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10장
욥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욥은 도덕률과 규칙들, 전통과 지혜를 모르는 바 아닌데, 그것으로 지금을 설명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며 멸시하며 ...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부족으로 내가 잘못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기존의 전통과 지혜가 있으면 그 안에서만 해석을 해야 하는데 지금 욥이 제시하는 것은, 그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틀을 만든 이를 더듬어 찾고 그 주인에게 부르짖고 있다.
우리 전통이 하나의 고정관념이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몇 대에 걸쳐서 얼마만큼의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무엇이 전통인지는 항상 애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닷이 얘기하는 바와 같이 너는 오래 살아야 칠십이고 하나님은 영원한 분인데 어떻게 네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비판할 수 있는가라고 되묻고 있다.
욥 자신도 시간적으로 짧은 인생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이란 것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금까지의 전통의 틀을 깨자는 것이 아니라 보완해야 하지 않냐는 의문을 제시한다.
자연주의는 모두가 가진 세계관이다. 자연주의는 현실,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는 현실, 세상이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가 든다.. 자연주의다. 인류가 살아온, 지금까지 동일한 규칙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일들이 생기지 않는 한 모든 인류는 자연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그 자연주의가 너무나 반복적이기 때문에 윤회관을 만든다. 종교적인 어떤 각색을 해서 불교가 그 사상을 얘기하듯이 한 존재가 죽고, 다시 태어나고, 인류라는 이름으로 반복하는 윤회, 반복의 삶을 사는 것이 자연이고 그 자연의 일부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주의다. 이 약점은 예외없이 허무주의로 갈 수 밖에 없다.
끝없이 같은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면 결국엔 회의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 숙명론에서 벗어난 유럽 사회에서 실존주의라는 말을 만든다. 실존주의와 실존은 조금 다르다. 실존주의는 이 허무주의를 깨기 위해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권리는 선택권이다. 모든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 선택을 내가 한다는 데 의미를 두는, 허무주의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 친 하나의 사조다. 대표적으로 사르트르이다. 자기 맘대로 살았다. 선택을 했다. 자연주의의 허망함을 깨기 위한,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한 거부권만 있는 것이 실존주의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주의가 대표적으로 그렇듯이, 법칙, 도덕, 규칙, 전통 등 그 어느 것도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쫓아 올라가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이요 견장이라는 것이다. 기계적인 반복, 순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 기회, 축복인 것이다. 구약에서 보는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이 도덕성을 요구하시는 분이지, 도덕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의 계시로써 법과 전통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궁극이다. 욥은 인내의 화신이 아니라 믿음의 화신이다. 그는 틀을 깨고 있기 때문이다. 세 친구들은 도덕, 전통의 틀을 씌우려 하고 있고, 욥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
이 대결이 욥기의 관전 포인트. 하나님의 일에는 후회나 번복, 포기가 없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하나님께 되묻고 있다. 이제껏 가질 수 없었던 자신의 경험 속에 하나님을 묻고 있다.
10: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욥기 10:18 KRV)
친구들에 대한 욥의 변명을 종합하면, 내가 너희들이 하는 말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 답이 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께 물어 봐야 할 것이 있다.
전통과 질서는 분명한 세상 질서이지만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절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인간은 망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조될 수 없는데, 지금 있는 것으로 답이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답이 있는 줄 안다. 법칙 아래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께만 답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니가 연역적 방법을 쓴다. 규범과 표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순종해야 할 우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는가에 대해 합리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신학 안에는 조직신학, 구약, 신약 신학이 대표로 자리잡고 있고 역사 신학이란 것이 자리잡고 있다. 실천 신학은 설교학, 상담학, 교육학이 있다. 연역법적인 데서 응용하거나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깨닫는 것은, 이것을 연역법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역법적으로 적용하면 아무런 고민없이 그대로 적용한다는 의미가 강한데 아무런 응용이나 해석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명료하게 적용한다는 것도 하나의 해석이다.
인간은 말을 하면 이해를 해야 하는 존재이다. 오른쪽 눈을 달라 하면 왼쪽 눈을 달라. 이런 말씀은 없잖은가. 그런데 오른쪽 눈을 달라하는 사람한테 왼쪽 눈 까지 줄 수 있는가. 이건 조작법이 안다. 작동 방법이 아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한 과목으로 교회사라는 것이 생겼다. 그 때까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해 봤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게 아니더라 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된 것이다. 실천 신학도 마찬가지다. 설교가 무엇인가 하면 매우 애매하다. 설교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그가 부르신 성도들과 동일한 조건 속의 사람을 세워 청중과 동등함 조건으로 증인을 삼아 당신의 말씀을 선포케 하는 것이 설교다.
설교는 하나님쪽에 가까운 쪽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기 십상인데, 목사는 일반 청중과 더 가까운 입장에서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전전긍긍하는 자가 힘을 다하여 하나님 편을 듦으로써 듣는자들이 수긍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항복을 받아내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이다.
실천 신학에 오면 하나님의 말씀이 허공에 떠 있는게 아니라 그 인격이 개개인의 인격 속에서 항복되고 구체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고 기적과 축복 속에 있다는 거만 말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삶 속에 도전하고 고민해야 한다. 스스로 걸어나와 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존재임을 압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마음을 진심으로 항복시키는 자이다.
기독교 내용과 신앙의 모든 표준이면서 동시에 각 개인이 규범과 표준을 자기 인격과 인생 속에서
담아내고 마시고 채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구체화 해야 하는 것이 텍스트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설명이 책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험과 유혹과 도전과 한계 아래서 발버둥치면서 결국은 모든 세상과 안전을 뒤로 하고 하나님 편에 서 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인격과 생애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 속에서 구체화 해야 하는 것이다. 그 구체화에 무엇이 필요한가. 규범과 표준이라는 말 속에는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피와 살을 바꿔야 된다. 울고불고 실패하고 포기하고 타협하고 돌아오고, 하나님이 안 놔줘서 끝가지 겪게 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안식일 논쟁.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는데 밀을 까서 먹는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 그 때 예수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 하나님은 법 아래 인간을 가두지 않는다. 신앙 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가두지 않는다. 법과 이런 모든 관념, 이상을 뛰어넘어 신앙이라는 것이 나온다.
우리의 모든 발버둥과 한숨과 조마조마함과 자책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인생 속에서 어떻게 할래 세상과 안전 속으로 도망갈래. 아니면 나하고 끝장을 볼래. 하는 것인가. 그것을 신앙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을 신앙이라 하지 않는다. 신앙의 기쁨은 거기에 있다. 나는 다른 존재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거기에 있지, 옳고 그르고 자랑스럽고 쓸모있고..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을 하나님과 연결하여 쓰지 않고 하나님을 대체하여 쓰는 것은 아닌가.