, 안 나왔던 평일 예배 나온다. 예수 믿는 신자들이 그 깊이와 무게와 신비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해하고 붙들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 하나님이 누구시냐는 우린 단 한마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십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 알잖은가.


 5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죽게 해버렸다. 끝난 거다. 그런데,


9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았는가. 죽음이 승리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빌2:1

1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2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옆길, 우회로, 짐짓 병존할 수 없어 보이는 가지까지 다 묶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는 무한함을 다 바쳐 내가 오늘 가는 길에 옳음과 정당함과 무슨 순종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으로 안전을 확보하고 모두의 항복을 받아내, 힘이 되고 여론이 되고, 큰 소리를 치는 것으로 가지 않도록 조심해라고 등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신앙 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옳고 내가 간절한데, 하나님이 감추어 놓고 나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딴 사람이 가짜인데, 그가 큰소리를 치고 이상한 소리를 하고 대접을 받는 다고 한다. 그런데 나 이 진짜는 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감추어지는지에 대해 억울해 한다.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설득력을 가질 때 오히려 위험하다. 친구 셋은 전우 아닌가. 셋이 달라붙어서 욥보고 틀렸다고 하는데 욥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현실 속에서 고난을 받고 있으니까 누가 봐도, 잘 했는데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하니 말이 안되는 것이다.


세 친구들의 도덕률이나 경험, 신비에 관한 일들을 모르는 바도 아니며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상한 것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이해가 안가면 이렇게 예를 들어볼까. 


나는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병명을 잡지 못한다. 다 정상이다. 그러니 나는 이상한거다. 나는 의사를 믿지 않는다. 죄송하다. 다 옳아. 엘리바스 같고 빌닷 같고 소발 같애. 마지막에 주는 처방이 그거야. 스트레스를 받지 말래. 내가 문을 열어서 스트레스를 받았단 말인가? 지가 숨어 들어왔지. 


예화를 들려고 꺼낸 이야기다. 의사들 화내지 마라. 병원에서 꼭 그 얘기 한다. 저 사람은 꼭 죽는다가 살고 저 사람은 걱정없다고 하는데 산다. 앞일은 모르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안심시키려고 한다.


오늘 소발의 주장 속에 만난 하나님의 크기만 해도 그렇다. 환란이 만들어내는 소망, 예수의 죽음이 이루는 영광, 이런 것들은 신비와 기적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아니라 자기 편하자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지 않으면 현실을 신앙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현실을 신앙으로 담아내지 못하면, 하나님을 욕할 순 없으니까 이 일의 원인이 무엇, 혹은 누구에게 뒤집어 씌워 욕하게 된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 말 안에 우리는 결코 못 들어가게 된다. 현실의 부조리함, 억울함, 무거운, 긴장, 갈등 등을 하나님께 들고 가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큰지를 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실수, 미련함, 한계, 무지까지 다 감당하며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를 띄워보내지 못하고, 현실에 어떻게든 나를 묶어보기 위하여 화를 내고 겁을 내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사랑할 틈이 없는 것이다. 표정이 나빠. 


고후4장

7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8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10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음과 생명이 손을 잡을 수 있다는게 말이 되는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져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우리는 너무 현실을 단순하게 생각한다. 어려우면 십자가, 잘되면 응답. 


신자라는 이름으로 사는 자들이 현실에서 누리는 영광을 모두 놓치고 있다. 예수믿는 것에 대해 훈장 달고 광고할 건 아니지만, 사업하거나 다른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만나보면 오히려 성도보다 더 늠름하다. 베테랑 같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훨씬 힘이 없다. 놀랍다 놀라워. 


그것 밖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그러는거다. 술먹는 동창 놔두라. 그가 하루를 견디는 거다. 내일을 견디기 위하여 소주 한 잔 먹는거다. 그것 같고 펄펄 뛰지 말라. 술 안 먹는게 전부인 신앙 갖고는 안된다. 그게 자기를 증명할 유일한 내용이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신비와 크기와 부름에 대한 항복, 자기 인생과 존재를 담아낼 마음의 용기. 그게 신앙인 거다. 


어려운 문제를 괜히 건드렸다. 그럼 담배 얘기를 해볼까. 우리가 얼마나 기독교를 치사한 문제를 걸어가지고 증명을 해야될 만큼 가난해졌는지 아는가. 술 아니면 담배 이야기 밖에 할 게 없다. 우리가 가난하다. 조금 더 읽어보자. 


고후 4:7 이하

 10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1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2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예수 믿는 존재가 되라. 예수 믿는 인생이 되어 현실과 마주하라. 세상을 이기라. 하나님의, 욥에게 준 시련, 도전은 너무나 큰 거다. 하나님이 누구시냐에 관한 문제다. 하나님은 다만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 상을 주고 벌을 주는 하나님, 열심을 다해서 기도하면 응답하고 등 두드려 주는 하나님, 우리가 그를 외면하면 그도 외면하는 하나님, 이렇게 작지 않다는 거다. 우리 인간 세계에 있어서도 다만 이해관계나 옳고 그른 것으로만 인간관계를 맺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의 삶에서 도덕보다 크다. 소원보다 크다. 


무엇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다만, 그 무슨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를 얻고 건강해지고 라는 소원이 그 사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지, 행복이란 그것보다 언제나 크다. 행복이란 그것으로는 다른 표현으로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런거다. 행복은 쫓아가 빼앗는 물건이 아니다. 다만 존재하고 다만 이기는 것이 전부가 아닌 존재라는 것이다. 보다 큰 존재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다.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기로 하셨고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기로 작정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거룩과 믿음, 사랑을 요구하신다. 그 크기에 우리의 영혼을 꺼내들고 와서 서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물어, 우리 삶에 제일 큰 영향을 미쳐 세상과 현실을 이기라. 


하나님을 아는 기쁨, 그의 자녀로 사는 명예, 인생의 신비와 위대함, 그것을 살아갈 용기와 믿음과 기쁨과 자랑을 쟁취하라. 구하여 얻으라. 그리하여 남의 얘기 듣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기쁨을 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